‘뾰족 탑’ 아래 깃들인 처절한 희생의 역사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6.10.27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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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 풍수원성당 등에 ‘순교 흔적’ 남아 외래 종교의 ‘한국화 흔적’도 엿보여
 
근대 문화유산 가운데는 유난히 종교 건축이 많다. 등록문화재 중에서 가장 특색 있는 종교 건축은 아무래도 100년 역사를 지닌 강원도 횡성 풍수원성당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등록문화재 제163호(구 사제관 건물이)로 지정되어 있다. 초기 성당·교회가 대부분 외국인 선교사에 의해 지어진 것과 달리 이 건물은 한국인 사제 정규하 신부가 세운 최초의 성당이다.

외형은 고딕·로마네스크 양식인 명동성당을 빼닮았지만, 초기 형태 그대로 유지된 맨 마룻바닥과 12사도를 상징하는 기둥, 스테인드글라스, 둥근 아치형 천장 등 1백20평 규모 내부는 아주 소박하다. 제대 오른쪽 벽체에 서 있는 마리아상은 한국전쟁 중 치열한 전투에서 기도를 통해 살아남은 미군 장교가 귀국 후 기증해온 것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한국 최초로 신앙촌에 세워진 성당이라는 점이 특별하다. 신유박해기인 1800년 경기도 용인의 신자 40여 명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정착했는데, 이후 전국에서 신자들이 몰려들어 신앙촌을 이루었다고 한다. 당시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첩첩산중인 이곳에 본당을 설정했지만, 정작 성당을 세운 사람은 한국인 사제인 정규하 신부였다. 풍수원성당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은 본당 왼편에 서 있는 유물전시관이다. 사제관 건물을 개축해 초기 사제들이 쓰던 집기와 기도서, 의식복, 흙으로 만든 십자가, 율무 묵주 등 3백20점을 모아놓았기 때문에 전국의 신자들이 즐겨 찾는 순례 성지로 꼽힌다.

유달산을 바라보고 서 있는 등록문화재 제114호 목포 양동교회는 한국인 목사가 세운 호남 최초 자립 교회로 눈길을 끈다. 목포가 개항하면서 이곳을 호남 선교의 전초 기지로 낙점한 미국 남장로회 선교부 선교사들이 지금의 양동교회 자리인 만복동에 천막을 치고 예배를 드린 것이 이 교회의 시초이다. 하지만 교회를 지어 올린(1910년) 사람은 한국인 윤명식 목사였다. 당시 돈 7천원을 들여 1천5백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지었는데, 건물 주춧돌과 벽의 석재들은 모두 교인들이 유달산에서 일일이 날라다 썼다고 한다.

지난 1982년 교회 정문 앞의 종각을 헐어내고 대신 본당 정문에 종탑을 들이면서 앞쪽 공간이 조금 늘어나고 출입문 하나가 사라지기는 했지만, 초기의 모습인 ‘돌 교회’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원래 모두 네 개였던 본당 출입문 윗부분은 태극 문양으로 만들었는데, 일제 경찰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등나무 넝쿨로 가리는 바람에 지금까지 태극 문양을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목사와 신자들의 항일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으로 실제 ‘목포의 3·1운동’으로 불리는 4·8만세운동의 중심에는 이 양동교회 신자들이 있었다. 이제 한국인 목사가 세운 호남 최초의 자립 교회라는 큰 위상은 사라졌지만, 한국 개신교사에 한 획을 그은 명소이다.

 
등록문화재 230호인 서울 혜화동성당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다른 성당이나 교회에 비해 늦게 세워졌지만, 한국 천주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축물이다. 전통적으로 혜화동(잣나무골)은 천주교 창설기와 수난기를 거치는 동안 신자들이 숨어 지내면서 교리를 익히고 신앙을 다지던 곳이다. 종현(명동)·약현(중림동) 본당에 이어 서울에서 세 번째로 본당이 창설된 유서 깊은 곳이다. 처음에는 수도원 부속 건물인 목공소를 개조해 성당으로 썼는데, 장면·장발·박병래·유홍렬·정지용 등 당대의 유지와 지식인들이 많이 모였다고 한다.

1960년에 준공한 이 성당은 건축 전문가가 본격적으로 설계해, 1960년대 이후 지어지기 시작한 모든 성당 건축의 모델인 셈이다. 건물 전체가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장방형 평면 상자 형태를 띠고 있는데, 종탑과 창 모양 등 의장들이 전통 교회 양식에서 철저하게 벗어나 있다. 무엇보다 종탑의 성 베네딕토 성인 입상을 비롯해 100호에 달하는 순교 복자 103위 성화며 스테인드글라스 등 구조물을 김세중·최만린·송영수·문학진·이남규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예술 작가들이 제작해 한국 가톨릭 미술의 시발점이 된 건물이다.

철원 감리교회·여수 장천교회 건물, 교회 변천사 보여줘

이 밖에 1954년 38선 이북 철원군 동송면이 수복되자 이곳에서 신자들이 예배를 드리고 세운 첫 수복지 교회인 철원 감리교회나, 1924년·1974년·2003년에 각각 세워진 예배당 세 개가 한 장소에 나란히 놓인 채 교회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여수 장천교회, 충북 지역 최초의 성공회 성당인 충북 진천 한옥성당 등도 모두 나름으로 의미를 가지고 주목되는 종교 건축물들이다.

건축은 개개 건물이 가지는 개별적인 특성을 넘어 한 시대의 문화와 양식을 담아내는 거시적인 척도로 인정받는다. 그런 측면에서 문화신학자 폴 틸리히가 한 “종교는 문화의 실체요,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라는 말에서 보듯, 종교 건축에 담긴 의미는 예사롭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인지 문화재청이 등록문화재로 지정해 보존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대상 가운데는 종교 건축이 압도적으로 많다.

 
우선 선교사의 전교 없이 자생적인 신앙으로 태동한 한국 천주교를 보자. 거듭되는 박해로 1만명의 순교자를 내어 ‘박해의 종교’로 통하며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수많은 선교사와 신자들이 무자비한 칼에 목숨을 잃었다. 명동성당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 들어서기 시작한 성당에는 이처럼 처절한 희생의 역사가 숨겨져 있다. 신자들의 처형 장소에 세워진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 전주 전동성당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개신교 역시 선교사와 신자들이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숱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명동성당을 필두로 우후죽순 격으로 전국에 들어선 성당들과 감리교 최초의 정동제일교회 벧엘예배당 이후 곳곳에 세워진 교회·예배당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대부분 뾰족한 첨탑의 고딕 양식이 주조를 이룬다. 이는 바로 역경을 딛고 신앙의 승리를 애써 강조한 기독교 특유의 앙천(仰天)의 상징인 셈이다. 물론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교회 건축 양식을 택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땅에서 험난했던 초기 기독교 박해의 역사를 은연중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충북 옥천 삼양리 옥천 천주교회, 충북 진천 대한성공회 진천성당, 경북 봉화 척곡교회, 강원도 홍천 홍천성당, 전남 함평 천주교회 등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종교 건축물들 하나하나에는 이런 역사가 숨어 있다.
그런가 하면 외래 종교가 토착화하면서 한국의 문화를 품어 안으려 노력한 흔적도 보인다. 전통적인 성당 내부 양식을 택했으면서도 한옥의 외양을 한 성공회 강화읍성당, 한옥 형태인 일자형을 띤 김제 ㄱ자 교회가 그런 것들이다.

한국의 종교는 세계 어느 곳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양상을 띤다. 외래 종교와 민족 종교 등 다양한 종교가 각각 활발하게 움직이면서도 종교 간 갈등이나 마찰 없이 평온하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은 그 이유로 한국인이 지니고 있는 포용과 융화의 미덕을 가장 먼저 꼽는다. 여기에 한국의 문화에 어울리며 토착화해온 종교 특유의 분위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전국 곳곳에 퍼져 있는 종교 건축을 통해 한국 종교를 들여다보는 것도 큰 의미를 지닐 것이다.문화재는 원 상태로 보존 유지될 수 있을 때 더 큰 가치를 지닌다고 한다. 종교계에서도 건물의 대형화 추세에 앞서 문화재의 가치를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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