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 넘어 평화의 상징으로 부활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6.10.27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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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 노동당사·승일교, 노근리 쌍굴다리 등 ‘전쟁 유적지’로 각광
 
한국전쟁은 근대에 우리가 겪은 광기였다. 동족 간 학살은 서로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깊이 남겼다. 그러나 남북한 교류가 날로 늘어가고 평화·화해의 기운이 생동하면서 한국전쟁 유적지는 새로운 화합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등록문화재 가운데는 한국전쟁과 관련 있는 문화유산들이 있다.

‘갈라진 땅의 친구들을 언제쯤 볼 수 있을까···. 한민족 형제인 우리가 서로를 겨누고 있고, 우리가 만든 큰 욕심에 내가 먼저 죽는 걸 진정 너는 알고는 있나. 전인류가 살고 죽고, 처절한 그날을 잊었던 건 아니었겠지.’

가수 서태지 3집 <발해를 꿈꾸며> 가사 중 일부다. 서씨는 이 앨범 뮤직비디오를 강원도 철원 노동당사를 배경으로 찍었다. 그의 노래가 널리 알려지면서 동시에 철원 노동당사도 젊은이들 사이에 명소가 되었다. KBS도 이곳에서 <열린음악회>를 여는 등 철원 노동당사는 분단과 화해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이 건물은 1946년 북한 정권이 지역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하고 돈을 끌어모아 만든 3층 건물이다. 당시 1개 리마다 쌀 2백 가마에 해당하는 자금과 인력·장비를 공출했다고 한다. 북한 정권에서 중부 지역의 주요 업무를 담당했던 특수성이 있었기 때문에 건물을 지을 때 열성 당원 외에 일반인들은 출입을 막았다고 한다. 한국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노동당 철원군 당사로 썼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계열의 건축적 특징과 시대상을 잘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건축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건물이다.

철원 노동당사는 요즘 대표적인 안보 관광지가 되어 수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있다. 지난 2002년 등록문화재 제22호로 등록되었다.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아온 철원군은 내년 3월부터 군비 3억원을 들여 보강·균열 보수 공사를 실시할 예정이다. 노동당사 내부 시설 배치도도 새로 만들고, 2층 관람도 가능하도록 관람로 또한 설치할 계획이다.

‘장단역 증기기관차 화통’도 전쟁의 상흔 고스란히 간직

등록문화재 제26호 철원 승일교는 남북이 합작으로 만든 다리라는 기묘한 사연을 지니고 있다. 북한 정권 때인 1948년 8월부터 철원 및 김화 지역 주민들이 ‘노력공작대’라는 명목 아래 동원되어 다리의 북쪽 부분을 시공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1958년 우리 정부가 나머지를 완성했다. 이 때문에 다리 중간을 기준으로 했을 때 아치의 크기 등이 겉으로 봐도 금방 구별될 정도로 남북이 각각 다르게 만들어져 있다.

 
‘승일교’라는 이름과 관련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와 있다. ‘김일성 시절에 시작해서 이승만 시절에 완성되었다는 데서 유래했다’ ‘김일성을 이기자는 의미에서 승일교라고 이름 붙였다’라는 말들이 있으나, 사실은 이 다리 공사를 맡았던 공병대장의 이름을 따서 승일교라고 했다는 것이다. 무언가 의미 있는 유래를 생각했던 사람들 처지에서는 시시한 결말이다. 문화재청의 설명 자료에는 원래 한탄교라는 이름으로 공사가 시작되었다고 나와 있다.

근대 토목유산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다리는 남북 분단과 전쟁이라는 독특한 상황으로 인해 만들어졌다는 역사적 사실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형태를 갖춘 조형미가 돋보인다. 당시 철원 농업전문학교 토목과 과장이던 김명여씨가 설계했는데, 그녀는 진남포제련소 굴뚝을 설계하기도 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31일 공습을 받고 멈춰 선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 화통’(등록문화재 제78호)은 분단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연합군 군수 물자를 실어 나르기 위해 개성역에서 한포역까지 올라간 열차는 중공군에 밀려 후진으로 장단역까지 내려왔다. 후퇴하던 연합군은 북한군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열차를 폭파해 지금도 철로를 이탈한 채 분단의 아픔을 하소연하고 있다.

특히 경의선 개통과 관련해 평양까지 기차로 오가는 문제가 거론되면서 집중적으로 조명되었다. 최근 한국전쟁 당시 이 열차를 몰았던 한준기씨가 언론에 “경의선이 개통되면 첫 열차를 몰아보고 싶다”라고 소망을 피력해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열차가 탈선해 있는 곳에서 남쪽으로 조금 걷다 보면 등록문화재 제79호 죽음의 다리가 있다. 한국전쟁 때 이곳에서 미군들이 많이 희생되었다고 해서 ‘죽음의 다리’라는 이름이 붙었다. 최근 이 다리 이름을 남북 화해로 가는 ‘희망의 다리’로 고쳐 부르자는 말이 나오고 있다.

1950년 7월27일부터 29일까지 사흘 동안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일어난 양민학살사건 현장인 노근리 쌍굴다리는 이 사건을 보도한 AP 통신에 의해 전세계적으로 알려진 역사의 현장이다. 당시 미군은 마을 주민 5백여 명을 피난시켜주겠다고 철길에 모아놓고, 공군기를 띄워 포탄과 기관포를 퍼부어 살상했다. 심지어 쏟아지는 포탄을 피해 다리 밑으로 달아나던 어린이와 부녀자들을 향해 기관총으로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당시 미군은 ‘작전’에 의해 사건을 저질렀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한국전쟁 문화유산들은 이제 광기를 넘어 평화의 상징으로 거듭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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