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빛깔을 잃고 있다
  • 신기주 (프리미어 코리아 기자) (cha@sisapress.com)
  • 승인 2006.11.03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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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자본이 관객·감독·배우·스태프 ‘독식’…오색 창연한 다양성 사라져

 
그해 겨울들은 늘 따뜻했다. <투캅스>부터였다. 1993년 12월28일 개봉한 <투캅스>는 설날까지 연승 가도를 이어가며 전국에서 관객 90만명을 모았다. 그 후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시네마서비스에 겨울은 언제나 흥행의 계절이었다. 2002년 1월25일에서 <공공의 적>이 전국에서 4백만명 가까운 관객을 모았다. 2003년 12월24일 개봉한 <실미도>는 대한민국 영화 역사상 처음으로 1천만명을 돌파한 영화였다. 2005년 12월29일 개봉한 <왕의 남자>는 영화 역사를 고쳐 쓰며 1천2백만명이 넘는 관객을 모았다. 그러나 시네마서비스에 올해 겨울은 춥다. 이거다 싶은 영화 개봉작이 없다.

올해 한국 영화계는 유난히 체력 소모가 많았다. 올해 이미 만들어졌거나 만들어질 한국영화는 줄잡아 100편이 넘는다. 통계만 봐도 알 수 있다. 2006년 1월~9월 개봉한 한국 영화는 82편이다. 2005년 같은 기간에는 61편이 개봉했다. 개봉 편수만 17편이 늘어났다. 평균 제작비를 40억원이라고 쳐도 8백40억원이 더 쓰였다는 얘기다.

그러나 한국 영화의 전체 수익은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2005년 같은 기간에 비해 고작 1.7%가 늘어났을 뿐이다. 돈 버는 구조가 아니라는 뜻이다.
사실 이런 통계 놀음은 영화 현장에서 느껴지는 절박함의 절반도 설명해주지 못한다. 영화 <타짜>에서 평경장은 수제자 고니에게 ‘기술은 타짜가 부리지만 기술을 부릴 판을 만드는 설계자인 바지가 하는 일이 더 어렵다. 그래서 수익은 바지가 타짜보다 더 많이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영화판 상황도 이와 비슷하다. 영화판의 설계자는 투자 배급사들이다. 그들은 감독과 배우, 스태프라는 영화 ‘타짜’들을 모아다가 판을 설계한다. 그런데 알 만한 투자 배급사들 가운데 안정적인 수익률을 유지하고 있는 회사는 쇼박스 정도이다. 나머지 설계자들한테는 경고등이 켜져 있다. 2000년 무렵에만 해도 CJ엔터테인먼트, 시네마서비스와 함께 3강 투자사로 점쳐졌던 튜브엔터테인먼트나 <친구>를 만들었던 코리아픽쳐스나 <올드보이>를 만들었던 쇼이스트나 <형사>를 만들었던 코어스튜디오 같은 중견 설계자들의 사정은 그리 좋지 않다. 어떤 설계자는 1백억원 가까운 부채를 안고 있다. 어떤 설계자는 믿었던 작품이 무너지면서 설계자로서의 기능이 거의 정지된 상태이다. 감독·배우·스태프, 극장에 지급할 개런티가 밀려서 매일 돈을 구하러 다니는 설계자들도 있다.

<올드보이>를 만들었던 투자배급사 쇼이스트의 이정석 팀장은 “한국 영화 제작 편수가 100편이 넘는다는 건 사실상 미친 짓이다. 한국 영화 시장은 그 정도 물량을 감당할 여력이 없다”라고 말한다. 영화는 관객을 사이좋게 나눠 갖는 사업이 아니다. 분명 누군가가 관객을 독식하게 되어 있다. 그런 영화 산업의 속성까지도 감당할 만큼 시장이 안정되지 않는 한 계속해서 사상자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정석 팀장은 설계자들의 체력을 지적한다. 그런 내상을 감당할 만큼 체력이 되느냐 아니냐가 승패를 좌우한다. 그것은 영화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돈으로 영화판에서 버티는 개념이다. 그래서 지금 한국 영화계는 대기업 자본을 기반으로 한 몇 개의 메이저가 시장을 양분하거나 삼분하는 체제로 굳어져가고 있다. 이들은 총알(자본력)이 많기 때문에 웬만한 손실에도 끄덕없다.

‘절대 권력 등장=영화 전체 부실’ 가능성

문제는 이들이 주도권을 장악하는 방식이 시장을 왜곡시킨다는 데 있다. 얼마 전 국회 문화관광위 국정감사에서 열린우리당 이광철 의원이 “배급사와 극장이 계열화된 상태로 불공정 거래 행위가 이루어진다”라며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를 요구했다. 영화계에도 이런 문제의식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다.

 
익명을 요구한 중견 투자 배급사 관계자는 말한다. “악순환이 계속된다. 멀티플렉스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100만명 들 영화에 80만명 정도밖에 안 든다는 것은 이제 충무로의 정설이다. 멀티플렉스 상영관들은 모두 같은 수의 좌석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다. 작은 관이 있고 큰 관이 있다. 같은 회사 배급사 영화를 큰 관에 걸고, 경쟁 영화를 작은 관에 거는 것은 그들의 권한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관객이 줄어드는 게 사실이다.” 자기네 영화는 10분 정도만 기다리면 바로 볼 수 있도록 시간표를 짜주지만, 경쟁 영화는 1시간30분이 넘게 기다리도록 만들기도 한다. 예고편은 당연히 같은 회사 영화들로 도배된다. 당연히 관객들은 영화 정보를 편식하게 된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관객 독식은 결국 영화 인력과 자본의 독식으로 이어진다. 요즘은 일선 스태프조차 계약을 맺기 전에 영화의 투자 배급사를 먼저 확인한다. 애써 만든 영화가 시장에서 파묻힐 수도 있다는 것을 직접 체험한 탓이다. 감독들은 말할 것도 없다. 메이저 영화사들은 개런티도 듬뿍 준다. 시나리오들은 먼저 메이저에 들어갔다가, 거절당하면 차선으로 다른 설계자들에게 흘러간다. 돈을 가진 투자자들도 점점 더 메이저 영화사들의 영화들로 몰린다. 결국에는 특정 설계자들이 무소불위의 독점적인 지위를 누리게 된다.

절대 권력의 등장은 한국 영화 전체의 부실로 이어질 수 있다. 2006년 9월까지 개봉한 한국 영화 80여 편 가운데 30편 가까이가 메이저 영화사가 아닌 투자사들이 설계한 영화들이다. 그러나 이들 영화가 차지한 관객은 전체 한국 영화 관객의 7%뿐이다. 전체 영화 편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지만 돈 번 사람이 드물다. 이렇게 망가진 영화들이 늘어나게 되면 영화 시장은 악순환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투자자들이 떠나거나 소수 메이저들로만 몰리게 된다. 2007년 영화 시장에 대한 염려가 높은 것은 그래서다.

2006년에 영화 편수가 크게 늘어난 것은 메이저끼리의 순위 경쟁 탓도 크다. CJ엔터테인먼트가 1등을 유지하기 위해 공격 경영에 나서면서 물량을 크게 늘려 잡았기 때문이다. 2005년 9월까지 15편만을 설계했던 CJ엔터테인먼트는 올해는 25편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렇다 할 흥행작이 없다. 영화계가 모두 CJ엔터테인먼트의 내년 행보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이다. CJ엔터테인먼트가 물량을 줄이면 2007년 제작 편수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한 회사의 선택이 영화계 전체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상황이 현실이라는 뜻이다.

시네마서비스는 불과 4년 전까지만 해도 업계 1위를 놓고 자웅을 겨루던 설계자였다. 하지만 시네마서비스의 지분 절반은 CJ엔터테인먼트가 갖고 있다. 멀티플렉스의 핵우산 안에 들어가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좋을 수도 있다. 적어도 시네마서비스는 배급 시장에서 불이익을 당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래서 영화계는 점점 더 재미가 없어지고 있다. 시네마서비스라는 빛깔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빛깔이 덧붙여질수록 한국 영화계는 오색 창연해진다. 적어도 올 겨울에는 그 색깔들을 볼 수 없다. 그리고 문제는 2007년엔 더 많은 빛들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데 있다. 한국 영화 100편 제작 시대의 이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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