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자 회담 복귀 ‘사실과 진실’
  • 이창주(러시아 외교아카데미 석좌교수) (sisa@sisapress.com)
  • 승인 2006.11.06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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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핵실험 이후 벌어진 미·중·러·북의 ‘특사 외교·파워 게임’ 내막

 
2006년 10월 한반도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긴장 지대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른바 미국·중국·러시아 등 국제정치 빅 3 세력 간의 평양·서울·베이징·모스크바·워싱턴을 잇는 특사 외교가 바쁘게 진행되었다.

10월9일 북한의 핵실험이 강행된 직후 탕자쉬안(唐家璇) 중국 국무위원(외교 담당)이 10월13일 워싱턴으로 특사 외교를 펼친 것을 시작으로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의 모스크바 방문 일정이 끝난 10월21일까지 10일 동안 한반도는 국제적인 대진동의 중심이었다. 탕자쉬안 국무위원은 10월13일 워싱턴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과 외교 안보팀을 만난 데 이어, 14일 모스크바에서 블라드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외교·국방 장관, 그리고 19일에는 평양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 및 북한의 대미 외교팀과 회동했다.

러시아 특사 알렉산드르 알렉세예프(Alexander Alexeyev) 외무차관은 13일 평양에서 김계관 외무부상, 그리고 14일 베이징에서 우다웨이(武大偉) 외교부 부부장, 15일 서울에서 천영우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등 6자 회담 수석대표 라인과접촉했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은 17일부터 21일까지 일본을 시작으로 한국·중국·러시아에서 각국 정상들과 외교 안보팀을 상대로 한 전방위 한반도 외교를 펼쳤다. 10월15일부터는 러시아·일본·미국 외교 수장들의 잇따른 서울 방문과 연쇄 회동이 이루어졌고, 라이스 장관 방한을 계기로 한·미·일 3국 외교 장관 회담이 서울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조지 부시-후진타오(胡錦濤)-블라디미르 푸틴-김정일-노무현으로 이어지는 미·중·러·북한·남한 ‘특사 서미트’(수뇌부 회담) 방식으로, 동북아 외교안보 라인의 풀 가동 시스템이 한반도 무대에 집중된 것이다. 이 글은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었던 격랑의 10월 중순, 열흘 동안 한반도를 배경으로 펼쳐진 특사 외교에서 무엇이 어떻게 논의되었는지, 그  목표와 행동 그리고 진실이 무엇이며 향후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각 주체들 간의 외교 접촉 내막을 통해 밝혀보고자 하는 것이다.   

미국은 중국을 자기 편으로 포섭했다?

북한의 핵실험으로 가장 열을 받고 충격적 반응을 보인 것은 미국이 아닌 중국이었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10월8일 베이징 정상회담에서 북한 핵실험 반대와 한반도의 비핵화 및 동북아 평화 유지를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합의한 다음날인 9일 북한이 핵실험 사실을 발표하자 중국 정부는 두 시간여 만에 외교부 성명을 내 분노와 항의, 반대의 뜻을 표명했다. 그리고 한반도 비핵화를 약속하고, 정세를 악화시키는 일체의 행동을 중지할 것, 6자 회담에 조속히 복귀할 것 등의 세 가지 사항을 실행하라고 요구했다. 중국 지도부가 격분해 있던 9일 오후 리자오싱(李肇星) 외교부장과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 그리고 후진타오 주석과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간에 전화통화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10월10일 베이징의 쌍십절은 57년을 이어온 북·중 관계가 심각한 상황에 처하게 된 날로 기록되었다. 미국측에서 보자면 이날은 중국을 미국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날로 평가된다.

탕자쉬안 특사의 워싱턴 급파에 따른 의문이 여기서 풀린다. 북한의 일방적인 행동으로 실추된 위상을 회복하고 대북 응징을 위해 강력한 영향력 행사를 검토하던 중국은 직접 방식보다는 미국 주도의 유엔 대북 제재를 활용하는 방안을 결정한다. 따라서 미국과 일정한 수준의 제재 공조가 필요하게 되었다. 덧붙여 중국 외교에서 소중한 대북 외교 자산의 상실을 막기 위해서라도, 북한이 두려워하는 중국의 압력 수단을 행사할 시점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핵실험으로 촉발된 중국의 이같은 변화된 자세와, 중국을 국제 제재에 동참시키고자 해왔던 미국의 이해 관계가 결합하게 된 것이다. 중국은 미국과 외교장관 및 정상 간 전화 회담에서 미국이 제의한 양국 간 협력을 논의하기 위한 특사 파견을 긴급히 결정했다. 이러한 사실은 11일 밤늦게 중국 외교부 웹 사이트를 통해 발표되었다.

 
여기서 두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하나는 대북 제재를 위해 그전처럼 미국이 베이징으로 가지 않고 중국을 워싱턴으로 오게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더해 러시아에 대한 요리까지 중국에 떠맡겼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부시 행정부의 외교 안보 라인으로서는 예상치 못한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은 이를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의 대전진으로 평가하고 그 결과가 북·중 간의 틈새 확대 및 국제 사회의 대북 제재 동참, 한국의 대북 정책 전환이라는 3대 핵심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주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라고 기대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이 북한의 핵실험에 예상 밖으로 법석을 떨지 않고 차분히 대응하고, 네오콘이 오히려 이를 반색한 까닭 역시 이와 관련된 것이었다. 중국의 협력으로 자신들이 생각하는 최상의 시나리오인 ‘북한 체제 붕괴’ 유도가 가능해질 수도 있다는 환상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대는 부시 미국 대통령과 탕자쉬안 국무위원이 10월13일 백악관 회동에서 북한 핵실험에 대해 양국이 강력한 조처를 취할 필요가 있다는 데 동의했고, 탕자쉬안 위원이 “이 자리에서 중국은 북한의 핵실험에 대해 유엔의 강력한 조처를 원하고 있다는 뜻을 밝혔다”라는 프레드릭 존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대변인의 발표로 절정을 이루었다. 그래서 워싱턴은 이 상황을 미국이 의도대로 몰고 간 그린 라운드(Green Round)라고 평가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중국의 진심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미국과의 대북 공조 협력으로 북한 문제를 국제 사회에 상장하고 미국과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선택하는 쪽으로 중국이 변했다는 견해이다. 여기에 대한 베이징의 대답은 ‘아니다’이다. 미국의 대북 제재 정책에 대한 합류가 아니라 중국이 대북 관계에서 위상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전술적 차원에서 동참한 것이며, 그를 위해 미국 편에 서는 듯한 제스처를 취해 자극과 응징이라는 방편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중국 내부의 최종 검토 과정에서 이러한 대북 제재 동참 방식에 논란이 있었으나 국제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해 이 방향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미국은 곧바로 10월3일 북한이 핵실험 계획을 발표하자 대북 제재의 국제적 명분과 연대 수단을 확보하는 전략을 수립했다. 그 전략의 중심은 중국과의 관계였다. 그런데 중국으로부터 1차 청신호가 켜졌다. 왕광야(王光亞) 유엔 주재 중국대사가 ‘북한이 핵실험과 같은 나쁜 행동을 할 경우 어느 나라도 북한을 보호해줄 수 없을 것’이라며 북한에 대해 전례가 없을 정도로 강경한 자세를 취한 것이다. 북·중 관계는 이 부분에서 심하게 꼬이게 된다. 북한이 전통적인 동맹 간의 외교적 협의나 통보를 무시하고 중국에는 핵실험을 하기 불과 20분 전에, 러시아에는 2시간 전에 통보하는 차별 대우를 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북한이 중국의 체면에 먹칠을 한 결과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중국 지도부가 분노하면서 양자 관계는 더욱 틀어졌다. 중국 지도부 내에서도 초기 대응 과정에서 유엔 무대를 활용한 것은 잘못이었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이에 비해 미국은 단계적 추진 전략(Drive Step Development)으로 밀고 나갔다. 제1 단계 유엔 주재 중국대사의 대북 경고, 제2 단계 중국 특사의 워싱턴 방문 및 미국과 대북 제재 합의, 제3 단계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안에 중국의 동참 유도, 제4 단계 중국 특사의 평양 방문 및 외교적 노력 연출, 제5 단계 국제적 대북 제재 실행에 동참유도 등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실현 가능성 없는 것은 양보하고 현실성 있는 것은 챙기는 실사구시적 접근 전략으로 중국을 구속할 수 있는 여건과 기반을 구축했다고 믿고 있다. 즉 미국이 군사 행동을 양보하는 대신 중국과 러시아가 대북 제재에 동참토록 함으로써, 국제적 명분과 유엔 차원의 법적 뒷받침을 확보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부시 행정부는 북·미 관계의 변화 없이 중국이 단독으로 북한 핵무기를 포기시킬 만큼의 영향력은 없기 때문에 앞으로 북·중 관계가 악화되면 중국은 자연히 미국과의 협력을 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중국의 독점적 지위 무너지고 러시아 떠올라

워싱턴에서 모스크바로 간 탕자쉬안 국무위원은 10월14일 푸틴 대통령을 만나 후진타오 주석의 구두 메시지를 전달하고 북핵 사태를 의논했다. 논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워싱턴에서 있었던 미국과의 협의 내용이며, 다른 하나는 북한 핵실험 이후 중·.러 간의 대북 공조 방향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중국과 러시아 간에 외교적 접근 방향이 전혀 상반되어왔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탕자쉬안 중국 특사가 백악관에서 부시 대통령과 만난 날인 10월12일 일렉산드르 알렉세예프 외무차관을 평양에 특사로 파견했다. 중국이 13일 워싱턴에 특사를 긴급히 보내자 러시아도 같은 날 평양으로 특사를 급파한 것이다. 러시아는 북한 핵실험 이후 중국·한국을 포함해 모든 국제 사회가 북한을 규탄하고 지원 중단 결정을 쏟아내던 와중에, 그뿐만 아니라 중국 특사가 대북 제재를 협의하러 워싱턴으로 날아간 바로 그날, 북한에 인도적 지원 명목으로 1만2천8백t에 달하는 곡물을 보냈다고 밝혔다.

그리고 13일 평양에서 알렉세예프 특사가 김계관 부상을 만난 후 이타르타스 통신을 통해 북한이 6자 회담 복귀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메시지를 국제 사회에 전하면서 사태의 평화적 해결이 러시아의 견해임을 공표했다. 동시에 같은 날 러시아는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안 초안을 문제 삼았다. 포위망에 갇힌 북한에 유일한 동맹자 역할을 한 것이다. 또한 세르게이 이바노프(Sergey Ivanov) 러시아 국방장관은 10월10일 모스크바에서 기자 회견을 통해 북한의 핵실험이 성공리에 이루어져 북한이 핵 보유국이 되었다고 제일 먼저 인정했다.

현재 북한 지도부는 중국에 대해서는 불신하고 러시아에 대해서는 신뢰하는 분위기로 흐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필자가 접촉한 북한 고위 외교관은 “공화국과 러시아는 긴밀한 관계다”라며 중국의 행보에 불만을 드러냈다. 러시아의 이러한 움직임으로 인해 그동안 북한 문제에서 중국이 국제 사회에서 누렸던 독점적 지위가 무너지고 러시아와 공존하게 되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 러시아는 북한과의 관계에서 전례가 없는 국가적 차원의 관심을 보여주었다.

 
푸틴 대통령에서부터 러시아의 대외 정책을 주도하고 있는 실세인 세르게이 이바노프 부총리 겸 국방장관, 이고르 이바노프 국가안보회의 서기,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 등 러시아 정부 고위 당국자들이 한목소리로 모두 나섰다. 탕자쉬안 중국 특사가 모스크바에서 푸틴 대통령을 예방하기 전에 이들이 그를 미리 만나 논의하는 절차를 가진 것도 러시아가 이 국면에서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가 뚜렷했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탕자쉬안 특사의 모스크바 방문에서 중·러 양국은 한반도 정세의 동향이 동북아 평화와 안정에 중요한 요인이자 양국 이익과 관련이 있음을 평가하고, 전략적 협력을 강화해 긴장 완화를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핵확산 방지와 한반도 비핵화, 외교적 노력 회복을 위한 유엔 안보리의 적절한 대응, 대화와 협상에 의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6자 회담 재개 등 4개 항의 합의 사항을 발표했다.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중·러 간의 합의 사항 발표는 워싱턴에서 있었던 미국과의 약속 및 중국의 구상에 차질을 빚은 결과가 되었다. 1단계 대미 협력 및 대북 응징, 2단계 중·러 공조를 통한 북한 관리, 3단계 중국의 위상 회복과 동북아 평화 중심 세력으로의 이미지 구축 등 북핵 사태 이후 중국이 그려온 특사 외교 구상이 러시아의 기선 제압에 의해 흐려지게 된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모스크바 회담을 바라본 워싱턴에서는 대북 제재 동참을 약속했던 중국의 변신에 대해 불만이 터져나왔다. 중국이 까딱 잘못하다가는 북한과 미국 양자로부터 동시에 공격을 당할 처지가 된 것이다. 탕자쉬안 국무위원이 베이징으로 돌아온 이후부터 10월18일 다시 중국 특사의 평양 방문이 이루어지기까지, 베이징 지도부는 한편으로 평양을 설득하는 데 주력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의 방중을 맞아 외교적 성과를 거두기 위해 부산하게 움직였다. 이와 같은 정황은 여러 곳에서 감지되었다. 평양에 보낼  특사로 리자오싱 외교부장을 파견하려던 계획을 수정해, 탕자쉬안 국무위원으로 격을 높이고, 형태도 다이빙궈 외교부 상무부부장 겸 공산당 중앙외사판공실 주임, 우다웨이 외교부 부부장 겸 6자 회담 수석대표가 동행하는 특사단을 구성하는 모양새를 취함으로써, 북한의 외교적 비중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중국이 평양 특사단 구성과 파견에서 가장 고민한 점은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어디까지 북한을 설득해 긴장 국면을 푸는 데 전환적 역할을 할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10월19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만남은 비중 있는 특사단에 대한 북한측의 답례적 배려로 강석주 외교부 제1부상, 김계관 부상을 배석시켜 모양새 있는 협의 테이블을 만들었다. 그러나 국제 사회에 자신 있게 제시할 만한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중국의 대북 관계 악화를 염두에 둔 북한과, 북한을 포기할 수 없는 중국의 처지 때문에 서로 최소한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가진 회동이었을 뿐이다. 중국이 성과라고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은, 북한이 6자 회담 복귀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 추가 핵실험 중단을 약속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발표에 미국은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고 북한은 미국의 태도 변화를 전제로 한 것임을 분명히 했다.

중국은 북한으로부터는 미국을 설득하는 것과 경협에 대한 압력, 미국으로부터는 북한을 설득하거나 아니면 대북 경협을 중단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 이를 상대하는 중국 지도부는 전술적 혼란으로 내부적 논란은 있었지만 북한과의 우방 관계 유지, 대북 경협 및 지원 지속.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원칙을 분명히 했다. 워싱턴·모스크바에 이어 중국 외교의 세 번째 변화였다. 이 변화는 평양을 다녀온 후 베이징에서 정리된 최종 결론(Final Conclusion)이다. 이렇게 볼 때 확실한 소득이 없었던 것으로 평가되었던 평양 특사 회담에서 무엇인가 알맹이가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분석과 관측이 미국 정보기관의 베이징 팀에서 흘러나왔다.

탕자쉬안과 김정일, 무엇을 약속했나

그 실마리를 풀 중대한 내막이 포착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탕자쉬안 특사 간에 모종의 약속이 있었다는 것이다. 약속의 내용은 이렇다. ‘무조건 6자 회담 복귀 대 조건 이행’ 원칙에 미국이 동의하도록 중국이 책임 있는 역할을 하고, 이러한 중국의 노력이 진행되는 동안 북한은 추가 핵실험을 유보하고 강경 대응을 자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플러스 알파로, 중국의 대북 지원 확대,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 효력 정지, 그리고 앞으로 북한은 중국과 긴밀한 협의를 약속하는 거래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중국 특사가 대외비로 했던 보따리의 내용물이다. 미국의 주장과 북한의 요구를 동시에 수용하는 해법이다. 이러한 내막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리자오싱 중국 외교부장은 북한과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는 방북 성과가 있었다고 발표했다. 라이스가 기다리는 베이징으로 돌아온 탕자쉬안은 북한과 합의한 사항을 손에 쥐고 미국과의 거래를 시작했다. 거래 품목은 ‘북·미 양자 회담을 통해 금융문제 처리’ ‘국제 사회의 대북 제재 완화’ ‘6자 회담을 통한 북핵 문제 해결’이었다. 이 거래가 성사되지 못할 경우 중국은 6자 회담 의장국 사퇴, 북한의 추가 핵실험 방지 노력 포기, 유엔의 대북 제재 동참 결정에 대한 재조정이 불가피함을 부연했다.

 
그러나 라이스의 반응은 싸늘했다. 조건 없는 6자 회담 복귀, 북·미 양자 회담 불가, 금융 제재는 6자 회담과 별개로 계속 지속할 방침이라는 등의 고압적 자세를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미·중의 베이징 회동은 서로에 대한 설득의 실패와 요구의 거부로 요약될 수 있다. 중국의 3대 요청 사항 즉 대북 강경 정책 완화, 감정적 대응과 극단적 제재 자제, 유연한 태도에 대해 미국은 ‘3불 3이행 대북 원칙’으로 맞섰다. 즉 핵 보유 불인정, 불보상, 불협상과 6자 회담 이행, 안보리 결의안 이행, 금융 제재 이행 등의 내용이다. 미국이 제시한 일본·타이완 핵개발 시도 방지, 올림픽을 앞둔 중국의 안정, 중국의 동아시아 지도국 인정 등 3대 압박 카드는 평양 방문 후 마음이 변한 중국에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의 4박5일간 일본·한국·중국·러시아 4개국 순방 외교는 유엔 안보리 결의를 이행하기 위한 공동 보조를 도출하는 데는 실패하고 국제 사회의 연대를 과시하는 선에서 끝나버렸다. 한편이 되어 있는 일본을 제외하고 나면 그나마 한국만이 어느 정도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는 불충분한 성과였다는 평가이다. 10월25일 라이스 국무장관은 헤리티지 재단 초청 강연에서 동북아 4개국 순방 결과를 설명하면서 북한 핵무장 해제를 위해 미국·일본·한국·중국·러시아 5개국이 유엔 제재 이행을 합의했다면서 미·일·한 안보동맹 강화, 안보리 제재 결의 국제적 이행, 대량살상무기확산방지구상(PSI) 확대, 미사일방어망 구축, 금융 제재, 핵확산금지조약(NPT) 강화의 동북아 대북 관련 정책을 밝혔다.    

그러나 같은 날인 10월25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텔레비전 방송의 ‘국민과의 대화’를 통해 북한 핵실험을 둘러싼 위기를 해결할 수 있도록 국제 사회가 북한을 궁지로 몰아서는 안 되며 북한이 6자 회담 협상 테이블에 복귀할 의지가 있기 때문에 참가국들의 외교적 협상으로 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한 6자 회담의 일부 참여국이 북핵 문제가 막다른 길로 치닫지 않도록 하는 데 최선을 다하지 못했다는 지적으로 사실상 미국의 대북 정책을 비난했다.

중국이 유엔 결의 세부 이행 계획 표명은 고사하고 최후 통첩식으로 미국의 태도 변화를 요구하는 시점에 러시아까지 경쟁적으로 가세하는 상황에서 국내적으로 1주일 앞으로 다가온 미국의 중간선거에서 대북 정책이 이슈화되자 부시 행정부는 실효성 없이 한반도 위기지수를 높여나가는 것은 동북아 긴장 완화 실패의 책임을 안게 될 것이라는 걱정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중국이 미국에 명분을 주면서 피할 수 없도록 하는 ‘무조건 6자 회담 복귀 대 조건 이행’ 중재를 만들어내었다. 라이스 미국 국무장관은 베이징 방문 때 중국이 북·중·미 3자 회동 계획을 전달했지만 미국의 정책에 충족되지 않는다면서 무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10월23일에서 26일 사이에 베이징에서 평양과 워싱턴을 잇는 3각 채널이 연결되었고, 10월27일 라이스 장관의 수락으로 일정이 확정되었지만 서로의 진의를 파악하기 불확실해 비밀 회동 형식으로 진행하기로 했다고 한다. 결국 호주를 방문 중이던 크리스토퍼 힐 국무차관보가 긴급 훈령을 받고 베이징에 날아가고 김계관 북한 외교부 부상과 7시간의 협상을 거쳐 6자 회담 재개를 합의하는 대전환이 일어나게 되었다.

* (이 글의 취재를 위해 접촉한 미·중·러·북한의 한반도 전문가 및 관련 기관 핵심 인사들의 실명은 본인들의 요청과 내용의 성격상 밝히지 못했음을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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