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학 미스터리’ 누가 진실을 말하나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6.11.13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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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감장에서 제기된 영안모자 회장의 대미 정보 제공설의 진상은 무엇일까. 또 그와 미국 네오콘 실세와의 관계는?
 
‘모자왕’,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부른다. 1940년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 목릉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3학년밖에 다니지 못했지만, 모자 회사를 창업해 세계적 기업으로 일군 자수성가형 기업인이다. 언론 매체의 성공 사례 소개에도 단골로 등장한다.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 이야기다. 그는 대우버스 등을 인수한 데 이어, 지난 4월28일에는 그가 1대 주주가 되어 구성한 컨소시엄이 경인 지역 민방인 경인TV 사업자로 선정되었다.

이처럼 잘나가던 그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로 위기를 맞았다. ‘국내 정보를 미국에 넘겼다’는 의혹을 받으며 ‘애국자’와 ‘매국노’의 갈림길에 섰기 때문이다. 과연 그의 본모습은 무엇일까.

‘백성학 의혹’이 세간에 공개된 것은 지난 10월31일이다. 백회장과 함께 경인TV 대표를 맡고 있던 신현덕씨가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 “백성학 회장이 국내 여러 사람들로부터 정보와 문서를 제공받고 있으며 이것을 영문으로 번역해 미국으로 보내고 있다. 그가 미국 정부와 정보기관을 위해 일하고 있다”라고 폭로하며 관련 문건 두 개를 공개했기 때문이다.(<시사저널> 제889호 참조)

이에 대해 백회장은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고 싶어서 만든 것뿐이다. 영안모자는 브라질, 코스타리카 등에 30여 개 해외 법인을 두고 있다. 사업과 관련이 없는 문건을 해외에 보낸 적이 없다. 굉장한 누명을 쓰고 있다”라며 억울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변호사와 상의해 법적 조처를 취하겠다고 했으나, 아직 신씨를 고소하지 않고 있다.

아직 이 사건의 실체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고 있다. “나를 고소하라”라고 큰소리치는 신 전 대표도 자신의 주장 이외에 다른 것을 내놓지 않고 있다. 그는 “여러 문건과 방어할 수 있는 자료들을 갖고 있다”라고 자신하지만, 수사가 시작되면 공개하겠다며 뜸을 들이고 있다. 백회장측도 가시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 하지만 백회장을 대변하는 경인TV 김종오 부회장은 “내부적으로 백회장이 나서지 않고 실무자들이 대응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증거를 취합하는 작업이 끝나면 반드시 소송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신 전 대표의 주장은 음해다”라고 주장하는 백회장이 국정감사장에서 증언한 내용을 꼼꼼히 뜯어보면 의문이 있다. 이 때문에 전체적인 그의 주장 또한 과연 진실일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백회장은 “여야 의원들, 잘 아시죠”라는 한나라당 박형준 의원의 질의에 대해 “전혀 아니다. 국회의원 가운데 아는 사람은 민주당 김종인 의원뿐이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백회장의 말은 사실과 다르다. 그는 열린우리당 임시 당의장을 지낸 유재건 의원과 40년 전부터 알고 지내는 등 정·관계 인사들을 다수 알고 있다.
유의원은 “1965년부터 백회장과 알고 지냈다. 한마디로 그는 의리의 사나이다. 내게는 부탁 한번 한 적 없다. 그가 국내 정보를 미국에 전달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유의원은 “백회장은 정·관계 인사들을 많이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성북동에 있는 교회에 같이 다닌다.

이부영 전 의원도 백회장을 안다. 미국에 있는 영안모자 해외 법인의 회계 업무를 담당하는 선배가 백회장과 이 전 의원을 인사시켰다. 이 전 의원은 “백회장을 알게 된 지 몇 년 되었다. 자주 만나는 편은 아니다. 처음 만났을 때 그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보도된 자기와 관련한 기사를 줬던 기억이 있다”라고 말했다.

 
민주당의 한 핵심 인사는 “백회장이 1998년 서울 영등포에 있던 사무실을 연청에 2년쯤 공짜로 쓰도록 내주었다”라고 증언했다. 5층 건물에서 80여 평 규모 2층을 연청(민주연합청년동지회, 김홍일 전 의원이 이끌던 청년 조직)이 무료로 쓰도록 배려해주었다는 것이다. 1998년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은 해이다. 이 인사는 “백회장은 당시 여권 실세와도 자주 만난 것으로 안다. 대권을 잡으려면 백회장을 만나야 한다는 말이 정가에 나돌기도 했다. 그가 미국 공화당 쪽 인맥이 막강하다고 소문났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경인TV 전 관계자는 “백회장은 누구누구를 키웠다는 말을 가끔 했다. 그가 거론한 사람 중에 정치인들도 몇 명 있었다”라고 말했다.

백회장이 국감에서 “나는 영어도 잘 못한다” “(코드명 D라는 사람이 47번째로 작성한 문건에 대해) D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다. 46번째까지는 전혀 보지 못했다”라고 말한 것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이부영 전 의원은 “백회장은 영어를 잘한다”라고 말했다. 우상호 의원은 “47번이나 문건을 보내온 D라는 인물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46번째까지는 보지도 않았다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백회장을 힐난했다.

삼구빌딩 1501호 사무실의 정체

백회장의 인맥·활동과 관련해 주목되는 인물은 국가정보원에서 국내 정보를 총괄하는 중책을 맡고 있는 이상업 2차장이다. 국감장에서 백회장은 “경기경찰청장을 할 때부터 이상업씨를 알고 지냈다”라고 증언했다. 열린우리당 문희상 의원의 인척인 이씨는 2001년부터 2002년까지 경기경찰청장을 지냈다. 신현덕 경인TV 전 대표도 “백회장은 국정원과 경찰 고위직에 상당한 인맥을 구축해놓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로부터 수시로 정보 보고를 받고 있다고 여러 장소에서 공공연하게 과시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국정원 관계자는 “이차장이 백회장과 특별한 관계는 아니고 같은 교회를 다니며 알고 지낼 뿐이라고 설명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신 전 대표의 주장대로라면 국가 공무원들이 백회장에게 국가 정보를 유출했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다른 나라에 넘어가 국익에 반하는 결과를 낳는 쪽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다. 백회장은 현 정부가 들어선 뒤 김장환 목사의 소개로 차기 유엔 사무총장인 반기문 외교통상부장관도 알게 되었다.

김종오 경인TV 부회장은 “백회장이 사업을 한 지 40년이 넘는다. 그러다 보면 이런저런 사람을 알게 되는 것 아니냐. 지인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해 미국에 전달했다는 신 전 대표의 주장은 허위라고 본다”라고 말했다.

‘백성학 의혹’과 관련해 주목되는 곳은 신 전 대표가 정보원 교육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서울 중구 소공동 삼구빌딩 1501호이다. 백회장이 자신에게 15층에 가서 미국이 돌아가는 것에 대해 교육을 받으라고 해서 갔다는 것이다. 미국 정보기관 현황과 조직 체계, 한반도 주변 정세 흐름 등이 주된 교육 주제였다고 한다. 신씨는 “삼구빌딩 15층에서 영안모자 해외담당 고문으로부터 여러 차례 일대일 교육을 받았다. 이곳에서는 미국 하버드 대학 등 우수한 대학을 나온 직원들이 정보도 수집하고 종합·분석·번역하는 작업까지 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경인TV 대표에게 왜 이런 교육이 필요했고, 영안모자 회장은 왜 이곳으로 그를 보낸 것일까.

지난 11월8일 1501호를 가보니 신 전 대표가 그려준 그림과 내부 구조가 똑같았다. 30평쯤 될 것 같은 사무실 입구에 여직원이 있었고, 방 세 개에 한 명씩 근무자가 있었다. 왼편에는 의자가 놓인 회의실이 있었다. 신씨는 이 회의실에서 정보원 교육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사장 배 아무개씨는 기자와 만나는 것을 거부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기자가 찾아가 여직원에게 명함을 건네고 기다리고 있을 때 기자를 지나쳐 사무실을 빠져나간 사람이었다. 그는 왜 기자를 피했을까.

사무실에 근무하는 여직원은 “US Asia는 컨설팅 회사이다”라고 말했다. 등기부등본을 떼보니 회사 설립 목적이 ‘사업 개발 자문 서비스 제공’이라고 나와 있었다. 1501호에는 이 회사 말고도 서류상으로 몇 개 회사가 더 있었다. 이 사무실에 근무하는 인원은 네 명 정도였다(OO쪽 참조).

 
이에 대해 경인TV 김종오 부회장은 “삼구빌딩 15층에 있는 US Asia는 영안모자의 해외 사업을 상담해주는 회사다. 백회장을 돕는 것이 아니라 회사 대 회사로 거래하는 관계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사무실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등기부등본에 나와 있다. 대표이사가 리처드피 롤리스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반도 군사 문제에 대한 미국측 상대인 미국 국방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부차관보이다. 신 전 대표는 국감에서 “백회장은 리처드 롤리스 부차관보를 잘 안다고 했고, 롤리스와 오랜 인연을 갖고 있는 또 다른 인사가 영안모자 해외담당 고문이라는 직함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사람 역시 문건을 작성하는 데 깊이 관여하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신씨가 지목한 ‘영안모자 해외담당 고문’은 US Asia 배 아무개 사장으로 추측된다.

백회장은 국감에서 “롤리스는 옛날에 사업 관계로 알게 되었다. 최근에 만난 적은 없다”라고 말했다. 삼구빌딩 한 관계자는 “롤리스는 국방부 차관보로 가기 직전까지 1501호에서 일했다. 그가 배사장과 식사하는 모습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라고 말했다. 1501호를 매개로 한 백회장과 롤리스의 관계가 새삼 주목되는 이유다.

“얼마나 큰 사회적 파장을 몰고 올지 모르는 사안이다”라는 열린우리당 우상호 의원의 말처럼 ‘백성학 의혹 사건’의 실체가 드러난다면 우리 사회에 새로운 충격파를 던질 것으로 보인다. 별 죄의식 없이 미국이나 일본 등에 정보를 넘기는 것에 대한 경각심이 부각될 것이다. ‘적국’에 정보를 넘긴 경우에만 간첩으로 처벌할 수 있게 되어 있는 현재 형법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을 것이다.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런 문제가 쟁점으로 부상할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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