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적인 연주회 비극적인 생활고
  • 유혁준 (음악 칼럼니스트) ()
  • 승인 2006.11.17 17:4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시향, 브루크너 교향곡 8번 완벽히 소화 전용 홀 없이 20억 예산으로 이룩한 ‘쾌거’

 
지난 10월28일 저녁,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2006 대한민국 국제음악제의 폐막 연주회는 서울 악단이 아닌 제주시립 교향악단이 장식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얼마 전 애초에 있지도 않은 여성단원과 어린 학생까지 동원해 운동장에서 그들만의 잔치를 벌인 빈 필하모닉보다, 제주시향의 혼신의 힘을 기울인 연주가 몇 곱절 감동적이었다.

말러와 함께 모차르트, 베토벤에 이어 교향악의 찬란한 금자탑을 세웠던 안톤 브루크너. 그의 작품은 하나같이 난곡 중의 난곡으로 꼽히며 뭇 오케스트라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자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국내에서 브루크너를 무대에 올리는 것은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삼다도 제주의 한 지휘자가 지난해부터 브루크너 전곡 연주의 대장정에 돌입했다. 이미 국내 오케스트라의 한판 축제인 ‘예술의전당 교향악 축제’를 통해 중앙 악단에 조금도 부족함 없는 실력을 뽐낸 바 있는 제주시향의 ‘일대 반란’은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그 일등 공신은 이동호 지휘자다. 브루크너의 고향 린츠의 브루크너 음악원에서 지휘를 공부한 그는 벌써 오래 전부터 브루크너의 교향곡 전곡 연주의 꿈을 다져왔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우선 서울 악단에 비해 실력이 떨어지는 단원들의 기초부터 다졌다. 오케스트라의 기술적인 면은 일취월장했다. 특히 제주국제관악제로 다져진 제주시향의 관악기는 국내 최고 수준으로 격상되었다. 여기에 이동호씨는 브루크너에 맞게 현악기의 활 긋기부터 새로이 연습시키며 피나는 훈련을 거듭했다.

브루크너의 교향곡 8번! 3악장 ‘아다지오’ 악장만 25분을 훌쩍 넘기는 그야말로 ‘천국적인’ 길이를 가지는 바다와도 같은 곡이다. 국내에서는 구경하기 조차 힘든 ‘바그너 튜바’가 네 대나 필요해서 웬만한 악단은 연주 계획마저 잡기 어렵다. 이 초대형 교향곡을 서울 청중에게 선사한 제주시향은 거의 완벽한 연주를 이끌어냈다.

역시 본고장에서 배운 지휘자의 예리한 눈매는 무서웠다. 100여 분에 이르는 긴 시간 내내 악보를 보지 않고 암보로 지휘한 이동호 씨는 하나의 주제를 완전히 끊고 다른 주제로 넘어가는 방식과 주요 악구 사이의 과다한 쉼표를 철저히 지켰다. 그리고 마침내 이른바 ‘브루크너 아다지오’의 진수를 보여주며 3악장을 무려 28분에 연주했다. 불과 64명의 상임단원으로 이룩한 쾌거. 특히 남성단원들은 가정을 꾸려가기에 턱없이 모자라는 보수를 받으며 부업까지 하면서 오직 음악 하나만 바라보고 일구어낸 성과이기에 더욱 값진 일이었다.

그러면 제주시향의 1년 씀씀이는 얼마나 될까? 서울시향이나 KBS 교향악단의 5분의 1 수준에도 못 미치는 20억원. 그나마 대도시를 제외한 중소도시 교향악단에 비해서는 상황이 좋은 편이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지방 교향악단의 힘겨울 살림살이가 그대로 드러난다. 고작 2억원의 공연기획 예산으로는 매달 열리는 정기 연주회를 치러내기도 버겁다. 일괄적으로 정해진 연주가 개런티 때문에 세계 수준의 협연자를 초청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지휘자 이동호씨, 100여 분간 암보로 지휘

지방자치제도 실시 후 단체장의 ‘업적용’으로 급조된 대다수 지방 교향악단은 부천필, 수원시향, 부산시향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아직도 상임단원 60명 내외의 편성으로 제대로 된 연주를 하기가 극히 힘들다. 웬만한 곡은 엑스트라를 쓸 수밖에 없어 앙상블에 항상 문제점을 안고 있다.

또한 제주시향은 콘서트를 위해서는 제주문예회관의 눈치를 매년 살펴야 한다. 자신들만의 전용 홀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 전국에 산재한 공연장은 100개를 훌쩍 넘겼다. 그런데도 왜 교향악단이 상주할 극장이 없을까? 지자체들이 특색 없는 공연장만 잔뜩 지어놓고 이를 활용할 연주 단체를 육성하지 않은 탓이다. 집만 있고 사람이 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대부분 음향 상태가 좋지 않은 다목적 홀로 지어진 탓에 교향악단이 연주할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된 전용 홀은 단 한 군데도 없는 것이다. 이런 희한한 현상은 유럽과 러시아 같은 음악 선진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제 본궤도에 진입한 서울시향은 올해 20억원이 넘는 자체 수익을 올렸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성과다. 그러나 서울시장이 바뀌면서 전용 홀 건립은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상임 지휘자 정명훈씨는 자신이 지휘하는 연주회 기간 외에는 국내에 머무르는 일이 드물다. 이제 막 세계 수준으로 도약하기 위해 체계적인 트레이닝이 필요한 서울시향으로서는 아쉬운 대목이다. 일반인들은 해외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을 지휘하는 정명훈에게 오히려 익숙하다.

국내 최고라고 자부하던 KBS 교향악단은 4년째 지휘자가 공석이다. 영국 BBC 산하의 방송 교향악단 5개가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KBS 교향악단은 KBS 내에서도 천덕꾸러기 취급을 면치 못하고 있다. 한 해 엄청난 혈세가 새나가고 있는데도 KBS 경영진은 나 몰라라 하고 있다. 상승세를 타고 있던 대전시향은 현 지휘자와 재계약을 하지 않아 또다시 지휘자 부재 상태가 이어질 전망이다.

 
일본에 비해 클래식 시장 규모가 10분의 1도 채 되지 않는 우리 현실에서 올 한해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은 수십 회 이상을 기록했다. 최고가 티켓이 50만원을 기록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비싼 공연 티켓을 판 기록을 세웠다. 연주의 질과 관계없이 박수를 쳐대는 ‘과시용 청중’도 문제이지만 정작 우리 오케스트라의 연주회에는 초대권을 줘도 객석이 차지 않는다는 데 그 심각성이 더하다. 천문학에 달하는 외화가 낭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전국의 각 공연장들은 오케스트라를 살려야 한다. 극장에 상주하는 연주 단체가 없다면 그 극장의 존재 가치는 없다. 해외 연주 단체의 내한 공연에 열을 올리지 말고 그 도시를 대표하는 문화 사절인 교향악단이 제자리를 찾게끔 지혜를 모아야 한다. 동남아의 말레이시안 필하모닉이 전세계를 다니며 자국을 알리고 있다. 서울시향이 빈 무지크페라인잘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아 볼쇼이 홀에서 유료 청중을 모아놓고 공연을 펼칠 날은 과연 언제일까?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