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의 정적이 ‘푸틴의 적’ 죽였나
  • 모스크바 · 정다원 통신원 ()
  • 승인 2006.12.01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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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레초프스키, 리트비넨코 암살 음모자일 가능성…“강제 송환 모면용 작전”
 
최근 영국에서 발생한 전직 러시아 연방안전국(FSB) 요원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의문사 사건이 푸틴 정권을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푸틴 정권과 관련한 미묘한 정치적 사건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가 사망한 원인이 방사능 물질인 폴로늄 210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영국과 러시아 간에 외교적 긴장감마저 감돌고 있다. 리트비넨코의 죽음에 관한 시나리오는 아주 다양하다. 크렘린 개입설, 보리스 베레초프스키 음모설, 체첸 연관설, 연방안전국 자체 작품설 이외에 자살 자작극이라는 주장도 있고, 최근에는 유코스 연관설까지 나왔다. 전후 정황을 살펴볼 때 정교하게 계획된 고도의 정치 게임이라는 것이 관측통의 일치된 평가다.

도대체 리트비넨코는 누구인가? 그는 전직 연방안전국 대령이다. 옛 소련 권력의 핵심부였던 국가보안국(KGB)의 후신인 연방안전국 범죄조직근절 분과위에서 활동하던 그는 촉망받는 젊은이였다. 그런데 2000년 블라지미르 푸틴 대통령과 각을 세우다 곤경에 처했고, 당시 권력 실세였던 보리스 베레초프스키의 도움을 받아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도피했다. 얼마 후 망명이 허용된 리트비넨코는 <연방안전국 러시아를 폭파하다>라는 책을 출판하는 등 반(反)러시아 활동에 진력했다. 자신의 저서에서 그는 연방안전국과 푸틴 대통령을 매섭게 비난하는 한편 그의 옛 동료들이 그를 죽이려 한다는 푸념도 했다.

리트비넨코 사건은 정밀한 계획 범죄이다. 이 사건이 일련의 엽기적 사건과 더불어 푸틴 대통령 일정과 미묘하게 맞물려 있음이 이를 방증한다. 즉, 그의 의문사는 여기자 안나 폴리트코브스카야 암살 사건과 모블라지 바이사로프 살해 사건과 맞물려 있다. 체첸 인권 문제를 집중 취재하던 폴리트코브스카야가 살해된 10월7일은 푸틴 대통령의 독일 방문 직전이다. 또 폴리트코브스카야 암살 배후를 캐는 과정에서 독극물에 중독된 리트비넨코는 푸틴 대통령이 유럽연합-러시아 정상회담에 참석하기 직전에 죽었다. 일련의 사건은 11월18일 전직 연방안전국 북카프카즈 체첸 담당 지국장인 모블라지 바이사로프가 모스크바 시내 한복판에서 무차별 총격을 받고 살해된 사건으로 마감된다. 그는 기자들과 만나 체첸 비리를 폭로할 예정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리트비넨코 사건은 연방안전국이 사건의 배후라는 인상을 짙게 풍긴다. 아이러니하게도 리트비넨코가 마리오 스카라멜로이라는 이탈리아인으로부터 건네받은 폴리트코브스카야 암살 정보(A4 용지 4장 분량)를 읽은 후 독극물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은 2002년 연방안전국이 몰래 독을 넣어 보낸 편지를 읽고 중독되어 죽은 체첸 반군 지도자 하타프를 상기시킨다. 또한 리트비넨코가 ‘잇수’(ITSU)라는 일식집에서 스카라멜로이를 접촉한 사실은 빅토르 유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연상시킨다. 2년 전 대통령 선거에서 친러 대통령 후보자인 야누코비치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유셴코도 음식점에서 다이옥신에 중독되었다. 당시 유셴코측은 사건의 배후를 러시아 연방안전국이라고 주장했다.

영국 경찰, 베레초프스키 주변 ‘집중 수사’

나아가 범죄에 사용된 방사능 물질 폴로늄 210은 연방안전국 등의 특수 기관에서나 다룰 수 있는 희귀 독극물이라는 점에서 연방안전국 연루설은 설득력을 얻는다.
리트비넨코의 의문사는 푸틴에게 정치적 짐이 된 체첸, 연방안전국, 언론 등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데 충분했다.

 
체첸 문제는 푸틴을 대통령 후보로 부상시킨 동기이자 그의 정치적 약점이기도 하다. 체첸 전쟁에서 희생된 체첸 국민과 병사들의 수는 수만 명을 헤아린다. 리트비넨코는 “1999년 연방안전국이 모스크바 아파트 폭파 사건을 조종했다”라고 주장했다. 폭파 주범을 체첸 반군으로 규정한 푸틴 정권의 주장을 뒤집은 것이다. 당시 3백명 이상의 주민이 희생당한 이 사건은 체첸에 대한 적개심과 체첸 전쟁의 당위성을 내세우기에 충분했다. 리트비넨코가 주장한 이같은 내용은 푸틴 대통령과 갈등을 빚다가 영국으로 망명한 베레초프스키도 수차례 언급한 바 있다. 그 무렵 외교가에서는 ‘아파트 폭파 사건’이 당시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던 아나톨리 추바이스를 제치고 푸틴이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풍문이 돌았었다.

현재 연방안전국이 러시아 권력의 핵심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푸틴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이 연방안전국이기 때문이다. 이곳 출신들은 정치·경제·행정을 장악하고 있다. 제1부총리이자 국방장관인 세르게이 이바노프와 연방안전국 국장 니콜라이 파트루셰프, 또 내무부 특수경찰국 국장 니콜라이 보브로프스키 등은 모두 푸틴 대통령이 국가보안국 시절부터 절친하게 지내온 측근들이다. 이외에 크렘린, 세관, 재계 곳곳에도 연방안전국 출신들이 포진하고 있다. 서방은 연방안전국에 과거 국가보안국에서 운영되던 ‘암살부’가 부활될 것을 걱정하고 있다.

정치는 언론과 상극 관계일까? 푸틴 정권 또한 언론과의 관계가 껄끄럽다. 푸틴은 옐친 정권 때 몸을 부풀린 언론 재벌들을 모두 제거했다. 대표적 인물이 구신스키와 베레초프스키이다. 나아가 이들 재벌 밑에서 일하던 언론인들을 차례로 제거하거나 친정부로 돌려세웠다. 서방으로부터 ‘민주주의 탄압’이라는 비판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리트비넨코가 폴리트코브스카야 암살 사건의 배후를 추적했던 것도 푸틴 정권의 약점을 공격하려는 의도였음은 분명하다.

 
정황은 리트비넨코 사건에 크렘린과 연방안전국이 연루되었음을 직감케 한다. 하지만 러시아 언론과 관측통들은 베레초프스키 음모설에 비중을 둔다. 첩보 문제에 정통한 러시아 주간지 <베르시야>(異說)는 이번 사건을 ‘베레초프스키의 위기 모면 작전’이라고 관측했다. 얼마 전 러시아와 영국은 ‘범죄자 인도 규정 완화’에 관해서 합의한 바 있다. 푸틴의 눈엣가시인 베레초프스키가 본국으로 강제 송환될 날이 가까워졌다는 얘기다. 이른바 리트비넨코 독살을 낀 일련의 사건 배경에는 푸틴 정권을 흠집 냄과 동시에 영국과 러시아 간 외교 관계를 악화시키려는 베레초프스키의 음모가 숨어 있다는 주장이다. 리트비넨코가 죽어갈 무렵 그는 이 사건에 크렘린과 연방안전국이 개입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와 영국은 오랫동안 범죄자 인도 문제로 갈등을 빚어왔다. 영국이 반체제 인사인 베레초프스키와 체첸 무장 세력 대변인 격인 아흐메드 자카예프에 대해 망명을 허용함은 물론 신병 인도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리트비넨코가 암살의 표적이 된 이면에는 그가 베레초프스키·자카예프와 두터운 친분을 유지해왔음도 간과할 수 없다.

현재 수사의 방향은 베레초프스키 음모설로 기우는 듯하다. 리트비넨코를 죽음으로 몰아간 방사성 물질 폴로늄 210이 베레초프스키 사무실과 그가 소유한 건물 등지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존 리드 영국 내무장관은 국회 발표에서 가능성을 모두 열어놓고 리트비넨코 주변 인물들에 대한 철저히 조사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수사의 초점이 베레초프스키 주변으로 축소되고 있음도 넌지시 시사했다.
진실 게임은 어렵다. 정치적 사건에 얽힌 진실 게임은 더욱 그렇다. 과연 다양한 시나리오가 존재하는 ‘리트비넨코 사건’의 진실은 열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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