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도는 돈 500조의 '압박'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2006.12.11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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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를 위협하는 부동자금의 실체는 무엇인가. <시사저널>은 단기 유동성 자금의 상세 내역을 알려주는 미공개 통계 내용을 입수했다.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 주의보가 내려졌다. 부동 자금이 지나치게 늘어나면서 통화정책의 효과가 사라질 염려가 커진 것이다. 한국은행 금융통계팀이 집계한 부동 자금(단기 유동성)은 5백26조원(10월 말 기준)이다.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8백7조원의 65%나 되는 규모다. 부동 자금은 지난 2002년 말 4백15조원이었으나 4년이 채 안 되어 1백조원 넘게 불어났다(표 참조).

부동 자금은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떠다니는 돈’이다. 부동 자금은 한곳에 오랫동안 머물지 않고 투기 이익이 있는 곳을 찾아 떠돌아다닌다. 고수익이 예상되는 곳으로 쏠리다가도 투자 조건이 바뀌면 밀물처럼 빠지면서 금융 시장을 교란시킨다. 언제든지 빼낼 수 있어야 하므로 현금·요구불 예금·수시입출식 예금이나 만기 6개월 미만 금융 상품에 들어 있다. 만기 6개월 미만 금융 상품으로는 정기예금·양도성예금증서(CD)·환매조건부채권(RP)·표지어음·머니마켓펀드(MMF)·단기채권형 수익증권·어음관리계좌·자기발행어음이 있다(표 참조).

한국은행의 미공개 단기 유동성 통계치(10월 말 기준)에 따르면, 개인 머니마켓 펀드를 포함한 수시입출식 저축성 예금 잔액이 2백42조원으로 가장 많고 요구불 예금과 만기 6개월 미만 정기 예적금이 각각 73조원과 57조원을 넘었다. 그밖의 단기 금융상품 잔액은 40조원을 넘지 않는다. 해지에 따른 이자 손해를 보지 않고 언제든지 뺄 수 있는 상품 비중이 전체 단기 유동성의 80%에 이르는 것이다.

토지보상비도 부동 자금 급증에 기여

그나마 간접 투자 상품인 펀드로 들어가는 자금이 늘어난 것이 부동 자금 일부를 흡수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자산운용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1백20조6백76억원이던 펀드 자금이 지난 11월 말 1백47조7천8백81억원으로 불어났다. 이상호 한국증권업협회 상무는 “조금이라도 높은 수익이 기대되는 주식 상품으로 자금이 쏠리고 있다”라고 말했다. 외국인 투자자가 올해 국내 증권 시장에서 11조7천억원 손매도 했음에도 주가지수가 떨어지지 않는 데도 주식형 펀드로 들어간 부동 자금이 크게 기여했다.

 
정책 당국이 부동 자금 증가 원인으로 가장 먼저 꼽는 것이 가계 대출이다. 주택담보대출로 대변되는 가계 대출이 크게 늘어나 시중 유동성이 늘어났다는 것이다. 이성태 한은 총재는 “집값이 오를 것이라고 기대하고 (가계에서) 대출을 늘리다 보니 자금 수요가 커지고 이에 대응하고자 금융기관이 대출 여력을 높이는 방편으로 외국에서 차입을 상당히 많이 하면서 유동성이 커졌다”라고 말했다. 권오규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은 지난 12월7일 금융연구원 주최 ‘금융기관 경영인 조찬 강연에서 “최근 주택담보대출과 중소기업대출 부문에서 (금융기관 사이에) 과당 경쟁의 조짐이 보인다”라고 말했다.

은행권의 주택담보대출금 잔액은 2백10조원(10월 말 기준)이다. 은행권 총 대출금은 6백70조원이다. 은행권 전체 대출의 30% 이상을 주택담보대출이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박정일 제일은행 지점장은 “과거 은행 빚이 1~2천만원만 있어도 부담스러워했으나 요즘은 연봉 3천만원 봉급 생활자가 대출 1억원을 쉽게 여긴다”라고 말했다.

토지보상비도 부동 자금 급증에 기여했다. 정부가 행정도시·혁신도시·기업도시를 추진하기 위해 토지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지난 3년 동안 지급된 토지 보상비가 37조5천4백70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올해 12월 수도권에서 토지공사·주택공사·SH공사가 땅 주인에게 지급하는 금액만 10조원에 달할 것으로 집계된다. 토지 보상으로 인해 이익을 챙긴 이는 서울 강남 지역 주민이라고 한다. 지역 주민이 땅 판 돈으로 강남 지역 아파트를 사들이면서 강남 집값 상승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금융 전문가 사이에는 부동 자금 증가를 통화 정책의 실패 탓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통화 당국이 통화량 조절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한국은행 금융통계팀 집계에 따르면, 지난 4년 동안 가장 넓은 의미의 통화량 지표인 광의 유동성(L) 자체가 크게 늘었다(도표 참조). 단기 유동성을 광의 유동성으로 나눈 비율이 올해에는 지난 3년 평균보다 오히려 낮아졌다. 통화량 증가를 감안한 상대적 부동 자금 규모는 줄어든 것이다. 쉽게 말해 통화량 자체가 많으니 단기 유동성 절대 금액이 덩달아 늘어날 수밖에 없다.

거액 부동 자금=고혈당…‘경제 당뇨’ 부를 수도

금융을 경제의 혈맥이라고 한다면, 부동 자금은 혈당에 비유할 수 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정 범위의 혈당을 유지해야 하듯 시중 유동성이 부족하면 경기 침체나 금융 공황이 일어날 수 있다. 반대로 고혈당이 당뇨병을 일으키듯이 부동 자금이 지나치게 많으면 국민 경제에 갖가지 병적 현상이 일어난다.

 
부동 자금으로 인해 이상 과열 현상이 뚜렷한 곳은 주택 시장이다. 주택 시장으로 부동자금이 몰린 것이 집값 불안으로 이어졌다. 부동 자금이 주택 시장으로 물꼬를 트자 온갖 집값 안정 정책은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노무현 정부가 여덟 차례나 집값 안정 대책을 쏟아내며 초강도 수요 억제 정책을 폈지만 집값 불안은 가시지 않고 있다. 정부는 뒤늦게 주택담보대출을 줄이겠다고 팔 걷고 나섰다. 하지만 과거 사례를 보면, 가계 대출 억제책을 시행하
 
더라도 과잉 부동 자금이 있는 한 집값 불안은 개선되지 않는다(?쪽 부속기사 참조).

주택담보대출 폭증은 단지 시중 유동성 증가로 그치지 않을 수 있다. 권오규 경제부총리는 “(대출 쏠림 현상은) 개별 금융기관의 경영 위험을 높이고 시장 불안의 잠재 요인으로 작용할 염려가 있다”라고 말했다. 집값 거품이 꺼지면서 집값이 폭락하는 사태가 일어나면 국내 금융기관들이 외환위기 못지않은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국내 담보 인정 비율이 시가의 60% 선을 넘지 않으므로 집값이 40% 포인트 넘게 폭락하지 않는 한 은행 부실로 이어질 가능성은 없다는 지적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집값 폭락이 패닉으로 이어져 실물 경기뿐만 아니라 금융 경기마저 공황에 빠뜨릴 소지는 충분하다. 일본식 장기불황을 경계하는 소리는 이 시나리오에 근거한다.

일본은 1991년 자산가치가 급락하면서 불황의 늪에 빠져 2001년까지 무려 11년 가까이 연 평균 경제성장률이 1.1%에 그쳤다. 일본 당국이 제로 금리라는 초저금리 정책을 실시했으나 풀린 돈은 금융권에서만 맴돌 뿐 투자와 소비는 이루어지지 않고 불황의 터널은 깊어만 갔다. 부동 자금이 지나치게 늘어나 유동성 함정에 빠진 것이다. 유동성 함정에 빠지면, 통화 당국이 돈을 풀고 금리를 낮추고 재정 지출을 늘려도 경기가 침체의 늪에서 헤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투자는 줄고 소비는 살아나지 않아 최악의 경우 공황까지 일으킨다. 유동성 함정은 존 메이너드 케인즈가 1920년대 세계 대공황을 설명하기 위해 제기한 학설이다.

생산 자금으로 흡수할 방안 마땅찮아

이같은 부동 자금을 어디다 써야 하느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낙후한 서비스 산업의 구조 조정과 경쟁력 강화에 사용해야 한다’든지 ‘국가의 에너지 자급률을 높이는 재원으로 활용하자’든지 ‘신흥 시장에 투자해 투자 수익을 올리는 방안’까지 나오고 있다. 이와 같은 아이디어를 활용한 유전개발 펀드나 베트남 펀드처럼 이색 펀드 상품이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다.

 
문제는 부동 자금을 생산 자금으로 흡수할 방안이 마땅하지 않다는 점이다. 자금을 써야 할 기업이 설비 투자와 연구·개발(R&D) 투자를 늘리지 않고 있다. 성장잠재력 약화를 걱정할 만큼 기업이 설비 투자를 주저하며 현금 보유 비중만 늘리고 있다. 내수가 살아날 기미는 아직 뚜렷하지 않다. 실업과 부도 위험이 커지므로 개인과 기업은 현금을 쥐고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

부동 자금이 생산 자금으로 쓰이는 것만큼 좋은 것은 없다. 생산의 주체는 기업이다. 기업이 부동 자금을 흡수해 설비 투자나 연구·개발 부문에 투자하는 것이 최선이다. 관건은 부동 자금을 주저앉히는 방안이다. 생산 자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자금의 부동성을 잡아야 한다.

가장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금리 인상이다. 최호상 삼성경제연구소 수석 연구위원은 지난 11월6일 발표한 <주택시장 불안과 금리>라는 보고서에서 ‘지난 2002~2004년 금리를 높이지 않아 가계 대출이 급증하고 단기 유동성이 커졌다. 이것이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어가 거품을 낳는 악순환을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실질금리가 낮은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자 저축 성향은 약해졌다. 한국은행 목표금리(콜금리)가 4.5%로 다소 높아졌으나 아직까지 낮은 수준이다. 목표금리에서 물가상승률을 뺀 실질금리는 1%선에 불과하다. 금리가 낮을수록 고위험·고수익 투자처가 인기다.

그렇다고 통화 당국이 함부로 목표금리를 높이기도 어렵다. 금리 인상이 투자 위축과 내수 침체를 악화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은행이 택한 것이 지급준비율 인상 조처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지난 11월23일 요구불 예금과 수시입출식 예금의 지급준비율을 5%에서 7%로 2% 포인트 인상했다. 단기 금융상품의 지급준비율 인상은 부동 자금을 겨냥한 조처다. 금융기관은 예금주의 지급 요구에 언제든지 응할 수 있게끔 예금 총액의 일정 비율(지급준비율)을 현금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 한국은행은 지급준비율을 낮추거나 높여 시중 유동성을 조절한다. 금융기관이 현금 보유 비율을 늘리다 보니

대출 자금이 줄어 시중 통화량도 아울러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는 “금융기관의 여신 공급 능력을 줄여 금리 정책을 보완할 필요가 있어 (지급준비율 인상 조처를) 단행했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10월~올해 8월 다섯 차례 목표금리(은행간 단기차입금리)를 높였으나 단기 유동성이 줄어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한국은행은 이 조처로 금융기관이 대출에 쓸 자금 규모를 반강제적으로 줄이면서 부동 자금을 더 이상 두고 보지 않겠다고 시장에 신호를 보낸 것이다.

 
지급준비율을 높인 금통위는 지난 12월7일 목표금리를 4.5%로 동결했다. 겨우 살아날 조짐이 보이는 내수가 다시 나빠지지 않을까를 걱정한 것이다. 경기 침체가 심해지면 소비나 투자를 하기보다 절약하거나 유동성 확보 성향이 심해져 유동성 함정에 빠질 위험이 커진다. 한번 빠지면 벗어나기 힘든 것이 유동성 함정이다. 금융 전문가가 선제적 대응을 중시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전효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나 지금까지 부동 자금이 일으킨 거품이 꺼지는 것을 막아 경기가 연착륙한 적이 없다. 국내에서는 2002년 신용카드 거품 붕괴가 그랬고 일본에서는 1991년 자산가치 급락이 그랬다”라고 말했다. ‘거품은 꺼지기 전까지는 언제 꺼지는지 모른다’고 말하는 경제학자도 있다. 경험 법칙이 유효하다면, 한국 경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부동 자금이라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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