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 본 대선 캘린더, 대선 1년 전에는 무슨 일들이 있었나?
  • 고재열 기자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6.12.22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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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과 2002년 대선에서 선거 1년 전 인기도 1위였던 박찬종과 이회창 모두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는 대선 징크스가 화제다. 대권 레이스 수위를 달리고 있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긴장시키는 이 징크스처럼, 과연 ‘대선 공식’이라는 것이 있을까? 역사의 수레바퀴가 얼마나 같은 궤적을 그리는지 알아보기 위해 2007년 대선과 구도가 비슷했던 지난 세 번의 대선 1년 전 풍경을 살펴보았다.

2002년 대선의 해, 신년 벽두를 연 화두는 ‘갑의 전쟁’이었다. 정권 재창출을 놓고 벌어진 동교동계 맏형(권노갑)과 둘째 형(한화갑)의 대결이 여당을 술렁이게 만들었다. 동교동 구파를 이끄는 권노갑 고문은 ‘호남 후보 불가론’을 내세우며 한화갑 의원의 경선 출마를 막았고, 한의원은 김홍일·김홍업 등 대통령 아들들까지 내세우며 강력하게 이에 맞섰다. 당 대선 후보로 이인제 의원을 밀었던 권고문 진영에서 한의원의 병역문제까지 들먹이자 갈등은 극에 달했다.

2001년 11월 중순에 <시사저널>이 민주당 대의원들을 대상으로 지지도를 조사한 결과는 이인제(35.0%) 한화갑(14.7%) 노무현(13.4%) 순이었다. 고건 서울시장(8.1%)과 정몽준 의원(5.8%)의 지지율은 미약했다. 당 내에서는 이인제 대세론이 주류였지만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에게는 턱없이 밀렸다. 비슷한 시기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이회창 총재(32.0%)는 이인제 의원(16.4%)을 여유 있게 앞섰다.

당시 노무현 상임고문은 이렇다 할 입지를 가지지 못했다. 동생이 물의를 일으킨 신승남 검찰총장의 사퇴를 종용하다 당 지도부로부터 경고를 듣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자신의 탈당을 요구하는 주장까지 나오자 노무현 고문이 영남포위론·영남배제론이라며 반발했다는 것이다. 당시 그는 “민주당은 국민통합정당이라는 당의 정강을 지켜달라”고 요구했다.

2002년에도 노무현 대통령 전국정당화 주장해

당 쇄신파가 중심을 이루어 노무현·한화갑·김근태 후보의 연대를 추진했으나 이것 또한 지지부진했다. 그나마 진전된 것은 ‘당 발전과 쇄신을 위한 특별대책위원회’가 만들어져 국민참여경선제가 도입되었다는 점이다. 이후 이인제 고문의 본선 경쟁력에 회의론이 일면서 노무현 후보는 대역전 드라마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회창 대세론’에 묻혀 지내던 한나라당에서는 별다른 이슈가 없었다. 당이 아니라 외곽 캠프가 중심이 되어 있는 것에 대한 볼멘소리가 나오기는 했지만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잔잔한 대세론에 돌을 던진 사람은 박근혜 부총재였다. 경선 도전장을 낸 박부총재는 <시사저널>과 인터뷰에서 “이회창 총재를 꺾을 자신이 있다”라고 말했다. 인상적인 점은 현재 오픈 프라이머리(완전국민경선제)에 부정적인 박 전 대표가 당시에는 “국민이 참여하는 경선이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2002년 대선에 대해 역술가 김성욱씨는 “이씨 성을 가진 자가 나라의 권력을 잡으려고 하는데 정씨 성을 가진 자가 나타나 이를 깨뜨리려 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김씨의 말처럼 개혁 이미지를 가진 정동영 의원과 월드컵을 업고 급부상한 정몽준 의원이 각광받기도 했지만 결국 용꿈을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1997년 대선의 해를 연 정치 이슈는 ‘노동법 날치기 통과’였다. 사회 각 세력이 강력히 항의하면서 정국을 뒤흔드는 주요 이슈가 되었다. 날치기 통과는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폭등 문제처럼 김영삼 정부를 괴롭혔다. 당시 외신들도 ‘한국에 나타난 독재의 망령(뉴욕 타임스)’ ‘시대를 거꾸로 가는 한국(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수치로 환산할 수 없는 한국 정부의 망신살(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이라며 비난할 정도였다.

노동법 날치기 통과 후폭풍에 대선 주자 지각 변동

날치기 통과는 신한국당(현 한나라당)의 대선 지형도도 바꾸었다. 유약한 이미지를 벗기 위해 노동법 통과를 강하게 밀어붙였던 이홍구 대표와 파업 지도부에 대한 이념 공세 및 색깔 논쟁에 나섰던 이수성 총리가 대선 레이스에서 밀려나고 초기 노동법 통과에 동조했다가 나중에 주장을 바꿔 소신 발언을 쏟아낸 이회창 고문이 급부상했다. 이후 이고문은 전문 킹 메이커인 김윤환 고문과 연대하면서 대선 주자로서 입지를 다졌다.

노동법 날치기 통과의 숨은 주역인 강삼재·이원종 등 ‘비서형 실세’들의 위상이 추락한 것은 부동산 정책 실패로 역풍을 맞고 있는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비서진의 모습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레임덕은 늘 가까운 곳에서부터 나타나기 마련이다. 신한국당 9룡이 아홉 마리 미꾸라지로 전락한 가운데 DJP 공조는 더욱 공고해져 보궐선거 압승을 이루어냈다.

1997년 대선 당시 주요 역술인들은 여당의 9룡이나 김대중·김종필이 아닌 ‘지금까지 전혀 거론되지 않은 인물이 대통령이 된다’라고 예언했다. 정치권에서는 이런 예언이 나오자 최병렬 의원이나 조순 서울시장 등을 숨은 잠룡 그룹에 넣고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결국 대통령은 ‘지금까지 매번 거론되었던’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가 되었다.

1992년, 대선의 해를 연 사람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었다. 5공 청문회 당시 노무현 의원에게 “돈 싸들고 정치인 찾아다니지 말라”는 핀잔을 들었던 정주영 명예회장은 ‘돈 싸들고 정치인을 불러 모아’ 신당을 만들었다. 정명예회장은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홍준표 의원의 ‘아파트 반값 정책’의 원저작권자이기도 하다. ‘아파트 반값’은 그해 대선에서 정명예회장이 내세운 공약이었다.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아파트 반값 공약으로 돌풍

당시 여당인 민자당은 남북 정상회담에 관심을 집중했다. 회담이 이루어지면 집권당인 민자당 후보의 당선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체육청소년부장관을 맡으면서도 남북 관계를 주도하며 사실상 통일부장관 역할을 수행한 박철언 장관의 역할이 관심을 모았다. 박장관이 이끄는 민정계의 중심에는 월계수회가 있었는데 현재 한나라당 대표를 맡고 있는 강재섭 의원도 당시 범월계수회로 분류되었다.

이런 남북 관계 진전 과정을 민자당 김영삼 대표를 중심으로 한 민주계는 전전긍긍하며 지켜보았다. 총선 전에 대선 후보를 김대표로 확정하는 데 장애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대표의 측근인 김덕룡 의원이 나서서 경선 없이 지명으로 당의 대선 후보를 확정하자고 주장했다.

김영삼 대표는 조기에 승부수를 던졌다. 동반 탈당자 서명을 받아 노태우 대통령을 압박하고 나선 것이다. 당시 민주계와 민정계의 각축은 요즘 여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당 사수파와 통합신당파 간의 갈등을 능가하는 파벌 싸움이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당시 돈키호테형 정치인인 김영삼 대표가 탈당론을 내세운 반면 지금 햄릿형 정치인인 김근태 의장이 탈당을 이끌고 있다는 점이다.

역술인협회 회장 지창룡씨는 당시 “주역에 나온 임신년 괘상은 기다림을 의미하는 수천수괘에 해당하기 때문에 기다리는 사람이 성공할 운세다. 이기주의적 행동을 일삼는 정치인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 차기 대선 후보는 각 정당의 당헌 당규에 따라 경선을 통해 선출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해 대통령은 탈당을 불사하며 독자 행보를 보였던 민자당 김영삼 대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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