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필립스LCD "되는 일이 없네"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2006.12.26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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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CD 가격 하락→적자 누적→주가 추락→가격담합 조사 ‘악전고투’…증자로 돌파구 찾을 듯
 
LG필립스LCD가 창사 이후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다. 온갖 악재가 동시 다발로 쏟아져나오면서 생존 기반까지 위협하고 있다. 지난해 2분기부터 실적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현금 흐름에 ‘빨간 불’이 켜지고 주가는 폭락하고 있다.

새해 LCD(액정표시장치) 패널 시장 전망도 밝지 않다. 한국·미국·일본 ·유럽의 규제 당국이 가격 담합 혐의로 세계 주요 LCD 패널 업체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LG필립스LCD를 함께 이끌어가던 네덜란드의 필립스가 보유 지분을 팔고 경영에서 손을 떼려 하고 있다. 총체적 난국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LG필립스LCD의 위기는 구본준 LG필립스LCD 부회장의 위기이기도 하다. 구본준 부회장은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다. 구씨 형제는 얼핏 보아서는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닮았다. LG그룹 본사 사옥인 여의도 쌍둥이빌딩에 있는 임직원조차 구씨 형제를 가까이서 보좌하는 이가 아니면 가르마를 보고 형제를 구분한다고 한다(구회장이 왼쪽 가르마를, 구부회장이 오른쪽 가르마를 탄다). 생김새와 달리 성품은 크게 다르다는 평이다. 구회장이 부드럽고 온화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반면 구부회장은 직선적이고 튀는 성격이다. 그 탓에 구부회장은 심심치 않게 ‘설화’의 주인공이 된다.

구부회장이 일으킨 설화 가운데 가장 파장이 컸던 것이 ‘역적’ 발언이다. 구본준 부회장은 지난 2003년 4월 일본 도쿄에서 가진 기자 간담회에서 “LG필립스LCD가 삼성전자를 꺾고 시장 1위에 올라설 수밖에 없다. (중략) 5세대 생산 라인에 대한 투자 의사 결정을 내린 삼성전자 임원은 (신중치 못한 투자로 회사에 손해를 끼친) 역적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삼성전자는 구부회장이 왜곡된 정보로 경쟁사를 폄훼했다고 발끈했다.

당시는 LG필립스LCD와 삼성전자가 대형 LCD 패널 시장 1위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던 상황이었다. 양사의 신경전은 대단했다. 생산 라인 투자에서 시장점유율과 장비업체 선정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부딪쳤다. 당시 LG그룹의 전자 계열사는 가전 사업을 빼고는 삼성전자에 뒤진 것을 만회하고자 ‘1등 LG’를 내세우며 공격 경영에 나섰다. 이때 LCD 패널 사업에서 삼성전자를 제칠 기미를 보이자 LG그룹은 흥분한 듯하다. 구본준 부회장이 주도해 세계 최대 규모의 파주 LCD 생산단지를 착공한 것이다. 파주 LCD 생산단지를 정상 가동하면 삼성전자나 일본 샤프를 제치고 세계 LCD 패널 시장 1위에 올라선다는 장밋빛 전망이 LG그룹 안팎에 가득했다.

 ‘꿈’이 ‘혹’으로 변한 파주 공장

그로부터 3년6개월이 지난 지금 구부회장은 대표이사 직에서 물러났다. 민후식 한국투자증권 투자분석가는 “구본준 부회장을 비롯한 경영진이 잇따른 경영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이다. 기존 경영진이 지금까지 거듭해 저지른 경영상의 실수나 오류를 새 경영진이 어떻게 바로잡느냐가 LG필립스LCD의 앞날을 결정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LG필립스LCD는 올해 2/4분기 영업실적이 4천4백52억원 적자로 반전했고 3분기 적자 규모도 3천8백억원을 넘어섰다. 4/4분기 적자 폭은 줄기는 하겠지만 2천억원을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2006년 영업적자는 1조원에 이르렀다. 전망도 밝지 않다. 배승철 삼성전자 분석가는 LG필립스LCD의 새해 1분기와 2분기 영업적자가 각각 2천2백50억원과 2천5백80억원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했다.

 
LCD 업계는 공급 과잉이 초래한 LCD 값 하락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LCD 패널 값은 지난 2004년 초부터 폭락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떨어지고 있다. 32인치 LCD 패널 값이 2004년 초 1천100달러를 넘었으나 지금은 3백50달러에 불과하다. 거의 70% 가까이 떨어진 것이다. 공급 과잉은 당분간 해소될 기미가 없어 패널 값은 더 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더욱이 LCD 패널 대체재라고 할 수 있는 플라스마디스플레이패널(PDP) 값이 터무니없이 내려갔다. 마쓰시타의 42인치 PDP 패널은 미국에서 9백99 달러까지 떨어졌다. 공급은 지나치게 많고 수요는 부족하니 값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패널 값 하락은 업계의 실적 악화로 이어졌다.

LCD 업체 가운데 실적이 가장 나빠진 곳은 LG필립스LCD이다. 경쟁 업체인 삼성전자의 LCD 사업부문과 타이완 AU옵트로닉스는 소폭이나마 흑자를 기록하고 있다. 민후식 한투증권 투자분석가는 “투자 효율성이 떨어지고 품질이나 영업에서 전략적 오류가 겹쳐지면서 경쟁에서 처지고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패널 값이 올해 10~11월 소폭이나마 올라 손익이 개선될 조짐을 보이다가 12월 들어 다시 TV 재고가 쌓이면서 적자 폭이 불어나고 있다.

LG필립스LCD가 보유한 현금은 3천3백억원에 불과하다. 자본금을 늘리거나 현금을 빌려야 하는 형편이다. LG필립스LCD 시가총액이 9조1천억원일 만큼 증자나 차입을 통해 1조원가량은 조달할 여력은 있다. 금융 비용이 연간 1천3백억원이나 된다. 차입을 늘려 금융 비용 부담을 늘리기보다는 증자에 나설 것이 유력하다.

증자 방안에는 걸림돌이 하나 있다. 2대 주주 필립스(지분율 32%)가 지분을 처분한다고 공언했다. 제라드 클라이스터리 필립스그룹 회장은 지난 11월26일 “지분을 모두 매각하겠다”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필립스가 증자에 참여할 가능성은 없다고 보아야 한다. 3자 배정이나 옵션 같은 방법이 동원될 것으로 보인다. 클라이스터리 회장은 지분 매각을 결정하면서 패널 공급처도 다변화할 뜻을 밝혔다. 필립스는 지금까지 LG필립스LCD 생산량의 25%를 사들였다. 필립스가 패널 구입처를 다변화하면 LG필립스LCD의 실적 악화는 가중될 것이다.

경영 실적은 악화 일로이고 증자 가능성마저 제기되자 주가가 떨어지고 있다. LG필립스LCD 주가는 지난 12월12일 2만4천9백50원까지 떨어지면서 2004년 7월 상장 이후 최저가까지 추락했다. 최근 주가가 다소 오르면서 2만7천원 선을 회복했으나 여전히 약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와중에 한국·미국·일본·유럽 규제 당국이 LCD 업체 전체를 대상으로 광범위한 가격담합 조사를 실시한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주가 하락을 부추겼다. 2003~2004년 LCD 업계는 7백억 달러까지 시장 규모를 키우는 과정에서 가격 담합이라는 불공정 거래 행위를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금융경제정보 서비스 업체인 블룸버그 통신은 ‘(가격 담합) 혐의가 입증되면 LCD 업계는 사상 최대 규모인 10억 달러가 넘는 과징금을 물게 될 수 있다’라고 전망했다. 반도체 업체 네 곳이 올해 과징금으로 납부한 7천2백90만 달러나 지난 2001년 비타민 업체들이 낸 7천5백20만 달러를 넘어선 금액이다. 삼성전자나 일본 샤프전자를 비롯한 국내외 경쟁업체는 현금 흐름이 나쁘지 않다. 과징금이 부가되더라도 납부할 여력이 있다. 하지만 가뜩이나 현금이 말라가고 있는 LG필립스LCD로서 거액의 과징금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구본준 부회장은 파주에 세계 최초의 7세대 공장을 설립하느라 5조3천억원을 쏟아 부었다. 파주 공장은 지난해 초부터 42인치와 47인치 TV 패널을 양산하고 있으나 2분기 연속 영업 손실을 기록했다. 파주 공장이 실적과 현금 흐름 악화의 주범이 된 것이다. 구부회장의 논리대로라면, 구부회장은 7세대 공장 설립을 성급히 추진하면서 LG필립스LCD를 위기로 몰고 간 ‘역적’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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