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 파산-가족 파산-고령 파산, 절망의 도미노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6.12.29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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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파산 10만명 시대가 되었다. 요즘도 하루 평균 2백~3백 건의 신청이 몰린다
 
사례 1: 경기도 분당에 사는 이 아무개씨(50)는 한때 사모님 소리를 들었다. 남편이 수십 억 원대 매출을 올리는 중소기업을 운영했기 때문이다. 의류·직물 업종에 종사하던 남편은 중국 진출을 꾀하면서 신용보증기금에서 대출을 받았다. 이씨와 아들이 보증을 섰다. 문제는 그 이후부터 발생했다. 중국에 진출한 사업이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남편이 갑작스럽게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씨가 공장을 운영해보았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사업은 망했고, 이씨와 아들은 빚에 시달리다 파산을 신청했다. 파산·면책된 두 사람은 지금 동생 집에 살면서 재기를 꿈꾸고 있다.

사례 2: 서울에 사는 박 아무개씨(42)는 관장님이었다. 검도 도장을 운영하며 열심히 살았다. 어느 날 아들이 친구들과 싸우다 상처를 입고 돌아왔을 때부터 세상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아들이 백혈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 먼저 집을 팔았다. 이어 도장이 넘어갔다. 결국 파산을 신청한 그에게 법원은 1억원이 넘는 채무를 면책해주었다. 면책 결정을 받았음에도 그는 별로 기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치료비는 계속 들어갈 것이기에.

사례 3: 대학생 딸을 둔 부부가 있었다. 보증금 6백만원에 월세 20만원짜리 방에서 세 식구가 살았다. 남편은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려갔다. 부인은 정신병 증세가 있었다. 부인이 카드를 발급받은 것이 화근이었다. 카드사들은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부인에게 카드를 발급해줬다. 첫 달에 카드비가 1천8백만원이 나왔다. 이때부터 돌려 막기를 하니 순식간에 빚이 수천 만원으로 늘어났다. 카드사 추심 담당자들이 협박 전화를 해왔다. 견디다 못한 남편과 딸이 보증을 섰다. 딸이 다니는 학교까지 찾아왔다. 길은 없었다. 파산·면책된 이후 부인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남편은 여전히 막노동을 한다. 딸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배움의 끈을 놓지 않고 희망을 꿈꾼다.

개인 파산자가 급증하고 있다. 2006년 12월29일 현재 개인 파산을 신청한 사람이 전국적으로 12만5천여 명에 달한다. 인구 1만명당 20명꼴이기 때문에 인구 1만명당 19명인 일본보다 비율이 높다. 이제 더 이상 파산은 ‘특별한 사람들이 겪는 특별한 사례’가 아니다.

1962년 파산법이 제정되었으나 개인 파산이 실제로 현실화한 것은 1997년 3월이 처음이다. 하지만 신청자들이 법원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2004년부터다. 2003년 신용카드 대란을 거치면서 파산자가 속출했기 때문이다. 2003년 3천8백56명에 불과했던 신청자는 2004년 1만2천3백17명으로 네 배 가까이 늘어났다. 그 이후 신청자가 매년 세 배 이상 늘고 있다.

 
이를 보여주듯 개인 파산·회생 등을 접수하는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 별관 남관 1층은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지난 12월28일 오후에 가보니 접수번호가 569번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날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지난해 4월부터 개인 파산 신청이 한 달에 4천~5천 건 넘게 접수되고 있다. 휴일을 빼면 하루에 보통 2백~3백 건이 접수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야말로 물밀 듯이 밀려들고 있는 셈이다. 한 명이 접수하다 업무가 벅차 담당 직원을 한 명 더 늘렸다.

서류 심사를 하는 판사들의 방에 가보니 책상 과 탁자 위에 신청 서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홍성준 판사는 “최소한 두 번은 서류를 봐야 한다. 근무 경험이 풍부한 판사들은 하루에 2백 건 정도를 처리하지만, 초임 판사들은 하루에 50건 처리하기도 힘겹다”라고 말했다. 홍판사가 준 자료를 보니 법관 1인당 사건 부담이 엄청나게 증가했다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법관 1인당 접수 건수로 환산한 수치가 2002년의 경우 55.14였는데 2004년에는 384.77로, 2006년에는 2,343.33으로 늘어났다. 가히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 것이다. 법원 주변에서는 남관 1층을 “서울역보다 민원인이 많은 곳이다”라고 표현한다.

이 건물에 있는 서울중앙지방법원 파산부에는 판사 15명이 일하고 있는데, 기업 회생·법인 파산 등을 담당하는 일곱 개 합의부와 개인 파산·개인 회생·고액 채무자 회생을 담당하는 27개 단독 재판부가 있다. 판사들은 3~4개 재판부에 속해 겹치기 업무를 본다.

사례 1과 사례 3의 경우에서 보듯 최근 개인 파산자 중에는 가족 파산이 크게 늘어났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이 2006년 8월16일부터 9월21일까지 면책 신청인 1천4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29.4%가 가족 파산 상태에서 파산 신청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가족 파산의 대부분은 부부가 동시에 파산하는 부부 파산이다. 가족 파산자의 64.9%가 “배우자로 인해 채무가 발생했다”라고 답했기 때문이다. 또 이렇게 답한 사람들의 44.8%가 자신의 채무 절반 이상이 배우자 때문에 생긴 것으로 조사되었다.

파산·면책 사건을 많이 취급하는 이재권 변호사는 “가족이 파산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남자가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부인과 자녀들이 보증을 섰는데, 사업에 문제가 생겨 파산하면서 부인과 자녀도 함께 파산한 경우가 대부분이다”라고 말했다. ‘파산에 이르게 된 원인’을 묻는 질문에는 ‘사업에 실패한 경우’가 45.7%로 첫 번째였고, ‘보증’이 10.2%로 3위를 차지했다는 것은 가족 파산이 얼마나 일반화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가족 파산과 함께 최근 또 하나 주목되는 흐름은 고령 파산이다. 20대의 비중이 2003년 17.5%에서, 2006년 4.9%로 현저히 낮아지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파산자 가운데 50대 이상인 사람들의 비율이 2003년에는 19.5%였는데, 2006년에는 33.8%로 늘었다. 60대 이상은 2005년 9.7%에서, 2006년 11.5%로 늘었다. 고령자들의 파산이 증가하는 것은 고령화 시대를 맞는 우리 사회가 대비해야 할 또 하나의 영역이 생겼음을 보여준다. 유엔은 우리나라가 2018년이면 만65세 인구가 전체 인구의 14% 이상을 차지하는 고령 국가로 진입할 것으로 예상한 바 있다.

고령 파산자의 증가는 파산 원인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 파산 원인 다섯째가 6.8%를 차지한 ‘병원비 부담 때문’이다. 뚜렷한 노후 대책이 없는 고령 채무자가 아프거나 다쳐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할 경우, 치료비는 고스란히 빚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최근 들어 전국에서 병원비를 못 내는 환자들이 병원에서 도망하는 사례가 속출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깊다. 홍성준 판사는 “고령 파산자들이 증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복지·의료 체계를 더 확충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개인 파산 사건의 경우 여성 비율이 높았으나 점차 남성 비율이 커지고 있다. 여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활발히 사회 활동을 하는 남성들이 처음에는 체면과 사회적 인식 때문에 파산 신청하기를 꺼렸으나, 파산 선고를 받고 면책을 통해 재기를 노리는 실질적인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고 있다고 분석된다. 전체 개인 파산자의 76.3%가 1억원 미만의 채무를 갖고 있다.

파산 신청자가 급증하고 면책율이 상승하면서 일각에서는 ‘도덕적 해이’ 논란도 불거지고 있다. 2006년 4월 통합도산법이 시행되면서 파산 신청을 하면 자동으로 면책 신청을 한 것으로 제도가 바뀌었는데, 2006년 10월 현재 면책율은 98.1%다. 파산 선고를 받은 사람들 거의 대부분이 면책된다고 볼 수 있다. 면책되면 빚은 모두 탕감되지만 7년 동안 금융기관의 관심을 받으며 신용카드를 만들거나 휴대전화를 개통하는 데 제약을 받는다.

 
파산 신청자가 면책될 경우 채권자는 돈을 일절 받을 수 없다. 홍성준 판사는 “금융기관들은 이미 부실액을 상각 처리했거나 대손충당금을 충분히 적립했기 때문에 자산 건전성이 급격히 악화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라고 말했다. 채권자가 개인일 경우에도 법원에 ‘파산 신청자의 면책 불허가’를 요청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오랜 기간에 걸쳐 샅샅이 채무자의 재산 상태를 뒤져보았는데 실제로 나오는 것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금융감독원 신용정보실은 지난해 12월 국회에 제출한 ‘법원의 파산·면책 현황 및 대응방안’ 문건에서 ‘낭비, 도박, 카드 돌려 막기 등 면책 불허가 사유임에도 불구하고 법원의 재량 면책 허가가 확대되면서 카드 대출 등을 통해 일단 쓰고 보자는 소비 풍조가 확산되는 등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가 걱정된다’라고 우려했다. 또 ‘정상적으로 채무를 상환하는 사람들도 채무를 탕감받을 목적으로 파산·면책을 신청하는 사례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라고 분석했다.

 
한나라당 김정훈 의원은 이를 근거로 “이대로 두면 금융회사의 자산 건전성이 악화되어 금융 기관이 부실해지는 한 원인이 될 수 있다. 파산 신청자들이 신청하기 이전에 신용회복위원회 등 민간 기구와의 상담 및 신용관리 교육을 이수하는 것 따위를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금융 채무 정책과 관련한 다양한 방안을 모색 중인 김의원은 외국의 입법 사례나 여러 이해 관계자의 의견을 듣고 입법 추진 여부를 결정할 계획이다.

그러나 ‘도덕적 해이’ 주장에 대해 법원에서는 파산 신청인의 77%가 파산 상태에 이른 뒤 파산 신청을 하기까지 1년 이상 걸렸고, 파산 신청을 한 데 대해 채권자들이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가 실질적으로 3%에 불과하다는 점 등을 들어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이진성 수석부장판사는 “그런 문제 제기가 있기 때문에 더 엄밀하게 심사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법원은 지금까지는 파산 신청자들이 ‘재산을 은닉했는가’에 주목했지만 앞으로는 ‘허위 진술’ 여부를 엄격하게 따질 계획이다.

이재권 변호사는 “파산 신청에서 선고에 이르는 기간이 좀더 짧아져야 한다. 법원 인력도 확충해야 하고 재산이 있는 사람들이 사업을 하면서 파산을 준비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보완이 필요하다. 하지만 ‘도덕적 해이’ 운운하는 것은 일부를 너무 확대해서 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당분간 파산·면책자는 계속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 제도를 아직 모르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또 부동산 광풍 속에 금융기관들로부터 거액을 대출받은 사람들이 부동산 값이 폭락한다면 2003년 카드 대란 못지않게 파산 위험에 처할 가능성도 있다. 누구나 파산자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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