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권 화폐’ 들먹이면 의심하라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7.01.02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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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정부 들어 구권 화폐 사기 10여 건 터져…외화 구권 사기도 꽤 있어

 
지난해 12월26일 서울중앙지검 형사5부(부장 한무근)는 김용균 전 한나라당 의원(64·변호사)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혐의로 구속했다. 김 전 의원이 2000년 김 아무개씨에게 노태우 전 대통령 등과 구권 화폐를 신권으로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돈을 주면 높은 이익을 붙여 구권 화폐로 돌려주겠다고 속여서 2002년까지 모두 22억원을 챙긴 혐의다.
또 구권 화폐 사기 사건이다. 구권(舊券)이란 보통 위조 방지하기 위해 만든 은색 실선이 첨가되기 전인 1994년 이전에 나온 지폐를 가리킨다. 보통 구권은 정권의 비자금으로 숨겨놓은 수십 조원 규모의 1만원짜리 지폐로 통용되고 있다. 서울 명동 사채 시장과 강남·여의도 등지에서는 구권을 웃돈을 얹어 신권으로 교환해주겠다는 구권 화폐 사기 행각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6월 ‘큰손’ 장영자씨가 대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받았다. 장씨는 ‘김영삼 전 대통령 아들 현철씨의 비자금을 1만원권 구권 화폐로 관리하고 있는데 현금 21억∼24억원을 주면 구권 화폐 30억원을 주겠다’는 수법으로 2백여 억원을 가로챘다. 지난해 말 문제가 된 ‘법조 브로커’ 윤상림씨와 관련된 유 아무개씨도 구권 화폐 사기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다. 유씨는 자신을 지하자금 양성화를 책임지고 있는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이라고 속인 뒤, 노태우 전 대통령의 통치 자금으로 숨겨둔 구권 화폐와 미국 연방채권 등을 구해주겠다며 벤처기업 사장으로부터 46억5천만원을 챙겼다. 유씨는 동료를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직원으로 가장해 피해자들 앞에서 미국 연방채권을 구하면서 12억원을 주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지난 2004년에는 무려 4백50조원의 구권 화폐가 있는 것처럼 속인 일당이 적발되기도 했다.

실제로 구권의 실체를 믿는 사람은 적지 않다.명동 한 사채업자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천문학적인 돈을 숨겨두었는데, 그 비자금이 어디로 갔겠느냐”라고 말했다. 다른 사채업자는 “실제로 구권 화폐 덩어리가 시장에서 비밀리에 돌아다니고 있다”라고 말했다. 장영자씨는 법정에서 “지하 자금인 구권을 유통시켜 경제를 살려야한다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라고 주장했다. 장씨의 말에 은행과 제2금융권 회사들이 넘어가 돈을 날렸다.

용산·서초동이 구권 사기 주요 무대

김용균 전 의원에게 피해를 당한 김씨는 아직도 구권의 존재를 믿는 눈치다. “김용균씨는 차관과 헌법재판소 사무처장을 지내고 한나라당 법사위 간사를 역임한 사람이다. 근거 없이 사기를 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용균씨의 심부름을 하던 엄 아무개씨가 내 아파트에 불쑥 찾아와 김용균씨에게 받았다며 1만원짜리 구권 화폐 100만원 묶음 열 개를 내놓았다. 구권 1만원짜리가 비닐로 포장되어 있는 것을 보니 은행에서 방금 가져온 것 같았다.”
구권 화폐 사기범들은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이 거주하는 ‘연희동’을 들먹이면서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 참여정부 들어 발생한 10여 건의 구권 사기 사건 대부분이 ‘연희동 어르신’의 돈을 바꾸는 일이라며 시작되었다. 지난 12월27일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 담당 비서관이라고 사칭해 31억원을 가로챈 김 아무개씨가 검찰에 구속되었다.

 
사기범들은 돈을 보통 지게차로 한 번에 운반할 수 있는 양인 ‘파레트’ 단위(1파레트=30억원)로 컨테이너로 보관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구권 화폐를 디지털카메라로 찍어 가지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미군 부대가 있는 서울 용산과 대검찰청이 있는 서초동이 범행 무대가 되기도 한다. 한 사기 피해자는 “자신을 대검의 비자금 담당 수사관이라고 소개했다. 대검찰청 안에서 공범의 의전을 받으면서 나오는 사기꾼의 행동에 속아 돈을 줄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브라질 크루제이루화, 쿠웨이트 디나르화, 이라크 리알화 등 외화 관련 구권 사기 사건도 종종 일어난다. 한 은행 관계자는 “브라질이나 이라크 돈의 진위 여부를 묻는 고객이 간혹 온다. 특히 연말이나 선거를 전후해 그런 고객들이 많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구권 화폐 비자금의 실체는 확인된 바 없다. 경찰청 특수수사과 한 관계자는 “구권 화폐 사기 사건을 수없이 보아왔지만 지금까지 거액의 구권과 신권 교환이 이뤄진 적은 없었다. 구권을 들먹이면 100% 사기라고 보면 된다”라고 말했다. 한 검찰 관계자는 “5천원 신권이 나오기 직전 구권 다발을 사들이는 예가 종종 있었다. 구권 비자금이 존재할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구권을 목돈으로 내놓는 사람은 곧 자금원이 추적당한다.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사업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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