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돼지꿈이 개꿈 되는가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2007.01.02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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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기아차, 환율 하락 노사 분규로 '2010년 글로벌 톱5' 진입 가물가물
 
현대·기아차그룹은 한바탕 멋진 꿈에서 깼다. ‘글로벌 톱5’이라는 황금 돼지가 품 안으로 뛰어드는가 싶더니 예기치 않은 찬바람을 맞고 단잠에서 깨고 만 것이다. 아직 잠이 덜 깬 현대·기아차그룹을 잔인하게 맞이한 것은 실타래처럼 꼬인 갖가지 난제들이다. 현재 현대·기아차그룹의 새해 전망을 좋게 보는 자동차 산업 분석가는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듯하다. 금융·경제 정보 서비스업체 블룸버그는 ‘새해 역시 현대·기아차그룹에는 수난의 해가 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1년 전만 해도 상황은 정반대였다. 2010년 ‘글로벌 톱5’에 오를 것이라는 목표가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자동차 산업의 메카’ 미국 시장에서 품질에 대한 호평이 쏟아지고 시장점유율도 꾸준히 올라갔다. 일본 혼다자동차를 제치는 것쯤은 시간 문제로 보였다. 현대차는 세계 최고의 자동차 업체 도요타가 양사의 생산 라인을 상호 공개하자고 한 제안마저 호기롭게 거부했다. 현대·기아차그룹은 2005년 매출 85조원을 넘어서는 사상 최대의 경영 실적을 기록했다. 2006년 매출 목표는 1백조원으로 정했다.

미국과 일본 자동차 업체는 현대·기아차그룹의 급부상을 부담스러워하며 노골적으로 견제하기 시작했다. 이 견제가 부담스러웠는지 최한영 당시 현대·기아차그룹 전략기획실 사장이 ‘글로벌 톱5’라는 경영 목표를 부인하기까지 했다. 과속 사고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속도 조절에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장밋빛으로 가득했던 꿈이 채 1년도 지나기 전에 우울한 잿빛으로 바뀌었다. 그것도 순식간에 ‘개꿈’으로 전락한 것이다. 단꿈에 젖은 현대·기아차그룹에 찬물을 끼얹은 사건은 지난해 4월에 일어났다.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이 횡령 혐의로 수사받다가 구속된 것이다. 정회장은 지난해 6월 보석으로 출소했다. 정회장은 오는 1월16일 검찰 구형을 앞두고 있다. 늦어도 1월 말쯤에는 선고가 나올 듯하다. 정회장이 무
죄 판결까지 받을지는 확실치 않으나 법정 구속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정회장이 자리를 비운 사이 미국 조지아 주의 기아차 공장과 체코의 현대차 공장의 기공식이 연기되었다. 새 차의 개발도 당초 계획보다 더뎌졌다. 파업은 쉬지 않고 이어져 그로 인한 생산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현대차는 지난해 1~9월 매출 19조7천5백13억원·당기순이익 9천8백89억원을 기록했다. 매출은 전년도 같은 기간과 비교해 소폭 올랐으나 순이익은 40.4%나 줄어들었다. 현대차의 지난 3/4분기 순익은 2천8백28억원으로 떨어져 전년도 같은 기간과 비교해 47%나 폭락했다. 2001년 이후 가장 크게 떨어졌다. 기아차는 더 심각하다. 3/4분기에 4백39억원 순손실을 기록했다. 외환위기 이후 첫 적자다.

“현대·기아차 새해 전망도 어둡다”

현대차 주가는 지난 한해 34.8%나 떨어졌다. 2005년 12월 장중 한때 10만원이 넘던 현대차 주가는 2006년 12월 6만7천원 선으로 주저앉았다. 시가총액이 1년 사이에 6조5천억원가량 사라진 것이다. 기아차 주가는 2006년 1월 초 2만8천원이 넘었으나 12월 말 1만3천5백원을 넘지 못했다. 거의 1년 만에 반토막이 난 것이다. 안수웅 우리투자증권 연구원은 “2008년에나 새 차가 나올 것이고 내수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현대차의 새해 전망도 어둡다”라고 말했다.

도대체 지난 한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수확만 기다리던 품질 경영의 과실이 어느새 서리를 맞아 쭉정이가 된 것일까? 늘 그렇듯 기업이 순환적으로 겪는 성장과 쇠퇴의 비밀을 풀려면, 외부 환경과 내적 역량의 변화를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현대·기아차그룹을 둘러싼 외부 환경 가운데 급변한 것은 환율이다. 2006년 초 1천8원이던 원/달러 환율이 이 해 말 9백20원 선으로 주저앉았다. 연초 대비 8% 넘게 원화 가치가 높아지자 현대·기아차그룹은 수익 구조에 타격을 입었다. 해외 판매금액의 원화 환전 가치가 줄어든 탓이다. 미국 증권사 메릴린치의 추산에 따르면, 원화 값이 1% 포인트 오를 때마다 현대차와 기아차 수익은 각각 2%와 4.7% 줄어든다.

현대차는 총매출 가운데 수출이 차지하는 비율이 75.6%(2005년 말 기준)이다. 기아차는 수출 비중이 76%이다. 원/달러 환율이 10원 떨어지면 현대차와 기아차의 매출은 각각 1천2백억원과 8백억원 줄어든다. 지난해 원/달러 환율 하락 폭이 90원을 넘은 것을 감안하면, 현대차는 앉은 자리에서 1조1천5백억원(기아차 7천7백억원)가량을 까먹은 셈이다. 김동진 현대차 부회장은 “수출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 환율 하락이 제일 큰 문제다. 민간 기업이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경제 규모가 커져 정부가 (외환) 시장에 개입하기도 힘들어졌다”라고 말했다.

원화 가치가 오르자 현대차는 수지타산을 맞추기 위해 주요 차종의 값을 올려야 했다. 반면 일본 엔화 가치는 원화처럼 오르지 않았다. 지난해 3분기 원화 가치는 7.2% 평가절상되었으나 엔화는 오히려 4.3% 절하되었다. 이 바람에 일부 차종은 일본 차보다 값이 높아지는 ‘가격 역전 현상’까지 빚어졌다. 미국 시장에서 현대차의 소형차 엑센트 값은 경쟁 차종인 도요타의 야리스보다 비싸다. 중형차 쏘나타도 도요타의 캠리나 혼다의 어코드와 가격 차이가 빠르게 좁혀졌다. 중형차 시장에서도 고객을 일본 업체에 빼앗기게 된 것이다.

2006년 10월 미국 시장에서 팔린 쏘나타는 지난 2005년 1월 이래 최저 수준인 7천4백39대에 불과했다. 그 다음달 8천3백71대까지 회복되었으나 1만7천 대가 넘게 팔린 지난해 3월과 비교하면 반 토막에도 못 미친다.
지난 12월6일 미국 자동차 시장 조사업체 제이디파워(J. D. Power)가 발표한 ‘2006년 소비자재 구매율’ 조사에 따르면, 현대차의 미국 시장 재구매율은 51.6%를 기록했다. 2005년 56.3%에서 크게 줄어든 것이다. 같은 기간 일본 ‘빅3’인 도요타·혼다·닛산의 재구매율은 일제히 상승했다. 다시 말해 현대차를 타던 이들이 현대차 대신 일본차를 사고 있는 것이다. 이 탓에 미국 시장점유율은 지난해 7월 3.2%를 정점으로 지난해 11월 2.5%로 떨어졌다.

 
미국뿐 아니라 신흥 시장에서도 현대차는 경쟁 업체에 처지고 있다. 현대차의 중국 시장점유율은 2005년 7.5%에서 2006년 11월 6.5%로 떨어졌다. 도요타를 비롯한 일본 업체가 본격적으로 중국 시장에 진입하면서 시장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또 중국과 함께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인도 시장에서 현대차는 생산 설비 확충이 시급하다. 미래에셋증권은 “중국과 인도에서 현대차의 현지 생산 능력이 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시장 환경이 거칠어지고 있는 것이 실적 전망을 어둡게 한다”라고 지적했다.

2006년 노사 분규 손실액 2조원 넘어

새해 원/달러 환율은 하락세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미국 무역수지 적자가 감당하기 힘들 만큼 불어난 데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금리를 추가로 올릴 가능성도 낮아져 달러 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김동진 부회장은 “(현대차는) 새해 원/달러 환율이 9백원 밑으로 떨어질 것으로 전망하고 이에 대비해 새해 사업계획을 수립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환율 하락이 환경 변수라면 노사 분규는 내부 변수이다. 2006년 현대차가 잦은 파업으로 입은 손실 규모는 2조원이 넘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현대차는 지난해 6~7월 파업으로 인해 1조3천억원(9만3천8백82대)의 생산 손실을 입었다. 지난해 11월에는 여덟 차례 부분 파업을 겪으면서 추가로 1천7백27억원의 생산 차질이 발생했다. 기아차도 7~8월 부분 파업으로 7천4백억원(4만8천대)의 생산 손실이 발생했다. 용대인 굿모닝신한증권 분석가는 “현대차나 기아차가 기대에 못 미치는 실적을 거둔 것은 파업 탓이다”이라고 말했다.

잦은 파업으로 생산과 판매가 줄어들었으나 뒤따른 임금 인상이 겹치면서 매출 대비 노동 비용 비중은 7.2%로 0.3%포인트 늘었다. 매출 대비 마케팅과 연구비용 비중도 1% 수준까지 높아졌다. 현대차 매출의 30%가량을 차지하는 내수 시장은 침체에서 벗어나기는커녕 더 나빠지리라고 예상된다. 한국투자증권은 지난 12월8일 발표한 분석 보고서에서 ‘현대차의 2006년과 2007년 판매 추정치를 각각 1백64만 대와 1백71만 대에서 1백62만 대와 1백69만 대로 하향 조정한다’고 밝혔다. 당초 기대치보다 2만 대씩 줄여 잡은 것이다. 아직 발표되지 않은 지난해 4/4분기 실적 전망도 어둡다. 한국투자증권은 ‘현대차의 4/4분기 판매는 목표치 47만 대보다 2만 대 적은 45만 대로 줄어들어 매출액도 목표치 8조원에 크게 못 미치는 7조7천억원에 그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영업이익률도 당초 목표치 5.5%(4천3백65억원)에서 5%(3천8백28억원)로 낮춰 잡았다.

현대·기아차그룹이 위기 타개책으로 내놓은 카드는 해외 생산 비중을 높이는 것이다. 현대·기아차그룹은 2011년까지 해외 생산 능력을 두 배 넘게 늘려 연간 2백89만 대까지 키운다는 계획이다. 환율 변동으로 인한 불확실성을 줄이고 잦은 파업으로 인한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겠다는 뜻이 바탕에 깔려 있다.

정필경 현대차 수출기획실장은 “현지에서 생산한 차량을 많이 파는 것과 함께 고수익 차종의 수출 비중을 높이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고수익 차종으로는 중대형 승용차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을 꼽는다. 현대·기아차는 고수익 차종이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2006년 말 60%(당초 55%)까지 늘렸다. 현대차 수출기획실은 ‘신차품질지수가 크게 올랐고 월드컵 후원으로 브랜드 인지도도 높아져 제한적이나마 수출 단가를 올려도 판매가 크게 위축되지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부가가치 향상·해외 생산 증대로 위기 타개”

현대차는 환율 하락에 대비한 환리스크 회피 전략(부속 기사 참조)을 세웠다. 하지만 환리스크 회피 전략은 근원적 해결책이 아니다. 환율 변동으로 인한 실적 감소를 궁극적으로 상쇄할 수 있는 것은 경쟁력 향상이다. 자동차산업 전문가들이 입이 아프게 ‘현대차가 일본 자동차 업체를 본받아야 한다’고 떠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 자동차 업체는 1980년대 엔/달러 환율이 반 토막 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생산성과 부가가치 향상으로 정면 돌파했다.

현대·기아차그룹은 경영 환경이 어려워질 때마다 남발하던 비상 경영 체제를 이번에는 선포하지 않았다. 현대차는 ‘허리띠 졸라매기 같은 임시 방편보다 제품 포트폴리오의 부가가치화와 해외 생산 공장 증설에 주력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현대·기아차그룹이 방향은 제대로 잡은 듯하나 시동을 걸자마자 정비 불량 경고등이 다시 켜졌다. 연말 성과급 지급 규모를 둘러싸고 노사 간에 다시 일촉즉발의 대치 국면이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안수웅 우리투자증권 연구원은 “노사 협동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에서 ‘성과급을 100%로 하느냐 1백50%로 하느냐’를 놓고 쟁의에 들어갈 태세다. 벌써 노조가 특근 거부 투쟁에 나서고 있다. 이래서는 현대차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겠는지 의심스럽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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