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으로 스며든 남녘의 인술
  • 평양 · 정희상 전문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7.01.02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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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민간단체 도움으로 조선적십자병원 병동 재건…의료 장비·시술도 지원

 
북한 핵개발 이후 꽁꽁 얼어붙은 평양 공기가 민간 차원의 인도적 대북 의료 지원 사업으로 잠시나마 훈훈하게 데워졌다. 2006년 12월19일 오전 10시께, 평양시 동대원 구역 대신동에 자리한 ‘조선적십자종합병원’ 구내에서는 이색적인 병동 준공식이 열렸다. 3년 전 화재로 불탄 이 병원 신경 호흡기 병동을 남한의 대북 민간 의료 지원 단체인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보건의료협력본부’에서 지원 물자를 보내 다시 지어준 것이다. 보건의료협력본부는 대한의사협회·대한약사회·대한치과의사협회·대한한의사협회·대한병원협회·한국제약협회·대한결핵협회 등 대부분 남한 의료 분야 관련 단체가 망라되어 참여한 대북 보건 의료 지원 기구이다.

이날 조선적십자병원 신경호흡기 병동 준공식에 참석한 2백여 명 가운데  93명이 남한측 인사들이었다. 북한은 이날 행사를 위해 하루 전 고려항공 전세기를 서울 김포공항에 보내 남한 쪽 의료진 일행을 평양 순안비행장으로 깍듯이 모셨다. 북한의 핵실험과 핵보유 선언 이후 기존의 모든 남북한 직항로가 폐쇄된 지 4개월여 만에 처음 열린 하늘길이었다.

조선적십자병원 심인철 병원장은 환영 인사말을 통해 “6·15 공동선언 정신을 받들어 남한측에서 동포애로 이렇게 도와줘 우리 인민의 치료에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라고 감사를 전한 뒤 “힘 있는 사람은 힘으로, 돈 있는 사람은 돈으로, 기술 있는 사람은 기술로 각각 특색 있게 민족 화합에 기여하면 조국 통일의 앞날도 멀지 않으리라 확신합니다”라고 말했다.

1948년에 설립된 조선적십자병원은 북한에서 가장 큰 규모의 종합병원이다. 8백여 명의 의사에 1천2백여 명의 간호사, 1천여 병상의 입원실을 갖춘 이 병원을 찾는 외래 환자만도 하루 평균 1천5백여 명에 달한다고 한다.

 
남한측 대표단으로 참가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이용선 운영위원장은 “3년 전 이곳을 방문해 불에 탄 시커먼 병동을 보고 지원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새롭게 단장된 병동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라고 말했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에서는 그동안 평양 시민뿐만 아니라 북한 각 지방에서 난치성 중환자들이 주로 찾고 있다는 이 병원의 각종 의료장비 현대화 사업에도 심혈을 기울여 지원해왔다고 한다. 2004년 1월 남북 양측이 ‘조선적십자병원 현대화 사업 합의서’를 체결한 뒤 구강 전문병원과 고려의학과, 안과 전문병원 등에서 사용하는 의료 설비를 지원했다. 또 혈액 분석기와 X레이, 뇨 분석기, 위생복 등 의료기기 및 소모품을 지원하고, MMR 백신과 종합 감기약 등 의약품도 지원했다고 한다.

대북 의료 지원 사업은 각종 병원 물자에 이어 남한의 전문 의료 인력을 투입한 시술 지원으로도 이어졌다. 2005년 10월에는 이 병원 신경외과 병동에 먼저 마련된 종합 수술장에서 북한측의 추간판 탈출증 환자 4명에 대한 남북 의료진의 공동 수술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번 행사에서 북한측은 남한의 참관단에 이례적으로 병원 내부를 세세히 안내하며 환자와 북한측 의료진의 접촉을 일부 허용했다. 병원 벽면 곳곳은 북한 체제의 특징을 보여주듯 고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부자의 훈시가 담긴 각종 선전 구호들로 채워져 있었다. 대부분 오래 전부터 행해진  각종 ‘과학기술 우대 방침’ 관련 훈시가 주된 내용이었지만 최근의 정세를 반영하듯 병실 복도 한쪽 벽면에는 “핵 보유국이 된 5천년 민족사의 력사적 사변을 길이 빛내이자”라고 쓰인, 병원 벽보 치고는 생경한 선전 구호도 붙어 있었다.

북한측, 남한 참관단에 후한 대접

CT(컴퓨터 단층 촬영)실에서는 남한측에서 지원한 CT 단층 촬영 장비 앞에서 이 병원의 여의사가 시범을 보이며 거듭 남한측이 지원한 현대 의료 장비의 우수한 성능에 감사의 뜻을 표했다. 북한측 안내원들은 입원실을 공개하면서도 환자의 안정을 내세워 말은 걸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호흡기 병동 입원실에서 만난 한 환자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네보았다. 평양 시민이라는 40대 중반의 한 폐질환 환자는 담배를 많이 피워서 폐병에 걸렸다고 밝히더니 갑자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훈시를 끄집어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21세기 조선의 3대 머저리로 담배 못 끊은 사람, 컴퓨터 다룰 줄 모르는 사람, 외국어 하나 할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지적하셨는데 나는 장군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해 이렇게 병들었다.”

 
조선적십자병원을 나온 남한쪽 참관단은 평양시 외곽 낙랑 구역에 자리한 정성제약공장으로 인도되었다. 북한이 자랑하는 최신 제약 공장인 이곳 역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에서 지난 2000년부터 북한 의약품 현대화 사업의 일환으로 지원해오고 있는 시설이다. 정성제약공장 전영란 소장은 “남한측 동포의 따뜻한 지원으로 우리는 인민에게 연간 10억 환의 알약품, 1천5백만 병의 주사약품과 수액약품 등 각종 현대 약품을 연구 개발 생산해 조선 전역에 보급하고 있다”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남한측 참관단을 안내한 북한 민화협 관계자는 전소장이 김일성 주석과 함께 만주에서 항일 빨치산 활동을 했다는 오진우 전 인민무력부장(2002년 사망)의 셋째 며느리라고 귀띔했다. 정성제약에서는 현대화된 양방 약제 생산 외에 북한이 자랑하는 전통 약제의 현대화 사업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한다. 이를 위해 양강도에 분공장 격인 고려약공장을 두고 백두산 줄기에서 채취한 생약 재료로 전통 약재 연구와 생산 체제를 갖추었다는 것이다.

북한측은 핵실험 이후 소원해진 남북 관계를 풀어보겠다는 적극적 의지를 보여주려는 듯 오랜만에 직항로를 통해 맞아들인 이번 남한측 방북단이 3박4일간 평양에 체류하는 동안 특별히 신경 쓴 흔적이 역력했다. 12월20일에는 이례적으로 평양에 체류하는 각국 외교관 가족과 남한측 방북단이 자연스레 자리를 함께 하도록 배치했다. 이날 저녁 서울 예술의전당 격인 평양의 모란봉극장에서는 평양의 각국 대사관 대사들과 가족 등 수십 명의 외국인이 방북단과 나란히 앉아 ‘국립교향악단’ 공연을 관람했다. 븍한측이 남한의 방북단에 국립교향악단 공연을 공개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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