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써 말 많은 '확성기 정치'
  • 최훈(중앙일보 정치부문 부장대우) ()
  • 승인 2007.01.18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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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 '막말' 논쟁을 계기로 본 역대 대통령들의 못 말리는 버릇

논란이 되었던 노무현 대통령의 지난해 12월21일 민주평통자문회의 연설은 1시간9분에 이르는 긴 분량이었다. 200자 원고지로 치면 100장 가까운 양이다. 물론 원고를 읽지 않는 노대통령 특유의 대중 연설 식으로 진행됐다.
차분한 톤으로 시작되었지만 정부의 북한 미사일 발사 대응에 대한 비판에 불만을 토로하는 대목에서 노대통령은 절제를 잃기 시작했다. 중간 중간 연설대를 두드리거나 고성에 가까운 불만·하소연 토로, 반문에 마이크가 자주 부르르 떨렸다. 몇 차례의 어정쩡한 박수는 참석자들 스스로의 스트레스를 해소해보려는 모습 같았다.
연설은 즉각 막말 논쟁을 낳았다.“자기 군대 작전 통제도 할 수 없는 군대를 만들어 놓고 ‘나 국방장관이오, 참모총장이오’ 그렇게 별들 달고 거들먹거리고” “줄줄이 몰려가서 떠들어쌌는데 직무유기 아닌가”라는 대통령의 원색적 비난은 즉각 전직 장성들의 반발을 불렀다.
“흔들어라 이거지요, 난데없이 굴러들어온 놈” “미국 엉덩이 뒤에 숨어서” “(미국의 9·19 공동성명 서명과 BDA 계좌 동결은) 나쁘게 보면 짜고 치는 고스톱” “군대에서 몇 년씩 썩히지 말고” 같은 거친 표현들이 거듭 쏟아졌다.

분노·위기감 섞인 노대통령의 말, 말, 말

 

노대통령은 “분노에서 정치를 시작했다”라고 말해 왔다. 독재 권력에 대한 증오의 측면도 있었지만 우리 사회의 오랜 기득권층에 대한 불만이었다. 대통령 직을 맡은 지 만4년이 되어가지만 그의 분노는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고, 분노의 대상도 변하지 않았음을 평통 연설은 증명했다. 자신을 “난데없이 굴러들어온 놈”이라고 표현한 심리의 뿌리이다.
 2004년 3∼5월의 탄핵 사태는 노대통령의 야당에 대한 적대적 공격성이 유발한 결과였다. 그러나 탄핵 사태 이후의 노대통령은 적잖이 자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수동적 공격성의 상태였다. 분노의 기조를 간직했지만 최대한 삭이고 끝까지 인내하면 이긴다는 정도의 분위기였다.
탄핵 이후 2년6개월간 야당과 언론에 대한 노대통령 본인의 직접 공세는 잦아들었다. 2005년에는 “성공한 대통령이 되겠다” “더욱 국정에 전념해 긍정적 평가를 받도록 노력하겠다”라고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승부사·야당 투사 등으로 각인된 ‘노무현의 정체성’을 ‘대통령  직의 정체성’에 맞춰보려는 고민이었다. 김우식 비서실장, 오명 과기부총리 등 보수 원로들이 정권에서 활약할 수 있던 시점과도 일치한다.
그러나 최근 평통 연설을 계기로 노대통령은 다시 보수 언론, 재계, 군 고위층, 검찰, 미국의 대북 기조 등에 대해 선명한 색깔을 내기 시작했다. 적대적 공격성으로의 전환이다. 평통 연설 직후인 12월26일 국무회의에서 그는 “그동안 여러 차례 공격받고 참아왔지만 앞으로는 하나하나 대응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엿새 뒤 부산에서는 “(검찰·재계·언론 간의) 특권·유착 구조를 거부하기 때문에 나는 특권을 갖고 있는 집단과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동네북·레임 덕 대통령’에 대한 심경을 여러 차례 드러냈다. “슬프다” “밀어준 고향 친구들 만나기가 제일 미안하다” “나도 자신있게 말할 실적이 있다”라는 토로를 쏟아냈다. 그는 역대 대통령 중 가장 눈물을 많이 보인 대통령이기도 했다.
연세대 황상민 교수는 “임기 말 쏟아지는 비판을 더 이상 수용 못하겠다는 심리와 위기감이 엿보인다. 평통 연설은 ‘대통령 노무현’보다는 ‘야당 투사 노무현’으로의 정체성 복귀 선언으로 들린다”라고 해석했다.
노대통령의 공세적 방향 전환은 국정 전망을 더욱 암울하게 만든다. 국가 원수가 직접 정책의 반대자들을 모멸하는 터에 각료·참모들의 대안 제시와 토론은 물 건너간 상황이다.
적대적 공격은 적대적 공격을 낳는다.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까지 정동영 전 의장과 함께 신당 합의라는 ‘마이웨이’를 선언하며 강수를 두고 나왔다.
노대통령 자신에게는 아무런 현실적 이득이 없는 수순이다. 때문에 그가 반(反) 특권층 공세의 기수로 자리매김하고 와해된 지지층을 응집시키는 정권 재창출 포석에 나섰다는 분석도 나온다.
역대 대통령 중 노대통령과 비슷하게 비판을 잘 참지 못하고 공격적 화법을 구사했던 이는 김영삼 대통령이다. 짧고 쉽게 메시지를 전달했던 스타일이다. 27세에 국회의원이 되어 평생을 주류로 살아온 그의 화법은 물론 비주류의 분노로부터 비롯한 노대통령의 그것과는 출발점이 다르다. 자기애적 측면이 강했다.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라든가 “클린턴에게 한 수 가르쳤다”라고 한 것이그 예다.

 

 

실언·명언 함께 남긴 YS

“세종은 가장 위대한 대통령” “대만의 이붕(중국) 총리” “차씨(차우세스쿠 루마니아 대통령)” “정몽준(전봉준) 장군 고택” “걸식 아동(결식 아동)” 등의 실언도 숱했지만 유머의 대상으로 넘어갔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는 않겠다” “정권은 짧고 정치는 길다”라는 어록은 민주화 운동 시절 야당 지도자의 명언으로 남아 있다.
어려운 시대의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은 국가의 방향, 통치 철학을 요약한 명구를 많이 남겼다. 광복 전후 이대통령은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살 것이오”라며 단결을 호소했다. “맨주먹의 혁명은 어리석을 뿐”이라며 외교를 통한 독립론도 강조했다.
1960∼70년대 개발시대를 이끈 박대통령은 “중단하는 자는 승리하지 못하며 승리하는 자는 중단하지 않는다”라는 말로 독려에 나섰다. “전쟁을 좋아하는 국민은 망하게 마련이지만 전쟁을 잊어버리는 국민도 위험하다” “미친 개는 몽둥이로 다스려야” “나의 라이벌은 야당이 아니라 김일성”이라며 반공 안보를 내세웠다. “자기 집에 불났는데 이웃이 오길 기다린다면 소방대가 와도 기분이 나빠 불을 안 끌 것”이라며 자주 국방을 촉구한 일화도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군 출신답게 간단 명료하고 분명한 화법을 썼다. 백담사 유배 시절 “내려가서 손 좀 봐줄 놈들이 있다”라고 했다.“대통령으로 일한 사람치고 제대로 살아나간 사람이 없으니 청와대는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흉가”라는 말도 남겼다. 그러나 2003년 “내 전 재산은 29만원”이라는 그의 얘기는 그해의 가장 코믹한 말로 조롱을 받아야 했다.
“보통 사람들의 시대를 열겠다”라고 했던 노태우 대통령의 화법은 무덤덤했다. 1995년 10월 거액의 비자금이 발각되자 “못난 노태우 외람되게 국민앞에 섰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논리적 언변이 뛰어났던 정치인 중 한명이다. “정치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라는 말은 정치권의 고전이 되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 “무엇이 되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라는 그의 말도 정치사에 회자되었다.
어떤 경우든 말 그 자체로 국민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걱정하게 한 대통령은 없었다. 가장 구설이 많았던 대통령으로 각인될 노대통령은 과연 어떤 말들로 후세의 기억에 남을 것인지 심각한 고민을 해보아야 할 시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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