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속 화살표여 사방으로 뻗어라
  • 홍지현(200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희곡 부문 수상자) ()
  • 승인 2007.01.18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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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방향의 화살표들이 모인 결과가 만약 내려가는 방향이라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생기고 말 것이다"

 

 

버스 안이다. 승객으로 꽉 찬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리가 텅텅 비지도 않았다.
햇살이 비친다. 어디서 뉘집 개가 꾸벅꾸벅 졸 것만 같다. 그 안의 승객들은 어떻게 앉아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승객들이 모두 정면을 바라보며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승객들은 꾸벅꾸벅 졸기도 하면서 무심하게 창 밖을 내다보기도 할 것이다. 창 밖을 내다보는 승객들은 제각기 다른 창 밖의 사물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설사 같은 사물을 바라본다 하더라도 각자의 의자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사물을 보는 방향은 다를 수밖에 없다. 사람들 마음속 화살표의 방향과 길이, 그것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갑갑한 조회 풍경과 획일적인 입사 지원 풍속


또 다른 하나의 풍경이 있다. 초등학교 운동장이다. 전교생이 운동장에 나와 아침 조회를 하고 있다. 아이들은 줄을 서 있다. 줄서기에는 하나의 철칙이 있다. 제일 앞의 아이만 제외하고서 학교의 모든 아이들이 보고 있는 것은 앞사람의 뒤통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태는 조회가 끝나 교실로 돌아갈 때까지 지속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앞사람의 뒤통수에 호기심을 갖는 아이가 얼마나 있을까? 보나마나 아이들의 마음속엔 아침에 두고 온 아픈 강아지라든지, 좋아하는 여자애라든지, 친구와 싸운 일이라든지, 그런 것들을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을 것이다. 마음속의 화살표는 제각기 다른 방향이지만, 멋대로 움직이게 놔두어서는 안 된다. 화살표는 고정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 안의 화살표는 그 방향과 적당한 길이가 강제되었다.
감히 이야기한다면 대학 1년생인 내 또래 아이들의 가장 큰 고민은 바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잘하는지, 심지어 무엇을 좋아하는지까지도 도통 오리무중이라는 것이다.
분명히 어렸을 때는 화살표를 지니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오랜 시간 동안 화살표가 다른 방향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마치 고장난 시계침처럼, 화살표는 어디에 갈피를 둘지 모르면서,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러니 당연히 닥쳐올 미래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
닥쳐올 미래가 두려우니 모두들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길’에 매달린다. 객관적으로 그것이 가장 안전해 보이는 길이기 때문이다.
중소기업보다는 무조건 대기업, 대기업 중에서도 기왕이면 정유회사가 좋다. 월급도 두둑하게 받고 많이 뽑지는 않지만 한 번 뽑히면 정년까지 근무가 가능하다고 하고. 그래서 석유가 우리 생활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지 평생 조금의 관심도 없던 사람이 열심히 자기소개서를 쓰기 위해 키보드를 두드린다. “저는 평소에 석유가 우리 생활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가에 대해 항상 놀라워하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에서 배운 벡터의 합성에 대해 떠올려보자.
두 개의 서로 다른 방향의 화살표를 합치면 서로 반대 방향의 성분은 상쇄되고 같은 방향의 성분만 남는다. 결국 같은 방향의 화살표를 합친 것보다 그 길이는 더 짧게 된다.
하지만 문제는 같은 방향의 화살표들이 올라가는 방향인지, 내려가는 방향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여러 방향의 화살표가 모였다가 그 결과가 좋지 않으면 화살표의 방향을 조금 조정해 주면 된다. 하지만 같은 방향의 화살표들이 모인 결과가 만약 내려가는 방향이었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생기고 만다.
다윈의 진화론을 생각해 보자. ‘정체를 알 수 없는 위기’는 항상 종족의 번식을 위협하고,  그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것은 기존의 개체들과 다른 돌연변이다. 그래서 돌연변이가 필요한 것이다.
화살표는 다양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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