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림왕의 '위대한 유산'
  • 정진홍(중앙일보 논설위원) ()
  • 승인 2007.01.18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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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숲에서 맞았다. 전남 장성군 서삼면 일대 축령산 기슭에 빼곡히 들어찬 편백나무·삼나무 숲이었다. 특히 서삼면 모암리와 추암리를 잇는 약 6km의 완만한 경사를 지닌 임도(林道)를 걸으며 마주하는 숲은 분명 하늘이 내려준 선물 같았다. 하지만 이 숲은 하늘의 선물이 아니라 한 사람의 고집스러운 열정과 진하디 진한 땀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숲을 일군 사람은 고 춘원 임종국(1915 ~87년) 선생이다. 그는 반세기 전인 1950년대 중반부터 편백나무 조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1957년부터 본격적인 나무 심기에 나서 20여 년 동안 5백69㏊에 걸쳐 편백나무와 삼나무 등 2백53만여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
사실 한국전쟁이 끝난 후인 50년대 중반에 자기 돈과 노력을 들여서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세상을 거꾸로 사는 ‘미친 짓’이었다. 그래서 임종국 선생이 나무를 심기 시작했을 때 주변에서는 누구 하나 격려하고 칭찬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비웃음과 조롱만 있었다.
사실 임종국 선생은 나무를 키워 돈을 벌기 보다는 오히려 빚을 내서 나무를 심고 숲을 일궈냈다. 흔히 나무는 심기만 하면 자란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큰 착각이다. 특히 자생 수종이 아닌 편백나무·삼나무를 키우려면 이만저만 손길이 가는 것이 아니다. 가뭄이라도 들면 뿌리까지 타들어가는 나무를 살리기 위해 5백 미터 산 아래에서 지게로 물을 길러 한 동이씩 붓는 수고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세상은 임종국 선생의 이런 피나는 노력을 알아주지도 않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홀로 외롭게 가는 고투의 길이었다. 그나마 새마을운동과 정부 주도의 조림 사업이 본격화된 1970년대에 와서야 임종국 선생의 나무 심기에 대한 주목과 관심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임종국 선생은 1970년 철탑산업훈장을 받고 1972년에는 5·16 민족상을 받았다. 하지만 그것이 빚을 져가면서 나무를 심고 숲을 일군 그의 삶마저 보상해주지는 못했다.
결국 그의 말년과 사후에 조림 사업에 들인 빚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임종국 선생이 평생토록 혼신의 땀과 열정으로 키우고 일궈낸 나무와 숲은 외지인 아홉 명에게 나뉘어져 넘어가고 말았다. 그것은 단지 숲의 주인이 바뀐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숲이 송두리째 사라질지 모를 위기 상황이었다. 그나마 다행히 국가가 40억6천8백만원을 들여 다시 그 숲을 매입해 임종국 선생이 땀으로 물 주고 혼으로 비료를 주며 일군 그 숲은 우리 모두의 것으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숲은 지난 2000년 ‘22세기를 위해 보전해야 할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되었다.


숲 체험 참가한 외국인들, 찬사 연발


지금 이 숲은 나무값만 수백억원을 호가하는, 사실상 돈으로 값을 매기기 힘든 고부가가치의 숲이 되었다. 국내는 물론 일본, 중국, 호주, 독일 등지로부터 온 시찰단을 포함해 연 평균 10만여 명이 찾아와 숲 체험과 삼림욕을 하며 찬사를 연발한다.
1987년 72세의 나이로 타계해 고향인 전북 순창군 소재 선영에 안장되었던 임종국 선생의 유해는 지난 2005년 11월23일 그가 평생을 바쳐 일군 전남 장성의 편백나무·삼나무 숲으로 옮겨져 수목장을 새로 치렀다. 결국 자식 같은 나무들이 모여 있는 그 숲으로 먼 길을 돌아와 다시 묻힌 것이다.
평생 나무를 심고 숲을 일구기 위해 자신의 땀과 혼을 담아 온 삶을 바친 고 임종국 선생을 비록 때늦었지만 국가유공자로 예우하자는 운동이 조용히 펼쳐지고 있다. 지난해 부터 시작된 서명운동을 오는 2월까지 전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국가보훈처에 청원할 방침이다. 그래서 올해 식목일이 되기 전에 청원이 받아들여져 평생 나무 심고 숲을 일군 나라와 민족의 숨은 보배 고 임종국 선생이 사후에라도 보다 정당하게 예우받게 되기를 새해 벽두에 간절히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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