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포인트 개헌의 끝은 조기 대선?
  • 전영기(중앙일보 기자) ()
  • 승인 2007.01.19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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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기 (중앙일보 기자)

 
"현행 5년 단임제 헌법은 ‘실패한 대통령’을 만드는 시스템입니다.
집권할 때만 평가받고 정작 집권 이후의 실적을 평가할 방법이 없습니다.
제왕적 특성을 갖게 되는 단임제 대통령은 국가의 계속성에 큰 관심을 갖지 않기가 십상입니다. 단임 대통령의 권력은 불임의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4년 연임제 헌법 개정을 발의했던 것입니다. 대통령으로서 국민과 국가에 봉사할 역사적 책무였습니다.
그런데 한나라당과 국회가 이렇게 저의 개헌 발의를 부결시켜 국민에게 선택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으므로 저는 이제 제 자리에 연연해하지 않고 대통령 직을 물러날까 합니다….”

2007년 4월 어느 날 노무현 대통령이 발의한 연임제 개헌안이 한나라당의 반대로 국회에서 부결된 다음날 있음직한 청와대 풍경을 상상해보았다.
노대통령이 지난 1월9일 헌법 70조 한 조항만 개정하자는 이른바 ‘원 포인트 개헌’을 제안할 때는 대선 주자들과 한나라당의 반대를 뻔히 예상했을 것이다. 대통령이 헌법 개정 발의권은 갖고 있지만, 이를 통과시키는 것은 국회다. 국회가 재석 2/3 이상의 찬성으로 통과시키고, 국민투표에서 50% 이상의 찬성을 얻으면 최종 통과되는 것이 개헌의 법적 절차다.
재석 1/3 이상의 개헌 저지선을 확보한 한나라당의 반대가 예상되는데도 노대통령은 왜 허무한 개헌 발의를 했을까 궁금하다. 그 다음 수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민심·정당·지역 3구도 장악해야 집권 가능


노대통령의 정치적 목표는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후계자에 의한 정권 재창출이다. 한국에서 한 인간이 집권을 하려면 ‘민심 구도’와 ‘정당 구도’ ‘지역 구도’를 장악해야 한다. ‘흥행’을 유지하고 드라마를 만들어 경쟁의 중심에 계속 서야 한다. 이런 집권 요소를 고려하면 개헌이 실패할 경우 노대통령의 다음 수는 하야일 가능성이 크다.

 
개헌과 하야는 모두 노대통령이 갖고 있는 합법적인 권한이다. 그는 연초에 “(임기 말에) 모든 합법적인 권한을 사용하겠다”라고 천명한 바 있다.
그가 대통령 직을 그만두면 헌법 68조 2항에 따라 60일 이내에 차기 대선을 치러야 한다. 해당 조항 내용은 ‘대통령이 궐위된 때 또는 대통령 당선자가 사망하거나 판결 기타의 사유로 그 자격을 상실한 때에는 60일 이내에 후임자를 선출한다’이다. 만일 개헌안 부결에 따른 노대통령의 이튿날 하야 선언이 4월19일에 있게 된다면 60일이 되는 시점인 6월18일 이전까지 17대 대선이 치러져야 한다(노대통령은 4년 연임제 개헌의 필요성을 국민에게 충분히 선전한 뒤에 개헌을 발의할 것이므로 발의 시점을 2월 초로 예측했다. 그럴 경우 20일의 공고 기간과 그로부터 60일 이내 국회 표결을 해야 하는 절차를 감안해 한나라당 주도로 국회가 개헌안을 부결시키는 날을 4월18일로 본 것이다).
17대 대선은 선거법상 12월19일에 치르게 되어 있다. 이를 기준으로 각 정당은 그동안 선거 스케줄을 준비해왔다. 그런데 만약 노대통령이 하야해 대선이 6월18일에 치러진다면 순식간에 6개월이 앞당겨져 ‘조기 대선’ 상황이 도래하는 것이다. 6월18일이라면 한나라당은 이명박, 박근혜, 손학규씨의 후보 단일화를 위한 경선이 치러질 시점이다. 그 시점에 조기 대선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 갑작스럽게 벌어지면 세 후보의 단일화를 위한 한나라당 경선판이 혼란 속에 빠지게 될 것이다. 상황에 대비하지 못한 후보들이나 강재섭 대표의 리더십이 이런 혼란 상황을 적절하게 수습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결국 이명박·박근혜·손학규 후보가 조정도 못해 보고 따로따로 출마하지 않을까.
또 열린우리당 통합신당 논의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노대통령의 영향권 속에 빨려 들어가 조기 대선의 후보자를 물색하지 않을까. 노대통령은 준비해둔 ‘경상도 후보’ 카드를 꺼내 들어 김대중 전 대통령과 연합전선을 펴며 대선 운동에 나서지 않을까(노대통령이 하야하면 그는 합법적으로 선거 운동을 할 수 있게 된다).
결국 조기 대선판을 형성하고, 개헌 이슈와 임기 포기로 판의 주도권을 쥐며, 한나라당 유력 후보의 ‘따로 출마’를 유도하고, 자신의 영향력 아래 경상도 후보를 내세워 승부를 겨루겠다는 그런 복안을 노대통령이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노대통령은 1월11일 기자회견에서 “임기 단축은 하지 않겠다. 내가 임기 단축을 하겠다고 하면 (한나라당이) 찬성하려다가도 안 하겠지요. 개헌이 부결되면 제가 임기를 그만두게 되니까 당연히 부결시키고 선거를 빨리 하고 싶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믿어도 될까?
노대통령 행동 양식에는 특유의 ‘장의 논리’가 발견된다. 원칙을 지키고 목표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말과 행동이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사고 방식이다. 매우 전략적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대통령 직을 내던질 수 있음을 비춘 사례만도 다섯 손가락으로 꼽기에 부족하다. 임기 단축을 않겠다고 했다가도 상황이 바뀌면 하야 선언을 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헌법 70조 원 포인트 개헌’에 대해서는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가 ‘개헌 총대’를 메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었다. 원 포인트 개헌이란, 실패한 대통령이 더 이상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 5년 단임제 딱 한 조항만 개헌하자는 제안이었다.
다만 개헌 요구를 노무현 대통령이나 열린우리당이 하면 정략성 논란이 일 수도 있기 때문에 한나라당이 앞장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한나라당이 ‘선점’ 놓친 것은 실책


 
만일 한나라당의 강대표 주도로 4년 중임제 개헌안이 추진되었더라면 지금쯤 개헌 작업이 끝나 아주 정상적으로 대선 정국을 맞이했을 것이다.
여당은 원래부터 개헌에 찬성하는 쪽이었고, 집권 가능성이 높은 한나라당이 이해득실로 따져서도 손해 볼 것이 없으며, 무엇보다 흥행과 선거판의 주도권을 노대통령 쪽에 넘겨 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한나라당이 이를 간과한 것은 전략적으로 큰 실책이었다.
이제 노대통령은 한나라당의 그 실책을 파고들어 개헌 이슈로 ‘민심 구도’를 잠식하고, 하야 카드로 후보 단일화를 어렵게 만들고, ‘정당 구도’를 자기 쪽에 유리하게 만들며, 경상도 후보를 내세워 ‘지역 구도’의 이점을 선점하려 할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그는 ‘흥행’의 중심에서 드라마를 연출하려 하고 있다.
추상적인 관념과 무능, 패 가름과 막말 통치로 나라를 어렵게 만들었다는 비난을 받아 10% 지지율을 겨우 유지하고 있는 노대통령에게 정치적 재기 가능성을 열어준 것은 역설적으로 한나라당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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