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뒤의 '드골 그림자'
  • 김행 편집위원 ()
  • 승인 2007.01.19 10:2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민과의 소통 중시' 닮은꼴...관련 서적 탐독 후 독특한 리더십에 심취

최근의 노무현 대통령에게서 프랑스 드골 대통령의 흔적이 발견된다. ‘이기주의, 오만, 냉담, 교활’로 대표되는 ‘골리즘’과 “할 말은 하겠다”라며 전방위로 전투에 나선 노대통령의 모습이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드골은 강한 개성의 ‘골리즘’을 바탕으로 군사 작전을 방불케 하는 정치 투쟁으로 일관했고, 자신의 이익에 위배된다고 생각하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투쟁에 몰입한 이단의 지도자였다. 그런 드골을 노대통령이 사부처럼 존경하고 그의 리더십에 심취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 모른다. 대통령 재임 중 미국의 냉전주의에 등을 돌리고 반미에 가까운 독자 노선으로 일관한 점도 닮은꼴이다.

 
대통령 연임제 개헌을 들고 나온 노대통령이 개헌이 불가능해질 경우 중도 하야할 가능성에 대해 정치권이 초점을 맞추는 이유도 드골에게서 찾을 수 있다. 물론 노대통령과 드골은 유사하다기보다 다른 점이 훨씬 많다. 드골은 냉철한 반면 노대통령은 격정적이다. 풍기는 인품과 품격에도 차이가 있다. 반미도 드골은 국제 사회에서 프랑스의 지위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노대통령의 반미는 얻은 것이 별로 없다. 다만 드골이 11년간 장기 집권하며 위기의 순간마다 ‘국민과의 소통’을 무기로 국민투표에 승부를 걸었다는 점에서 노대통령에게 암시를 주지 않았겠느냐는 얘기다. 드골은 1968년 혁명으로 프랑스 사회가 흔들리고 자신의 리더십이 크게 훼손되자, 1969년 4월 자신의 재신임을 내걸고 지방행정 개혁과 상원 개편을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쳤으나 개헌안이 부결되자 1969년 4월 미련 없이 하야하고 향리로 돌아갔다.

책 저자, 청와대 입성 후 초고속 승진


노대통령의 드골 심취는 드골이 즐겨 사용한 ‘국민과의 직접 소통’에 근거를 두었다는 분석이 적지 않다. 의회 권력의 ‘탄핵’에 의해 ‘합법적’으로 권한을 박탈당했던 노대통령으로서는, 국민과의 직접 소통을 통해 자신의 리더십을 강화했고 소통이 힘들어지자 미련 없이 떠난 드골 대통령에게 경도될 수밖에 없었을지 모른다. 실제로 노대통령이 드골에 집착하기 시작한 시기는 2004년 헌정 사상 최초의 탄핵 사태에 직면해 청와대 관저에서 칩거하다시피 할 때다. 시작은 2003년 6월, 당시 외교부 심의관을 맡고 있던 이주흠 현 외교안보연구원장이 집필한 <드골의 리더십과 지도자론>을 손에 쥐고부터라고 한다. 이 책에 흠뻑 빠진 노대통령은 ‘리더십 비서관’이라는 직제를 신설해 이심의관을 청와대로 불러올렸다. 이심의관은 2004년 5월 이후 2년7개월 만에 3급에서 외교안보연구원장이라는 차관급으로 세 단계나 뛰어오르는 초고속 승진을 했다. 드골을 빼면 설명이 안 되는 파격이다. 저자인 이외교안보연구원장은 드골에 대해 “샤를 드골 대통령은 항상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이단(異端)’에 도전했던 지도자였다”라고 평가했다.
노대통령이 1월11일 “개헌과 관련해 임기 단축은 없다”라고 언명했지만 정치권에서 반신반의하는 이유는 바로 노대통령을 사로잡은 드골의 ‘이단’ 때문이다. 만약 노대통령이 개헌에 승부를 걸고 좌절할 경우 하야할지 하지 않을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노대통령이 드골의 전철을 밟는다면 그 결과는 드골과 극히 상반되는 평가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
드골은 지금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라 존경받고 있기 때문이다. 

김행 편집위원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