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현대사 문제를 입에 올리는 것은 옳지 않다"
  • 조규석(언론인) ()
  • 승인 2007.01.19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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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석 (언론인)

 
지금 한국 사회에서 가장 두드러진 기류의 하나는 이념 분화라고 할 수 있다. 보수와 진보는 각각 ‘개혁적 보수’ ‘실용적 진보’ 등으로 그 개념을 분식한다. 보수의 다른 이름인 우파는 뉴 라이트로, 진보의 다른 이름인 좌파는 뉴 레프트로 다시 분화하고 중도는 중도 우파, 중도 좌파로 갈린다. 실로 이념의 춘추전국 시대, 아니 이념 과잉 시대이다.
모든 가치가 이념을 기준으로 재단된다. 사회적 갈등도 거기서 연유하고 어쩌면 다양성도 거기서 기인한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하여 우리의 현대사도 어떤 이념의 잣대로 가늠하느냐에 따라 ‘영광’과 ‘치욕’이라는 양극으로 해석된다. 역사학자이면서 사회개혁 운동에도 앞장서고 있는 정현백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성균관대 교수)를 만나 이념 과잉 시대의 한국 사회에 대한 ‘해설’을 들어보았다. 그는 현대사에 대한 해석이 정치적 쟁점이 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강조했다.

역사학자, 좌파 이론가, 사회 개혁·여성 운동가 등 활동 영역이 다양하다. 어느 쪽에 중점을 두고 있나?

지금은 여성운동 쪽이다. 한국의 여성 인권은 지난 10여 년간 많이 개선된 편이지만 비정규직 문제를 포함해서 ‘빈곤의 여성화’(Feminization of Poverty)가 여전히 심각한 과제로 남아 있다. 빈곤층의 절대 다수가 여성이다. 여성의 빈곤 문제는 온전히 여성 운동만으로 풀 수 없다는 점에서 여성운동과 사회개혁 운동이 만날 수밖에 없다.

노무현 정권 창출의 주역인 386 세대는 아니지만, 1980년대를 어떻게 통과했으며, 그 경험이 이념·사상 체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나는 1970년대 ‘위수령 세대’이다. 대학 시절 4년을 거의 휴강 상태 속에서 보냈다. 그러니 70년대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젊은 시절에 겪었던 시대적 경험, 유학을 떠난 것에 대한 지식인으로서의 부채 의식 등이 머릿속에 뿌리박혀 있다. 물론 학자가 나의 주된 역할이지만 1970년대부터 우리가 추진했던 사회 개혁에 동료들이 많이 희생되었고 고통받았기 때문에 지식인으로서 그것에 대한 빚 갚음 의식이 있다.

그런 견해에서 보는 노무현 정권에 대한 시각은 어떤가? 노무현 정권의 정책 운영이라든가 국정 기조를 386 세대의 이론과 연결시켜 친북·반미·좌파 정권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이념 대립의 양상을 지켜보노라면 당황스러운 것이 있다. 북한에 대한 시각이 이념적으로 좌·우의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 때문이다. 이념을 얘기할 때는 보편성, 즉 전반적인 기준을 가지고 평가해야 한다. 북한에 대한 입장을 가지고 좌나 우를 가리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북한 체제는 좌나 우에 맞지 않는 상당히 예외적인 정치 체제이기 때문이다.


부동산 문제 등 경제 정책 면으로만 파악해도 좌파적 성향이 짙다. 분배 우선이며 규제 위주이고 큰 정부 지향이다. 그런 측면에서 좌파 정부라고들 하는데?
좌파 정권이라고 말하려면 독일 사민당 정도까지는 가야 한다. 하지만 실제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정책은 워낙 낮은 단계이기 때문에 아직 갈 길이 멀다. 부동산 정책이 최근에 규제 위주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부동산 가격 폭등에 대한 당혹감에서 온 단기적 정책이지,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정책은 사실 나와 있는 게 없다.  좌파 정책이라기보다는, 일관성이 없어 실패한 정책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애초에 부동산 정책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즉 좌파적 개념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부동산 가격이 폭등한 것이 아닌가?
물론 부분적으로 한 요인이 되었다. 하지만 보다 구조적으로 보면 돌아다니는 500조원의 돈을 달리 투자할 곳이 없는데, 대통령의 정제되지 않은 발언 등으로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고 사회가 불안하니 투자처를 찾는 돈이 요동치는 것이다.


좌파 정책 때문에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다는 견해도 있는데?
중산층이 무너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정책의 실패이긴 하지만 좌파 정책 때문은 아니다. 세계화라는 것이 전세계를 하나의 네트워크 안에 넣었지만 그 안에서 양극화는 더 심해졌다. 그런 국제 환경에서도 개혁을 통해 양극화와 중산층 몰락을 막아야  했는데 노무현 정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좌파 지식인 사이에 ‘변혁적 중도 세력 통합’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은 대선을 의식해서 올드 레프트가 중도로 포장하려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렇게 보지 않는다. 첫째로 이데올로기란 것은 주어진 현실적 조건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다. 과거의 진보 세력이 표방하던 것이 지금의 현실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 지금 정치의 민주화는 혼란스러울 정도로 많이 실현되었다. 경제의 민주화도 마찬가지다.  이런 변화의 과정 속에서 한국 시민 사회는 빠르게 성장했다.  과거처럼 좌·우·중도를 가르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노무현 대통령은 광복 후 남북·좌우 합작 실패가 민족의 좌절(8·15 경축사)이라고 말하고 6·25를 내전이라고도 했는데?
현대사에 대한 해석이 자꾸 정치적 쟁점이 되거나 언론이 이를 확대 보도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대통령이 이 문제를 자꾸 입에 올리는 것은 좋지 않다. 전문 역사학자들에 의한 면밀한 학문적 연구,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회적 합의를 거쳐야 한다. 6·25는 북의 남침에 의해 시작되었고 국제전으로 확전되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사회적 발언’을 통해 6·25를 ‘통일 전쟁’이라고 한 송두율 교수에 대해  연민을 담은 칼럼을 쓰지 않았나?
송두율 개인에 대한 인간적 연민이라기보다는 분단 사회에서 살아가는 지식인의 운명에 대한 연민이라 할 수 있다. 송두율의 해석에 동의한다는 것은 아니다. 송두율은 분단 상황 하에서 정치 세력에게 이용당하면서 결과적으로 자신을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젊었을 때 (그런 상황에)  한번 빠져들어서 스스로 모순을 만들어낸 측면이 있다.

노무현 정부의  모든 과오는 근본적으로 우리 근·현대사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서부터 연유했다는 견해가 있다.
독일에서는 나치 때 문제뿐 아니라 통일 후 동독 정권과 야합한 세력에 대한 과거 청산도 대두됐다. 과거 청산 작업은 이 정부의 약체성으로 볼 때 대단히 힘든 일이었는데 좀더 신중했어야 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역사를 보는 시각은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1987년까지의 역사가 군부 독재, 인권 탄압의 역사인 것은 부정할 수 없고, 동시에 경제 성장이 이루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경제 성장이 박정희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경제 성장의 시기에 땀 흘려 일한 노동자의 공을 인정해야 한다.

산업화 연대에 노동자들의 역할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박정희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이룩한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이 가능했을까?
박정희의 리더십은 양면적이다. 민주주의를 희생시켰고 오늘날까지 사회적 갈등의 요소를 많이 남겨놓았다. 박정희 향수는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과거의 일부이어야 한다. 그것이 현실 정치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 상황은 경계해야 한다.


우리나라 역사 교육의 문제점을 자주 지적해 왔는데?
교과서는 한쪽의 입장에서 서술해서는 안 되고, 국민 다수가 합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서술되어야 한다. 팩트의 왜곡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국민적 합의를 만들어야 한다. 검정 교과서에서 편향된 주관을 배제할 수 있는 시스템 마련이 긴요하다.

교과서는 아니지만 <해방 전후사의 인식>과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은 우리 현대사를 현저하게 다른 시각으로 해석했다. 역사  교과서에도 그런 차이가 드러난다. 모두 팩트에 문제가 있나?
문제가 있다. 팩트의 ‘배분’이 어떻게 되느냐도 중요한 문제다. 가령 1960년대~1980년대 역사에 있어 경제 성장의 측면, 민주화 운동의 측면, 국민 일상 생활의 측면 등은 다 팩트지만 그런 것을 균형 있게 배분해야 한다.

듣기에 따라서는 ‘공자 말씀’인 셈이다. 현실적으로 선택을 한다면?
(여기서 목소리가 커졌다) 선택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 독일의 경우 사민당이 집권하는 지역에서는 진보적 교과서를 쓰고, 보수당이 집권하는 지역에서는 보수적 교과서를 쓰지만 내용에 편차가 심하지 않은데 우리는 편차가 심하다.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그것을 지역이나 학교가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우선은 학자의 노력이 필요하고, 둘째로 이것이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 역사 교과서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역사 교사들, 역사가들, 시민 사회들이 다 발언해야 한다. 

 당신은 6·15 공동선언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지금의 안보 현실을 위기라고 보는 사람들은 그것이 6·15 선언의 연방제 문서화 탓이라고 주장한다.
내가 6·15 선언을 중요시하는 이유는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제 상황에 어려움이 있다고 하더라도 북한을 벼랑 끝으로 몰고 가면 어떤 극단적 결단이 나올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있다. 물론 북한 핵 부분에 있어 우리 시민운동 쪽은 한반도 비핵화의 입장이 명확하다. 미국이 다른 것은 양보 못하더라도 금융 제재 부분을 좀 풀어준다면 북한은 6자 회담의 틀에 복귀할 것이라고 본다.

북한이 먼저 핵을 포기한다면 금융 제재가 풀리는 것 아닌가?
북한이 협상력을 잃는다. 양쪽이 조금씩 양보해야 한다.

결국 우선 순위의 선택 문제다. 제재냐 지원이냐는.
지원을 끊어서는 안 된다. 북한이 양보를 하고 나오면 좋지만 우리는 극단적 결과를 예상해야 한다. 우리의 인도적 지원이 북한의 극단적 선택을 예방하는 것이다.

그런 논리로  김대중 정부 때부터 10년간 지원해 오지 않았나.
북한 내부에서 인민들이 이미 변하고 있다. 북한 시장에 가면 차츰 자본주의적 역동성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 그러한 변화가 전적으로 남한의 지원 덕분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기여한 면이 있다. 중국이 북한을 돕는다고는 하지만 실질적 도움은 남한에서 온다는 것을 북한 주민도 알고 있다.

6·15 공동선언 남측위원회 여성본부 상임대표를 하면서 북한 탁아소 설치 등을 제안했다. 
북한 주민을 직접  접촉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지원 방식의 대안이 될 수도 있겠다. 맞다. 그것이 대안이다.

올해 대선이 있다. 정치권, 특히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노동당에서 도움을 청한다면?
내가 이념적으로 한나라당보다는 민노당이나 열린우리당에 가까운 게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한국여성단체연합 공동대표로서 지금까지 정치적 중립을 표방해 왔다. 올해에도 정치적 중립을 견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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