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남자 사이에서 길을 찾다
  • 김범석(JES 기자) ()
  • 승인 2007.01.19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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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허브>

김범석 (JES 기자)

 
지난 1월11일 개봉한 <허브>(허인무 감독)는 결핍과 핸디캡을 소재로 한 감동작이라는 점에서 <말아톤>의 연장선상에 있는 영화다. <말아톤>이 자폐증을 앓는 초원(조승우)의 성장을 그린 영화라면 <허브>는 7세에서 지능이 멈추어 버린 스무 살 처녀 상은(강혜정)의 얘기다. 물론 뇌성마비 장애인의 사랑을 그린 <오아시스> 같은 영화도 있었지만, 한때 금기시되어 온  장애인 영화가 충무로의 새로운 이야깃거리로 각광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아톤>과 <허브>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바로 엄마다. <말아톤>에서는 김미숙이, <허브>에서는 배종옥이 각각 심금을 울리는 모정 연기를 펼쳐 관객의 감정 이입을 돕는다. 노희경 작가의 페르소나이기도 한 배종옥은 투병하는 초췌한 엄마를 연기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학대해 움푹 패인 눈을 만들었을 만큼 놀라운 열정을 보여주었다.
미도(<올드보이>)·여일(<웰컴 투 동막골>)·최홍(<연애의 목적>) 등 전작을 통해 간단치 않은 캐릭터를 보란 듯이 자기 것으로 체화해낸 강혜정도 왜 감독들이 그녀를 선택하는지 실감하게끔 해주었다. 자칫 오버할 수 있는 장애인 연기를 강혜정은 부족하거나 넘치지 않게 완급 조절하는 노련미까지 보여주었다. 자꾸 그녀에게 한국 영화를 부탁하고 싶어지는 이유다.
남편을 잃고 꽃집을 운영하는 엄마(배종옥)에게 외동딸 상은은 인생의 전부다. 스무 살 생일을 맞은 딸을 위해 동네 꼬마들을 초대해 축하 파티를 열어주고, 누가 바보라고 놀리면 팔뚝을 물어버리라고 말하는 강단 있는 엄마다. 표현은 안 하지만 <말아톤>의 김미숙처럼 상은이 엄마의 소원도 ‘딸이 나보다 하루 먼저 죽는 것’이다.


‘20세 꼬마’의 꿋꿋한 시련 탈출기


 
영화는 “나한테 병이 생기면 하느님도 부처님도 없는 것이다”라던 배종옥이 덜컥 말기 암 판정을 받으면서 제 속도를 내기 시작한다. 이런 속내를 알 리 없는 상은에게 엄마는 자전거를 배우게 하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기만 하면 된다고 입버릇처럼 강조한다. 엄마만 아는 이별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한편 상은은 엄마가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왕자님 외모의 의경 종범(정경호)을 만나 짝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날부터 그의 머릿속은 종범으로 가득 차고, 심장은 24시간 두근두근 모드로 바뀐다. 종범도 어수룩한 말투의 상은을 국제 변호사로 착각하고 데이트를 즐긴다. 그러나 상은의 정체를 알게 된 종범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반전을 맞는다.
<허브>는 죽음을 앞둔 엄마와 난생 처음 좋아하게 된 남자 사이에서 자칫 길을 잃을 뻔한 상은의 자아 찾기 영화다. 심리적 방황과 혼돈을 겪던 이 소녀는 꿋꿋하게 자기 힘으로 시련에 맞선다. 허브와 삶은 달걀 노른자를 좋아하는 상은이 이제 장미와 달걀 흰자를 더 좋아하는 엄마를 이해하고 온전히 껴안게 된 것이다.
정신지체는 말 그대로 지능이 어느 한 지점에 멈춘 것일 뿐 언제든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다는 감독의 따스한 시선이 곳곳에 배어 있다. <작업의 정석> 등을 집필한 김근철 시나리오 작가의 초고에서는 상은과 7세 남자 꼬마의 사랑을 그렸지만 각색 과정에서 남자 주인공이 의무 경찰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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