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고립됐다 고로 불행하다
  • 정락인 편집위원 ()
  • 승인 2007.01.30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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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터민 정착 르포/남한 사람들의 차별, 배타성이 문제
 

지난 1월22일 오후. 서울 양천구 신정동 푸른마을 아파트. 푸른마을은 바로 옆에 산과 임야가 어우러져 있어 전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이 아파트 1단지에는 2백50여 명의 새터민이 살고 있다. 1단지는 도시 저소득층이 집중 거주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날 아파트 단지는 의외로 조용하고 한산했다. 오고 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뜸했다. 아파트를 올려다보아도 인기척이 거의 없어 보였다.
한참을 서성거리다가 급하게 단지를 내려오는 40대 중반의 여성을 붙잡고 말을 걸었다. “아주머니, 여기가 새터민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 맞나요?”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는 “예, 그런데요”라는 짧은 대답만을 남긴 채 쏜살같이 사라졌다. 억양을 보아하니 새터민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자꾸 뒤를 돌아보며 경계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그 뒤 새터민으로 보이는 몇몇 사람과 대화를 시도했지만 매번 똑같은 모습으로 접촉을 꺼렸다. 처음 가졌던 호의는 이내 거리감으로 다가왔다. 두터운 장벽 하나가 놓여 있는 것 같았다.
아파트 단지 내를 서성거리다가 인근 슈퍼마켓으로 발길을 돌렸다. 진열대에서 음료수 캔 하나를 꺼내 들고 주인에게 말을 건넸다. “1단지에 새터민들이 많이 산다고 들었는데 별로 보이지 않네요?” 슈퍼마켓 주인의 말은 의외로 간단했다. “아, 낮에는 집에 사람이 없으니 당연하죠. 다들 일하러 나갔어요.” 새터민의 취업률은 15%를 약간 넘는 정도다. 쉽게 말해 10명 중에 8명은 일자리가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새터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모두들 어디에 간 것일까. 그 이유는 나중에야 알 수 있었다.
발걸음을 돌려 인근의 학마을을 찾았다. 이곳은 양천구 내의 새터민 정착촌 3대 구역 가운데 하나다. 학마을도 푸른마을과 마찬가지로 아파트 단지 내에 인기척이 별로 없었다.
길 가는 60대 할머니를 붙잡아 말을 걸었다. 할머니는 새터민이 아니었다. “할머니, 여기에 새터민이 많이 사는데 이웃으로 사는 게 어떤가요?”라고 물었다. 할머니는 대뜸 “북에서 온 사람들은 상전이야. 직업도 없고 일도 안 하는데 나라에서 생계급여인지 뭔지를 주니까 편하게 놀고 먹지.” 새터민이 큰 ‘특혜’라도 받는 것처럼 여기는 낌새였다.
순간 새터민과 일반인의 괴리감·단절감·거리감이 느껴졌다. 새터민들이 남한 사회에서 가장 힘든 것이 ‘탈북자들을 바라보는 시선과 차별’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배달·청소 등 일용직으로 일해


 
국내에 정착한 새터민들의 정신적 쉼터인 신월6동 평화통일교회를 찾았다. 마침 외출했다 막 돌아온 강철호 전도사가 반갑게 취재진을 맞이했다. 강전도사는 1997년 남한에 정착한 새터민 출신이다. 2004년 12월에 교회를 세웠고, 그때부터 새터민들의 자립과 정착을 위한 삶을 살고 있다.
평화통일교회에는 날마다 교회에 나오는 새터민들이 있다. 북한에 두고 온 가족과 형제들을 위해 틈나는 대로 기도를 한다는 것이다. 이날도 교회에는 어린 학생들이 섞인 새터민 가족들이 기도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이들은 교회를 찾는 새터민들에게 상담도 하고 말벗도 되어준다고 한다. 평화통일교회가 새터민들의 정신적 쉼터가 된 이유를 알 수 있게 하는 광경이다.
평화통일교회가 문을 열자 양천구는 물론이고 인근의 강서구에서까지 새터민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1년여 만에 신도가 60여 명으로 늘어났고 지금은 4백명이 넘는다.
새터민들이 한국 생활에 적응하기까지는 3년, 자립하는 데는 5년은 족히 걸린다는 것이 강전도사의 말이다. “정부는 정착금만 주면 다 된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살 수 있는 자립 기반이 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새터민들이 편법으로 취업을 하고 있다. 소득이 신고되지 않는 일용직·배달직·청소직 등에서 일하는 것이다.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과 전문 직업교육, 그리고 기업체의 열린 경영이 새터민을 살릴 수 있다.”
오후 7시가 조금 넘어서 교회를 나왔다. 다음 목적지는 강서구 가양동 가양9단지 아파트. 강전도사의 소개로 새터민 가정인 최연옥씨(49) 집을 찾았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15평 남짓한 공간에 살림살이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기자가 찾았을 때 최씨는 협탁에서 성경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딸 김연화씨(24)는 막 퇴근해서 집에 들어왔다고 한다. 연화씨는 현재 서울예전 실용음악과에 재학하면서 평양예술단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들 철림씨(22)는 서강대 법학과에 재학 중인데 영어학원에 다니느라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집에 돌아온다고 했다.
최씨에게 북한을 탈출하게 된 배경과 남한에서의 정착 과정을 물었다. 최씨 모녀는 1998년에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들어갔다고 한다. 2년8개월간 중국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숨어 살았다. 한국에 들어온 것은 2000년 5월. 당초 한국행을 생각하지 않았다가 조선족의 권유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최씨는 하나원을 나오자마자 한국을 알고 싶어서 제주도를 시작으로 1주일 동안 전국을 일주했다. 2002년에는 북한에 남아 있던 아들을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브로커를 통해 생사를 확인한 것이 적중했다. 최씨의 남편은 북한에서 행방불명 상태다.
한국에서의 정착 과정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첫째 시련은 취업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붙은 ‘병원 급구’라는 전단을 보고 한 병원에 연락해 면접을 봤다. 북한에서 왔다고 하니 기다리라고 하더라. 그런데 10일, 15일, 40일을 기다렸는데도 연락이 없었다. 그래서 따졌다. 그랬더니 병원 관계자가 ‘북한 사람은 고려 대상’이라며 취업시킬 수가 없다고 했다. 참 기가 막히더라.” 그 뒤에도 몇 군데 취업문을 두드렸지만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최씨는 취업에 어려움이 있자 창업을 결심했다. 단맛이 강한 한국 고추장에 맞서 북한 고추장 맛을 그대로 살린 개량식 고추장을 아이템으로 삼았다. 오랜 개발 과정을 거쳐 지난해 11월14일 평화통일교회 1층에 ‘고추장 공장’을 개업했다. 교회 신도들 사이에 입소문이 퍼지자 주문이 밀려들었다. 언론에도 소개되었다. 지금은 새터민 종업원 3명을 둘 정도로 사업이 번창하고 있다. 최씨도 새터민에 대한 남한 사회의 뿌리 깊은 차별을 지적했다. “새터민들은 중국이나 제3국을 거쳐 입국하기 전까지 수년간 악몽 같은 도피 생활로 인해 대부분 건강이 좋지 않다. 동정해달라는 말이 아니다. 제발 말만 하지 말고 가슴으로 ‘형제’로 받아주었으면 한다.”
최씨와 같은 동에는 하나원에서 나온 지 4개월이 채 안 된 김 아무개씨(75)가 손자 둘과 정착해 살고 있었다. 살림살이라고 눈에 띄는 것은 냉장고와 텔레비전과 구멍이 숭숭 뚫인 붙박이장이 전부였다. 북한에서 얻은 관절염 때문에 거동도 불편해 보였다. 김씨는 기자를 보자마자 브로커한테 지급하지 못한 돈을 걱정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서 돈 내놓으라고 협박한다. 주긴 줘야 하는데 돈이 없으니 줄 수가 있어야지….” 김씨는 북한에 있는 큰아들 걱정 때문에 말을 아꼈다.
새터민들은 그냥 평범하게, 남한 사람들과 이웃처럼 어울려 살기를 소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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