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국은 더이상 울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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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2.12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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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력, 체력, 기술, 경험 '최전성기'...프리미어리그 안착 가능

'한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봄부터 소쩍새는/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천둥은 먹구름 속에서/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미당 서정주의 시 <국화 옆에서>의 한 부분이다. 이동국 선수(28)의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미들즈브러 입단에 가장 어울리는 시구이기도 하다.
1979년생으로 이제 겨우 스물여덟. 많지 않은 나이지만 이동국은 구름 위를 걷는 듯한 정상의 환희와 더 이상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좌절을 반복해서 경험했다. 그리고 이제 그의 축구 인생은 또 다른 전환점에 놓여 있다. ‘이제는 돌아와’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라는 ‘거울 앞에 선’ 그는 서정주의 ‘국화’ 같은 탐스러운 꽃을 피워낼 수 있을 것인가.


영광만큼 큰 시련 겪은 천재


 
한국 축구팬이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8년 마르세유 벨로드롬스타디움에서 열린 프랑스월드컵 네덜란드와의 조별 리그 2차전. 0-3으로 뒤진 후반 32분 차범근 감독은 서정원을 빼고 이동국을 투입했다. 역전을 노린 카드라기보다는 “어린 유망주에게 월드컵 무대를 경험하게 해주는 게 장기적으로 한국 축구에 도움이 된다”는 차범근 감독의 배려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동국은 통렬한 슈팅을 시도하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0-5로 참패하고 차범근 감독을 월드컵 경질로 내몬 네덜란드전에서 한국이 올린 유일한 소득은 이동국의 발견이었다. 그날 이후 그는 이회택-차범근-최순호의 맥을 잇는 한국의 특급 스트라이커 계보 자리에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축구는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듬해 설기현·이영표·김은중 등과 함께 나이지리아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선수권에 출전했지만 조별 리그에서 탈락했다. 2000년 레바논에서 열린 아시안컵에서는 무릎이 좋지 않은 가운데에서도 투혼을 발휘하며 득점왕에 올랐지만 팀은 3위에 그쳤다. 축구계에서는 “이동국이 청소년 시기에 비해 기량 발전이 더디다. 예전만큼 훈련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라는 비판이 나왔다.
2000년 아시안컵 득점왕에 오르는 활약을 발판으로 이동국은 2001년 1월 독일 분데스리가 베르더 브레멘에 진출했다. 그러나 준비가 부족했다. 부상 후유증이 남아 있었고 언어 문제로 인한 독일 선수·코칭스태프와의 의사 소통에도 문제가 있었다. 결국 이동국은 6개월 동안 고작 6경기에 출장해 1어시스트만 기록하고 친정팀 포항으로 U턴했다. 적지 않은 상처를 안겨준 실패였지만 이는 앞으로 다가올 좌절의 전주곡에 불과했다.
복귀 후에도 팬들의 기대치를 채우지 못하더니 결국 2002 한·일월드컵 최종 엔트리 23명에서 제외되었다. 한국 최고의 스트라이커라는 자부심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던 이동국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붉은 물결이 한반도를 뒤흔든 2002년 6월 이동국은 축구를 피해 친한 친구 몇몇과 여행을 다녔다. 이동국은 “도저히 월드컵을 볼 수 없었다. 나 때문에 친구들도 월드컵을 보지 못했다”라고 당시의 좌절을 추억한 바 있다.


“이동국에게 적응 시간 3개월은 줘야”


 
늘 자기보다 한 수 아래로 여겼던 동료들이 월드컵으로 병역 면제 혜택을 보았지만 이동국은 병역을 피할 수 없었고, 2003년 초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군대 가야 사람된다’는 진부한 고정관념은 최소한 이동국에게는 진실이었다. “군대에서는 특별 대우란 것이 없었다. 나는 다른 누구와 똑같은 존재였다. 상무에서의 경험을 통해 축구가 전보다 더 소중해졌고 축구 선수라는 게 감사했다”라는 것이 이동국의 군 제대 소감이었다.
이동국은 2005년 군 제대 후 다시 월드컵에 대한 꿈을 부풀렸고 이번에는 아드보카트 감독의 평가도 좋았다. 그러나 2006년 4월 이동국은 K리그 인천전에서 오른쪽 무릎 인대 파열이라는 중상을 당했다. 부상의 이유는 어이없게도 컨디션이 너무 좋아 자신을 과신한 나머지 한도를 넘어선 플레이를 펼쳤다는 것이다. 독일 스포렉에서 정밀검사 결과 수술과 재활을 위해 6개월 이상의 기간이 필요하다는 진단이 떨어졌고, 월드컵을 향한 열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가장 힘든 훈련은 입에서 단내가 나는 지옥 훈련이 아니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재활 훈련이다. 이동국은 스포렉의 재활 담당 코치로부터 “누구보다 성실하게 재활을 수행했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독일 현지에서 재활 훈련을 하는 동안 월드컵을 치르기 위해 입국한 동료 선수들을 격의 없이 만나 격려하고 16강 실패를 위로하기도 했다. 김현철 대표팀 주치의는 “위로받아야 할 이동국이 동료들을 위로했다. 성숙한 이동국은 앞으로 대표팀의 기둥이 될 자질을 갖췄다”라고 칭찬했다.
성공적인 재활을 마친 이동국은 2006년 10월 포항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으로 돌아왔고, 11월5일 울산전에서 재기의 축포를 터트리며 라이온킹의 부활을 만방에 알렸다. 이천수 안정환 박주영 등이 2006 독일월드컵을 발판 삼아 유럽행을 꿈꿨지만 재활 기구와 씨름한 이동국이 잭팟을 터트렸다.
사우스게이트 미들즈브러 감독은 “이동국은 한국에서 박지성 설기현에 버금가는 스타다. 그의 성공을 확신한다”라고 든든하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그러나 이동국의 성공 여부를 쉽게 예측할 수는 없다. 우선 호주 국가대표 출신 마크 비두카(프리미어리그 6골)와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정상급 스트라이커로 분류되는 야쿠부(프리미어리그 11골)와의 주전 경쟁을 이겨내야 한다.
이동국은 “슈팅만은 누구보다 자신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잉글랜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숨 돌릴 틈 없이 빠른 경기 흐름에 먼저 적응해야 한다”라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스카이스포츠 부편집장 마크 버킹엄은 “최소한 한 달 이상의 적응기가 필수적이며 석 달 정도의 여유를 줘야 한다. 팬들도 이동국의 활약을 재촉해서는 안 된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독일에서 실패했던 당시와 비교해보면 이동국은 많은 점에서 달라졌다. 그는 나이가 들고 결혼을 하고, 굴곡을 겪으며 정신적으로 강해졌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다. 육체적으로도 부상 후유증을 안고 있던 당시보다 지금이 오히려 더 낫다.
또 여러 차례 경험한 실패가 그에게는 커다란 정신적 자산이 될 수도 있다. 축구 선수에게 27세부터 30세는 체력과 경험이 조화를 이루며 가장 눈부신 활약을 펼치는 시기다. 이동국에게는 일단 ‘국화꽃’을 만개할 수 있는 더 없이 좋은 조건이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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