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가 놀란 '빙판의 기적'
  • JES 제공 ()
  • 승인 2007.02.12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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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링 남녀 대표팀, 아시안게임 우승...최악의 여건에서 최고 성적 일궈

 
지난 2월1일 중국 창춘시립 스케이팅 링크. 2007 창춘 동계아시안게임 한국과 일본의 남자 컬링 결승전이 막판까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접전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10엔드까지 마친 결과 2-2 동점. 이제 승부는 연장전으로 접어들었다.
일본의 선공으로 시작된 연장 1엔드. 한국의 스킵(주장)을 맡고 있는 이재호(31·강원도청)가 신중하게 돌(스톤)을 던지자 동료 선수들이 일제히 얼음을 닦아내면서 돌의 방향을 잡았다. 마침내 한국이 던진 스톤이 일본의 스톤을 밀어내고 하우스(원 안의 표적지) 중앙에 자리 잡자 전광판에는 3-2의 스코어가 선명하게 찍혔다. 남자 컬링이 2003년 아오모리 동계 아시안게임에 이어 대회 2연패를 이루는 순간이었다.
곧이어 열린 여자 컬링 결승전에서는 더 기막힌 드라마가 펼쳐졌다. 상대는 역시 일본이었다. 8엔드까지 한국은 2-6으로 크게 뒤져 패색이 짙었다. 남은 기회는 고작 2엔드. 그러나 진짜 승부는 그때부터였다. 9엔드에서 3점을 보태 5-6으로 바짝 추격한 한국은 마지막 10엔드에서 먼저 스톤을 빨간 원 안에 안착시켰다. 일본 선수가 던진 마지막 여덟 번째 스톤은 한국의 스톤을 툭 건드렸지만 밖으로 쳐내는 데는 실패했다. 한국의 7-6 역전승. 기적적인 우승이었다.
컬링은 16세기 이전 스코틀랜드에서 시작돼 유럽인들이 미국·캐나다 등으로 이주한 뒤  스포츠의 한 종목으로 자리매김했다. 1959년부터 매년 세계선수권대회가 열렸지만 한국에는 1998년에야 처음 소개되었다. 한국에 처음 컬링을 보급한 주인공은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강원도청 팀을 이끌고 남자부 금메달을 따낸 유근직 감독(49)이다.
강원도 화천 출신인 유감독은 1991년 일본 유학 중에 컬링을 처음 접한 뒤 1998년 3월 일본 쓰쿠바 대학에서 체육사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면서 ‘컬링 전도사’를 자청하고 나섰다. 그해 여름 강원도 컬링연맹을 조직했고, 2001년 강원도청에 실업팀이 생기면서 초대 감독으로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2003년 아오모리 동계 아시안게임에 경북도청이 남자 대표팀으로 출전해 우승하는 것을 지켜본 유감독은 이후 강원도청을 3년간 국내 남자 대회 우승으로 이끌면서 창춘 대회 출전권을 따냈다.
남녀 모두 아시아 정상에 올라서기는 했으나 국내 컬링 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현재 한국의 컬링 등록 선수는 초·중·고·대학·실업팀을 모두 합쳐 5백여 명에 불과하다. 5만여 명이 활동하는 일본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실업팀은 남자 두 팀(경북도청·강원도청)과 여자 두 팀(전북도청·경기도체육회)이 전부다.


컬링 등록 선수 겨우 5백명


태릉선수촌과 경북 의성 등지에 전용 경기장이 있지만 링크가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빙판의 질이 떨어진다. 빙질 전문 관리사가 없기 때문이다. 큰 대회를 준비하려면 캐나다 등 외국으로 나가 훈련을 할 수밖에 없다.
유근직 감독은 “어려운 환경과 주변의 무관심을 이겨내고 금메달을 따낸 선수들이 자랑스럽다. 한국에도 전용 링크가 있지만 빙질을 관리할 전문가가 없어 연습 효과가 반감되는 게 아쉽다. 이번 우승을 계기로 더 많은 동호인들이 생겼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전북도청팀을 이끌고 아시안게임에 나가 여자부 금메달을 따낸 강양원 대표팀 감독은 “한국의 컬링 수준이 선진국과 점점 비슷해지고 있지만 컬링 훈련을 할 수 있는 곳은 태릉 한 곳밖에 없다. 컬링은 전지 훈련이 필수적이다. 한국보다 늦게 시작한 중국은 1년 내내 해외에서 훈련하며 기량이 급성장했다. 2014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려는 국가답게 실업팀 창단 등 대기업의 지원과 관심이 절실하다”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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