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지 못하는 기마상의 슬픔
  • 정준모 (미술사가·미술행정가) ()
  • 승인 2007.02.26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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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구상 조각의 거장 마리노 마리니 회고전

 
유럽의 고도를 여행하다 보면 어느 곳에서나 기마상을 만날 수 있다. 기마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말의 네 발이 동상마다 다르다. 앞 두 발을 치켜들고 포효하듯 서 있는 기마상은 개선장군을 의미하며, 한 발만 치켜들면 전장에서 부상해 돌아온 장수를 나타낸다. 네 발 모두 가지런하게 좌대를 딛고 서 있는 기마상은 전사한 장수이다.
중세의 전쟁이 종식되고 새로운 무기로 무장한 전쟁을 거치면서도 여전히 기마상을 제작해 우리에게 전쟁의 상흔과 처절했던 살육의 기억을 되살림으로써 현실과 인간의 끝없는 욕구를 반성하게 해주는 작가가 있다. 이탈리아가 낳은 20세기의 걸출한 조소예술가 마리노 마리니(1901~1980)가 바로 그다. 헨리 무어(1869~1958)와 함께 20세기 구상 조각의 쌍두마차라고 일컬어지는 그의 이름은 낯설지만 그렇게 생소하지는 않다.
그런 마리니의 조각품 전시회가 오는 4월22일까지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다. 그는 기마상으로 우리에게 익숙하고 조소예술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자신의  조형적 관심은 색채에서 출발했다고 회고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상흔을 화폭에 담아낸 추상 표현주의적 색채가 확연하게 아름다운 그의 화면은 동명이인의 화가가 그린 것은 아닐까 하는 착각을 일으킬 지경이다.
조소와 회화 두 장르에 넘쳐나는 그같은 재기는 그의 학창 시절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탈리아 북부 토스카나 지방의 작은 도시 피스토이아에서 쌍둥이 여동생과 함께 태어난 그는 피렌체 미술 아카데미에서 회화와 조소를 공부한 후 처음에는 화가와 제도사로 일했다. 1928년 파리에서 조소를 공부하고 ‘민족주의 경향이 강했던 미술가들의 20세기’라는 의미를 가진 ‘노베첸토’ 그룹의 일원으로 작품을 출품하면서 조소예술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는 이탈리아의 전통과 현대를 넘나들면서 조소는 물론 회화와 판화, 과슈와 적잖은 드로잉을 남겼다. 또
 
평생 동안 다룬 소재도 다양해서 그의 대명사처럼 각인된 기마상을 비롯해 이탈리아 북부의 신화에 나오는 정원을 가꾸고 과일을 재배하는 일을 담당하는 포모나(Pomona) 여신, 그리고 서커스하는 사람들이나 무희 등을 다루기도 하는 등 고대 이탈리아의 조각적 전통을 충실하게 따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작품에서 전통적 요소는 사라지고 조형적 질서와 질감을 획득하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는 초기에는 마르티니와 로댕의 영향권에 있었으나 이후 기마상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기마상은 종래의 기마상과는 달리 전쟁에서의 승리를 구가하거나 전쟁에서 전사한 위대한 장군을 기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야만적인 속성과 전쟁의 상흔을 드러내는 형식으로 활용했다. 쓰러진 말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고, 말 잔등에 매달린 소년 기수는 말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모습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그는 자신의 조소 작품에 색채를 사용하기도 하면서 표현 효과를 극대화하고 고대 에트루리아 지방 조각의 전통과 현대적 조형 감각 간의 참신한 결합을 보여준다. 1952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했으며 1940년 이래 밀라노의 브레라 아카데미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이번 전시는 한국에서는 최초로 열리는 거장 마리노 마리니의 회고적 전시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의 조소예술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주제 가운데 중요한 세 가지 테마, 즉 포모나를 중심으로 하는 여인상과 기마상 그리고 그와 교유했던 당대의 중요한 음악 미술인·문화예술인들의 초상 조각을 통해 그의 예술적 가치를 새삼 느끼게 해준다. 
마리니의 조소예술을 관통하는 세 가지 주제
조소예술의 원류라 할 그의 여신상은 풍만한 가운데 한쪽 발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모습을 취함으로써 전통적인 그리스 조소예술의 형식을 차용하기도 한다. 특히 그는 기마상을 통해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남긴 상처와 내적 상흔을 작품으로 승화시키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해 심각하게 되묻는다.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흔한 주제이자 기념 조각의 소재이기도 한 ‘말과 기수’ 시리즈는 형식적으로는 기마상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지만 두 차례의 처절했던 전쟁을 치른 인류의 허탈감과 공허함 그리고 자신에 대한 분노 등이 서로 휩싸면서 가치관은 흔들리고 역사의 모순은 더욱 심화되어가는 부조리한 세상의 한 단면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의 기마상은 1945년을 경계로 확연하게 구분된다. 1945년 이전에 제작된 작품들이 사실적인 동시에 인간
 
과 말의 조화로운 결합과 상생을 보여주었다면 그 이후 말의 표현은 리드미컬한 선으로 간단하게 정리되면서 모더니즘적 일면을 드러내는 한편 더 이상 기수가 말을 제어할 수 없는 분노한 말의 광기 어린, 그러나 외형적으로는 차분한 상태로 분을 삭이고 있는 상황을 표현한다.
이 밖에도 그가 자신과 동시대를 살았던 동료들인 음악가 스트라빈스키, 화가 마르크 샤갈, 시인 장 콕토 등의 유명 문화예술인들을 모델로 하여 제작한 추상 조각은 우리에게 그들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마리니의 조소예술 작품들을 보면 매우 익숙하고 낯익은 느낌을 갖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조소예술은 많은 작가들에게 귀감이 되었고 조형적으로도 다양한 작가들을 그의 영향권 아래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1951년 한국전쟁 중에 이탈리아를 방문한 윤효중은 당시 마리니를 직접 만나 대담을 나눈 바 있으나 그의 작품에서 마리니의 조형적 공감대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권진규의 조소 작품들이 마리니와 매우 유사한 느낌을 준다. 단순한 선과 형태의 간결함은 긴장감을 자아내면서 리드미컬한 동세로 나타난다. 그리고 우수와 비애미가 아울러 묻어난다는 점에서 매우 유사한 느낌을 준다. 또한 민복진의 경우도 기마상과 유사한 형태와 소재를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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