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요 역사 빛낸 ‘별 중의 별’은?
  • 박성명 (KBS TV 주간급 프로듀서) ()
  • 승인 2007.02.26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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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으로 본 한국 가수 계보도/최정상은 이미자, 최고 미성은 남인수

 
1927년 2월16일 호출부호 JODK 경성방송국으로 시작한 한국방송(KBS)이 어느덧 80년의 역사를 쌓았다. 그보다 몇 달 전 레코드판으로 나온 윤심덕의 <사의 찬미>가 우리 대중가요의 출발점이 된 것은 우연일까? 방송과 대중가요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고 방송 80년의 역사는 곧 우리 대중가요 80년의 역사이기도 하다.

방송 80년 최정상 가수는 누구인가:우리나라 대중가요 가수 1호라고 말할 수 있는 <사의 찬미>의 윤심덕 이후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수많은 가수들이 탄생했다.
그중 빼놓을 수 없는 가수를 열거해보면 <애수의 소야곡>을 부른 가요 황제 남인수, <목포의 눈물> 이난영,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의 백년설, <눈물 젖은 두만강>의 김정구,  <신라의 달밤>의 현인, <산 너머 남촌>의 박재란, <초우> <사랑의 맹세(TILL)>의 패티 김, <하숙생>의 최희준, <동백아가씨>를 부른 가요 여왕 이미자, <돌아가는 삼각지>의 배호, <가슴 아프게>의 남진, <사랑은 눈물의 씨앗>의 나훈아, <임은 먼 곳에>의 김추자, <창밖의 여자>의 조용필 등을 우리 가요사에서 지울 수 없는 대스타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중에 최고 가수 한 명만 뽑으라면 누구를 지명할 수 있을까? 워낙 대스타들만 열거해놓아서 선뜻 선택하기 힘들지만 위의 가수들 가운데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가수’라는 평을 받는 사람은 가요 황제 남인수와 가요 여왕 이미자 두 사람뿐이다. 필자는 이 두 사람 중에서도 수많은 히트곡으로 근 50년간 정상의 자리를 지켜온 이미자를 최고의 가수로 선택하고 싶다.

 
미성을 가진 가수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미성(美聲)’이라는 평을 받는 남인수를 제일 먼저 꼽을 수 있다. 가수들 중에 예명을 가장 먼저 쓴 신카나리아도 목소리가 그 이름 속 새의 소리처럼 아름다워서 그 반열에 앞장선다. <토요일 밤에> 김세환, <안개> 정훈희, <당신은 모르실 거야> 혜은이 등도 다시 보기 어려운 미성 가수이다. 정훈희는 몇 옥타브를 오르내리며 최고음을 내는 가수로도 알려져 있다.
열창으로 유명한 가수는:솔(Soul)의 여왕 김추자, <밤이면 밤마다> 인순이, <열애> 윤시내, <J에게> 이선희 등을 꼽을 수 있다. 이같이 열창하는 가수 뒤에 노래 부르는 가수들은 진땀을 흘리기 일쑤다. 엔딩을 장식하는 경우가 많다.
호소력이 짙은 가수는: 불치병으로 생명이 꺼져가는 상황에서도 마이크를 놓지 않았던 <마지막 잎새> 배호, <사랑했어요> 김현식에 필적할 가수가 없다.
저음으로 유명한 가수는: <빨간 구두 아가씨> 남일해, <동숙의 노래> 문주란, <보슬비 오는 거리> 성재희, <석별> 홍민,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하수영 등이 매혹적인 저음의 소유자들이다. 배호의 저음에 매료된 사람들도 많았다.
풍부한 성량을 타고난 가수는:대형 가수라는 별명이 따라다니는 패티김, 훌륭한 성악적 발성을 하는 조영남의 목소리를 따라갈 가수가 없다. 이들은 매력적인 음색도 겸비했다.
특이한 제스처나 춤의 소유자는:김정구 선생이 제스처를 제일 먼저 시작한 가수이다. 당시에는 모든 가수들이 정중한 차렷 자세로 노래를 불렀는데, 그는 손을 앞으로 뻗는 동작과 둥실 춤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코믹한 노래인 만요(漫遙)를 부르던 가수이기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갑돌이와 갑순이> 김세레나의 마이크 돌려 잡기, 남진의 엘비스 프레슬리 복장과 흉내, 김추자의 특이한 솔풍 율동과 스테이지 매너는 팬들을 열광시켰고, <밤차> 이은하의 상하좌우로 손가락 찌르기 , <빙글빙글> 나미의 율동, 박남정·김완선에 의한 댄스 가수 시대 개막은 가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록들이다. <호랑나비> 김흥국의 호랑나비춤도 기억에 남는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감미로운 노래를 불렀던 남인수는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가수라는 평을 받는다.
해외 진출 가수는:이난영의 세 딸인 <김치깍두기> 김시스터즈가 1호로 기록된다. 1950년대 미국에 건너간 이들은 한 번만 출연해도 스타로 뜬다는 <봅 호프 쇼>에 수없이 출연할 정도로 1960년대 미국에서 성공했다.
1960년대에 귀국하며 ‘미니스커트 선풍’을 일으켰던 윤복희와 패티김이 미국 무대에서 활동했고, 남진의 <가슴 아프게>를 일본에서 크게 히트시킨 이성애와 계은숙·김연자 등이 일본에 진출한 가수이다.
한국 가수로 공산권에서 맨 처음 공연한 이는 1988년에 중국 공연을 가졌던 조용필이다.
해외 진출 가요는:해외 진출 가요 1호는 한명숙의 <노란 샤쓰 입은 사나이>이다. 그 뒤를 쟈니 브라더즈의 <빨간 마후라>, 혼성 듀엣 라나에로스포의 <사랑해> 등이 이었다. 주로 동남아에서 인기를 끌었다.
남진의 <가슴 아프게>가 일본에서 크게 히트했고,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등이 한류의 원조로 꼽힌다.
보컬 그룹에서 솔로로 변신한 가수는:김트리오에서 솔로로 나온 조용필이 대표적이다.
키보이스 출신의 윤항기, 히식스 최헌, 템페스트 출신으로 <잊게 해주오>를 부른 장계현, 그룹 시나위에서 베이스 기타를 쳤던 서태지, 희자매에서 변신한 인순이 등이 있다. 키보이스가 우리나라 보컬 그룹의 원조이다.
최초의 메들리 가수는:메들리 가수의 원조는 1980년 <노래의 꽃다발>이라는 메들리 카세트 100만 장 판매 기록을 세운 김연자이다. 그 후 <쌍쌍파티>의 주현미, <사투리 메들리>의 문희옥이 밀리언 셀러 기록을 갖고 있다. 모두 1980년대 작품이고 카세트 테이프였다.
 
팬클럽 가수의 원조는:팬클럽이 제일 먼저 결성된 가수는 남진이었다. ‘오빠 부대’의 원조인 셈이다. 당시의 인기가 하늘을 찔러 팬클럽 참가 희망자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팬클럽 가수의 원조가 남진이라면 영원한 팬클럽을 가진 가수는 조용필이다. 나이가 들어서도 가수에 대한 열정이 꺼지지 않는 팬클럽이다.
1990년대에 <난 알아요>로 큰 인기를 모았던 서태지와 아이들의 팬클럽은 극성맞기로 유명했다. 가수에 대한 뉴스거리가 생기면 인터넷·전화가 몸살을 앓았다.
화제의 금지 가요는:이미자의 <동백아가씨>, 김민기의 <아침이슬>, 김추자의 <거짓말이야> 등이 유명한 방송 금지 가요였다. 송창식의     <고래사냥>도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라는 가사가 불순한 의도로 들린다고 금지되었다. 모두 유신 시절의 일이고 현재는 모두 해금되었다.
쇼 공연을 많이 한 가수는:우리 가요의 황금기였던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유명 가수들이 당시의 극장쇼 전성시대와 맞물려 공연을 가장 많이 했다. 하춘화가 이 부문의 기네스북 기록을 가지고 있다. 남진·나훈아 공연은 리사이틀이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했는데, 리사이틀의 원조 기록은 패티김이 갖고 있다.
요절한 가수들: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차중락,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랑> 배호, <이름 모를 소녀> 김정호, <내 사랑 내 곁에> 김현식, <난 정말 몰랐었네> 최병걸,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하수영, <여고 졸업반> 김인순 등이 국민적 사랑을 받다가 안타깝게 요절한 가수들이다.
이 밖에 몇 가지 주요 기록을 덧붙이면 남진과 나훈아가 라이벌 가수의 상징으로 되어 있고, 국가에서 문화훈장을 최초로 받은 가수는 김정구, 클래식 공연만을 고집하던 세종문화회관에서 최초로 공연을 한 가수는 패티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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