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된다면 양잿물은 못 마시랴
  • 김진경 프리랜서 기자 ()
  • 승인 2007.03.05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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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실업 대란 시대 신풍속도/성형수술, 편입 등 '고달픈 젊음' 보내

 
'○항공 일반직 면접 스터디해요(강남).’ ‘○○항공 면접 보시는 분들 중 스터디 구합니다(상경).’
취업 준비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구직 사이트 ‘취업 뽀개기’(취뽀)에 올라 있는 제목들이다. 지난해 말 어느 항공사가 모집하는 신입사원 서류전형 결과가 발표된 직후, 1차 합격자들끼리 모여 함께 면접을 준비하자는 내용의 글들이다.
요즘 입사 시험에는 시사·일반 상식·프레젠테이션·토론·영어 면접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혼자보다는 여럿이 모여 준비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는 지원자들이 서로를 경쟁자가 아닌 ‘한 배를 탄 동지’라고 여기기에 이른 것이다.
2002년 다음 카페에 만들어진 취뽀의 회원 수는 현재 70만명을 넘는다. 여기에는 유명 대기업은 물론 공기업·중소기업·외국계 기업을 망라한 정보가 올라와 있다. 회사별 자기소개서 쓰는 법, 필기시험 족보와 공부 방법, 면접 요령 등 다양한 취업 정보를 공유한다. 뿐만 아니라 서류용 사진을 잘 찍는 법, 면접 복장 등에 대한 조언, 전형 단계별 후기는 물론 합격 수기도 실려 있다. 취업에 관한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모두를 다룬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 보니 사이트의 메뉴 수만 해도 100개 가까이 될 정도이다.


성공하는 대학생의 열 가지 조건


요즘 대학가에서는 ‘성공하는 대학생의 열 가지 조건’이 공공연히 오르내린다. 열 가지 조건이란 학교·학점·전공·교직 자격증·교환학생 경험·토익 점수·봉사 활동·공모전 수상 경력·인턴 경력·외모 등을 일컫는다.
명문대 4학년 진학을 앞두고 휴학한 김재은씨(24)는 이 열 가지 조건을 거의 다 갖춘 보기 드문 인재이다. 금융계 쪽으로 진출할 계획인 김씨는 취업에 도움이 될 만한 경력을 쌓기로 하고 외국계 금융회사 수십 군데에 지원을 한 끝에 프랑스계 은행의 인턴으로 뽑혔다. 
그는 2학년 때 이중 전공으로 응용통계학을 승인받았다. 원래 전공은 불문학이지만 요즘 같은 취업난 시대에 불문학 하나만으로는 취업하기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3학년에 진학하기 전에는 ‘스터디 어브로드(Study Abroad)’ 과정을 신청해 영국에서 6개월간 공부하고 왔다. 이 과정에서 이수한 학점은 학교에서도 인정해주기 때문에 어학연수와 학업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셈이다. 귀국 전에는 인도에 있는 특수장애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한 달간 봉사 활동도 했다. 복학 후 꾸준히 학점 관리를 한 그는 학교 수업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껴 ‘한국리스크전문가협회(KARP)’가 주관하는 ‘금융공학 과정’에 등록해 3개월간 공부하고 수료증을 받았다.
김씨는 “중요한 것은 정보다. 인터넷은 기본이고 교수·선배는 물론, 학교 신문사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많은 사람들을 통해 원하는 정보를 꾸준히 얻었다. 정보의 끈을 놓지 않고 있으면 남들보다 훨씬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얼마 전 ‘공휴족’(恐休族)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쉬는 것을 두려워하는 젊은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취업을 위해 학점 관리·봉사 활동·인턴 활동·영어 점수 관리·자격증 취득 등 잠시도 쉬지 못하는 학생들을 풍자한 것이다. 실제로 그처럼 바쁘게 살다가 정작 졸업할 때가 되면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해 고민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김재은씨는 이들에 대해 따끔하게 충고한다. “주변을 보면 원하는 것이 뭔지도 모르면서 불안해하는 친구들이 많다. 그래서 이런저런 활동은 많이 하면서도 정작 실력은 쌓지 못한다.”
구정현씨(30)는 대학을 마치고 다시 ㄷ대 치의예과를 다닌다. 나이가 동기들보다 한참 많다 보니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의대 진학을 위해 몇 년씩 재수를 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ㅇ대 공대 재료공학부 97학번으로 4년을 공부하고 다시 신입생으로 치과대학에 들어간 것이다.
“취업을 할지 대학원에 진학할지 고민했다. 주변 친구들은 하나 둘씩 대기업에 취직하는데 나만 어정쩡한 상황에 남겨지니 불안감이 생겼다. 이도 저도 아닐 바에야 확실한 것을 선택하고 싶어 다시 수능 시험을 봤다.”
부모를 설득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공대 전공을 살려 기업에 취직하는 것보다는, 좀 늦어지더라도 나중에 치과 의사가 되는 것이 결과적으로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은 구씨의 부모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구씨는 “취직한 친구들을 만나면 오히려 학생인 나를 부러워한다. 회사 생활에서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면서. 지금 생각해도 잘한 선택인 것 같다”라고 말한다.
이른바 명문대 출신일수록 사회에 진출하는 시기가 더 늦어지고 있다. 이공계 전공자들 중 뒤늦게 의대로 편입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을 전공한 이들 중 상당수는 행정고시·사법고시·외무고시 등 국가고시에 매달린다. 그 때문에 요즘 대학 도서관은 본연의 목적을 상실해 학업이 아닌 편입이나 고시 합격을 위해 밤낮없이 공부하는 이들로 넘치고 있다.
명문대 경제학과 졸업생인 김혜경씨(26·여)는 자신의 실업이 외모 탓이라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초과 학기까지 다니면서 준비를 했지만 결국 실업자 상태로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김씨는 “말로만 듣던 ‘백조’ 신세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너무 우울해진다. 대인 기피증까지 생기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는 일부러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김씨는 학교·전공·학점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다. 꾸준히 영어 공부를 해온 덕분에 토익 점수와 회화 모두 뒤지지 않고 방학 때마다 인턴·봉사 활동도 빠뜨리지 않았다.


 
입사 지원서용 사진 촬영에 수십 만원 투자


면접에서 자꾸 떨어지는 이유가 외모 때문이라고 결론내린 김씨는 결국 성형외과를 찾아 쌍꺼풀 수술을 했다. ‘취업 시즌’이 시작되기 몇 달 전부터는 정기적으로 피부과에 다니며 관리를 받았다. 사실상 취업 준비 기간의 절반은 실력을 기르는 데, 절반은 외모를 가꾸는 데 쏟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자는 특히 외모의 비중이 크다고 들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비슷한 실력이라면 외모까지 뛰어난 재원에게 점수를 더 주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는가.”
그는 입사 지원 서류에 사용할 증명 사진을 촬영하는 데만 수십 만원을 썼다. 미용실에서 메이크업을 받고 드라이를 하는 것은 물론, 최고급 정장을 갖춰 입고 소문난 사진관에 가서 촬영을 하기 때문이다.
“입사 서류를 내는 시기만 되면 학교 앞 사진관은 여대생들로 미어터진다. 증명 사진을 잘 찍기로 소문났기 때문에 사진을 찍기 위해 3~4시간 기다리는 건 예사이다.” 
지난 2월25일 일요일, 이화여대 앞 한 사주카페는 젊은이들로 북적거렸다. 테이블마다 한복이나 정장을 차려입은 역술인 앞에 사주를 보려는 젊은이들이 한두 명씩 앉아 있었다.
“올해는 취업이 잘될까요?”
“저는 금융권 쪽으로 가려고 생각 중인데 제 적성에 잘 맞을까요?”
“면접에서 자꾸 떨어져서 성형수술을 하려고 해요. 어떻게 고치는 게 좋을까요?”
사주에 그런 부분까지 다 나오나 의심이 드는 것도 잠깐, 역술인은 뻔하다는 듯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술술 올해의 취업 운을 짚어낸다.
“올해는 취업문이 활짝 열렸어. 근데 내년 상반기까지야. 그 뒤로는 안 돼.”
“성격이 꼼꼼하고 신중해서 적성에는 잘 맞네요. 그쪽으로 밀어붙이세요.”
“코를 약간만 세우면 훨씬 카리스마 있어 보일 거야. 그게 신뢰감도 주고. 이왕 하려면 코를 하는 게 좋겠어.”
요즘 사주나 점을 보러 가면 대부분 취업 운을 본다. 결혼·금전·건강 등 전통적인 ‘운세 메뉴’에 새로운 것이 추가된 것이다. 20~30분 남짓 사주를 보는 데 드는 비용은 적게는 3천원에서 많게는 3만원. 내용을 많이 물을수록 비용이 조금씩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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