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잡상인은 기업형 조직 '하수인'
  • 정락인 편집위원 ()
  • 승인 2007.03.12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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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업체 '직원들', 영역 다툼...생계형 상인 설 자리 없어

 
"어이! 당신 뭐야, 여기서 물건 팔면 안 돼.” 김 아무개씨(43)는 얼마 전 지하철에서 물건을 팔다가 봉변을 당했다. 운영하던 봉제공장이 재정난으로 문을 닫자 5천만원이 넘는 재고품 처리를 위해 고심하다가 지하철 판매에 나섰다. 그는 승객들 앞에 나선 지 한 시간도 안 되어 다른 상인들의 제지를 받았다. 이들은 “우리 구역에서 물건 판매는 안 된다”라며 김씨를 몰아붙였다. “지하철에 구역이 어디 있냐”라고 따졌지만 소용없었다. 오히려 협박에 가까운 위협을 해왔다. 김씨는 결국 지하철 판매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기아바이(지하철 행상을 일컫는 은어)’라고 불리는 지하철 잡상인들이 부쩍 늘고 있다. 법령 개정 전에는 역이나 지하철에서 물건을 판매하면 3개월 이하의 징역이나 5만원 이하의 벌금, 구류에 처할 수 있었다. 잡상인들은 이때를 ‘007 판매 시대’라고 부른다. 물건을 팔다가도 단속 요원이 오면 줄행랑을 치던 시절이었다. 2005년 1월1일자로 철도법이 철도안전법으로 대체되면서 지하철 내 상행위를 처벌할 법령이 사라졌다. 적발되더라도 ‘인근 소란’이라는 명목으로 3만원의 범칙금을 부과할 수 있을 뿐이다.


게릴라식 판매, 단속은 하나 마나


지금은 어느 노선을 타도 잡상인들과 마주친다. 승객들의 불편도 크게 늘었다. 민원도 증가했다. 잡상인끼리 구역 다툼을 벌이는 모습도 흔하게 볼 수 있다. 단속 요원들과 잡상인들 간의 승강이도 끊이지 않는다.
지난 1월18일에는 4호선 사당역 승강장에서 단속에 불만을 품은 잡상인이 역장을 선로로 밀어 추락시킨 사고가 났다. 부산지하철에서도 비슷한 사고가 터져 인명 사고가 날 뻔했다. 지난해에는 단속 요원에게 폭행을 가해 전치 8주일의 골절상을 입히는 사고가 있었다.
아직까지 지하철 승객들은 잡상인들에게 너그러운 편이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인데…” 하는 동정심이 발동해서다. 단속 요원과 승강이가 벌어질 때는 오히려 상인들을 편들기도 한다.
요즘 지하철 행상은 생계형에서 점조직 기업형으로 바뀌었다. 잡상인들은 실체가 불분명한 유통업체에 고용되어 일정 기간(3~5일) 판매 교육을 받고 지하철에 투입된다. 현재 성업 중인 업체는 20~25개. 주로 서울 동대문역을 중심으로 인근의 신설동·제기동·청량리 지역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최근에는 영등포역이나 신도림역 등지와 강남역 부근에 몇 개씩 흩어져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들 업체는 대개 ‘○○유통’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판매원 모집은 생활 정보지나 각종 인터넷 구직 사이트를 이용한다.
문제는 기업형 조직으로 바뀌면서 업체들끼리 또는 잡상인들끼리 구역 다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노선을 더 확보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하다. 지하철 구간에 업체나 잡상인끼리 ‘구역’이 설정되고, 텃새가 자리 잡았다. 노선은 힘센 몇 사람의 잡상인이 독점하는 형국이다. 나이와 경력에 따라 서열까지 매겨져 있다.
앞의 김씨처럼 생계형 신참들은 끼어들 자리가 없어졌다. 만약 텃새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장사를 할 경우 주먹다짐도 불사할 수밖에 없다. 지하철 행상은 이미 또 하나의 조직 세계가 되었다. 서울 제기동에 있는 ㅅ유통 대표는 “지하철 행상은 업체들끼리 담당하는 구역이 있다. 질서가 잡혀 있다. 가끔 상인들끼리 다툼이 있지만 크게 염려할 필요는 없다. 회사가 알아서 한다”라고 말했다.
각종 과장 광고가 난무하고 출처 불명의 불량품이 넘쳐나는 것도 문제다. 단속 사각지대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승객에게 돌아간다. 잡상인들이 파는 물건은 품질 보증이 안 된 것이 대부분이다. 일부 소비자는 ‘저질 불량품’이라고 불만을 터뜨린다.
잡상인들의 단골 멘트인 ‘국내 중소기업 박람회에서 금상을 받은 제품’ ‘유명 백화점에 납품하던 제품’ ‘공인된 기관에서 품질 인증을 받은 제품’ 등은 대부분 사실이 아니다. 잡상인들이 국산 제품인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품질이 낮은 중국제가 주류를 이룬다. 판매할 물건은 지하철 물품 보관함에 주로 보관한다.
물건은 매일매일 바뀐다. 계절이나 날씨 등에 따라 아이템이 변하는 것이다. 유행에 민감하다는 뜻이다. 한 예로 부푸러기 제거기를 팔다가 날씨가 쌀쌀해지면 장갑을 판매하는 식이다. 비 오는 날에는 우산을 판다. 새 학기가 되면 볼펜이나 공책 같은 학용품이 나온다.
안경주씨(27·여)는 “갑자기 비가 와서 지하철 상인에게 5천원을 주고 우산을 샀다. 16개 창살을 갖춘 튼튼한 우산이라고 해서 샀는데, 우산을 쓴 지 5분도 안 돼 비가 새고 바람에 뒤집어졌다. 품질 보증서가 붙어 있긴 했지만 전화번호도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상인들의 유혹에 넘어가 물건을 구입한다는 박상철씨(35)는 “매번 속으면서도 상인들의 말을 들으면 ‘이번에는 괜찮겠지’ 하고 물건을 샀다. 1천원 주고 산 자가발전 플래시는 발전기를 손으로 돌려주면 영구적이라고 해서 샀는데 플래시에 수은전지 2개를 넣은 것이 전부다. 전지 수명이 끝나면 플래시를 사용할 수 없다. CD 6장에 1만원 하는 새한미디어의 올드 팝 CD는 정품이라고 했는데, 에러만 뜨고 음악이 나오지 않았다”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새한미디어 국내 판매팀 이행복 팀장은 “지난해 3월까지 음반기획사인 ㅅ미디어와 OEM 방식으로 CD를 생산했으나 제품의 판권과 기획 유통에 대한 모든 책임과 권한은 기획사에 있다. 현재 지하철에서 판매 중인 ‘새한미디어 정품’은 가짜다. CD에 담겨 있는 곡도 몇 곡만 오리지널 가수가 불렀고 나머지는 리메이크곡이다. 새한미디어를 사칭하는 것에 대해 법적 조처하겠다”라고 발끈했다. 
지하철 잡상인에게 산 물건은 하자가 있을 경우 교환이나 환불이 안 된다. 품질 보증이 불가능한 제품인 데다 연락처를 알 수도 없다. 연락처가 적혀 있어도 유령 번호이기가 쉽다. 또 판매자가 물건을 강매한 것이 아니라 본인의 의사에 의해 구매한 경우 현실적으로 보상이 어렵다.


 
잡상인 하루 수입 7만~10만원


잡상인들의 하루 수입은 7만~10만원 선. 고용된 유통업체에서 판매 마진에 따라 급여를 받는다. 마진은 보통 50% 정도. 1천원짜리 물건 1개를 팔면 5백원, 5천원짜리는 2천5백원을 챙길 수 있다. 따라서 판매 능력에 따라 돌아오는 수당도 각각 다르다. ㅅ유통업체의 대표는 “하루 평균 10만원 이상 가져갈 수 있다. 1천원짜리 2백 개만 팔면 된다. 베테랑들은 그 이상을 벌기도 한다. 무자본으로 이 정도 수입이면 웬만한 직장인 안 부럽다”라고 강조했다. 물론 판매 능력·물건·가격 등에 따라 판매량에 차이가 있다. 판매원들의 나이는 25~55세까지 고르게 분포돼 있다. 성에 차별을 두지 않아 여성 잡상인들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서울 시청역에서 만난 30대 초반의 판매원은 “마진율은 좋지만 단가가 약하다 보니 박리다매를 해야 한다. 단속에 대한 불안감과 생계 불안이 겹쳐 정신적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하루 10만원 벌어도 그저 하루살이 인생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현재 지하철 내에서 물건을 팔기 위해서는 해당 역이나 지하철 운영기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허가를 받지 않은 판매나 광고는 불법으로 간주한다. 지하철 업체에서는 자체 질서기동팀을 운영하며 단속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하고 있다.
서울메트로 홍보팀 김정환 과장은 “법이 모호해 단속에 한계가 있다. 단속에 걸린 상인도 돌아서면 다시 판매 행위를 한다. 회사측에서 일일이 막는 것은 어렵다”라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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