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가서 끝장 보겠다"
  • 홍선희 편집위원 ()
  • 승인 2007.03.12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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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놀이와 김덕수씨(56)는 동의어이다. 1978년 독립된 장르로 처음 선보인 후 사물놀이는 인종·나이·성별에 관계없이 지구촌 전역의 사람들을 사로잡았고, 한국에 대한 동경의 불씨를 지폈다. 그 후 김씨의 삶은 사물놀이를 빼놓고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광대다. 50년 세월을 장구 하나로 온 세계 무대에 올랐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라며 그는 3월12일부터 3일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예인 생활 50주년’ 기념 연주회를 갖는다.
1952년 대전에서 출생해 남사당 단장이던 아버지의 손에 이끌리어 조치원 난장에서 무동으로 광대의 길에 들어섰다. 또래와는 다른 집단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며 큰 선생님들로부터 광대 정신과 기예를 철저히 익혔다. 오늘까지 전통 예술계의 기둥 역할을 해왔고 전세계에 사물놀이를 퍼뜨렸다.
50주년 연주회에 앞서 만난 김씨는 아직 젊었다. 단원들과 연습하랴, 방송 녹화하랴, 녹음 편집 작업하랴, 시간에 쫓기면서도 처지는 일이 없었다. 그는 다음날 하루 일정으로 당진에 대보름 공연을 다녀올 예정이라고 했다. 그에게는 마르지 않는 샘이 있는 듯했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녹음실에서 그를 만났다.

‘김덕수 예인 인생 50주년 기념 공연’을 펼치는 뜻은?


올해가 데뷔 50주년이다. 내가 종사하는 분야는 다른 예술 분야와는 다르다. 산업사회로 본격 진입하기 전 우리 민족의 어려웠던 시절부터 전문 연예 집단이 있었다. 천시받고 무시당하던 직종이다. 따진다면 어려운 직종인데 내 세대까지 물려받아 그런 정신을 살리려고 몸부림쳤다. 새 천년대까지 살아남았다는 확인이라고 할까.


50주년 행사 내용은?


3월11일부터 사흘 동안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다. 박병천·안숙선씨와 한울림예술단·한울림 전통연희단, 그동안 함께 해왔던 동료·제자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사물놀이에만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결합을 통해 우리 장단의 신명을 펼쳐 보일 예정이다. 50년 전 나처럼, 다섯 살배기 박재연군을 무대에 올린다. 그 아이는 내 제자의 아들로 소리를 곧잘 하고 장구도 잘 친다. 공연장 로비에서 사진전과 기념 음반 사인 행사도 갖는다.


‘김덕수’와 ‘사물놀이’는 동의어인데….


사물놀이는 그 이전 배경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대전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대물림으로 남사당에 들어가 늘 대중이 필요로 하는 공간에 있었다. ‘천재 소년’으로 불리며 악극단, 위장약이나 회충약을 파는 약장수, 또 나일론이나 양은그릇을 파는 ‘국산품’ 이동 선전단과 다니기도 했다. ‘돼지표 양은솥’이라고 잊어버리지도 않는다. 가난했던 시절이라 다리를 놓거나 소방서 건립 기금을 마련하는 마을, 도시 단위 행사, 이승만 대통령 앞, 헬리콥터를 타고 간 미군기지, 시장 바닥 어디든지 갔다. 그때는 ‘공연’이라 불리지 않고 그저 ‘일터’에 머물렀다. 해가 뜨면서부터 늦은 밤까지 샘이(사미승에서 유래)놀이를 하고 배우고 그랬다. 춤·노래·악기를 한꺼번에 익히는 방식이었다. 어려웠던 시기에도 돼지 한 마리 잡을 여유는 있었고 그 속에 소리가 있었다. 그런 곳 아니면 밥 먹을 곳이 없었다. 포장을 치고 표를 팔기도 했다. 초등학교 6년 동안 수업일수를 3백일도 채우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서울의 중학교로 진학했다.


어릴 때 리틀엔젤스 단원으로 활동하지 않았는가?


1965년 중학교 다닐 때부터 해외 공연을 다녔다. 신영옥씨도 단원으로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추었다. 1970년 오사카 엑스포에서 엑스포관을 설계한 김수근 선생을 처음 만났다. ‘공간’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우리나라 무역이 본격 시작될 때라 정부에서 민속가무예술단을 파견했다. 국악인, 가요 가수로 구성됐다. 김정구·장세정·고복수·박귀희·김소희 선생 등이 출연하는 국악 프로그램 1시간, 가요 프로그램 1시간씩 공연했다. 그렇게 해서 1973년까지 50여 개 국가에서 공연을 했다.


 
전통 연희(演戱) 때 사물놀이의 역할은?


전통 예술에서 기본은 연희 개념이다. 선조들은 하늘에 올리는 제를 관습화하고 있었다. 가야금·거문고·피리·대금으로 한 것이 아니다. 어느 마을이든 징·꽹과리·북·장구를 치며 제를 드리는 것이 생활문화였다. 관혼상제나 24절기에 사물놀이는 늘 함께 있었다. 사물놀이는 무한대의 장단과 울림으로 신명의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사물놀이 창단 동기는?


1960년대 중반 새마을운동이 확대되고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도로교통법이 생겨 ‘마당’을 여는 것이 어려워졌고, 재래의 연희 문화는 설  자리를 잃었다. 그 여파로 우리 것만 아니라 전통 예술도 덩달아 죽어버렸다. 나는 여러 해 동안 해외 순회 공연단의 일원으로 피날레인 풍물을 맡으며 사물놀이의 가능성을 확신하고 있었다. 이미 저세상 사람이 된 김용배, 국악예술고 동창 최태현·이종대 등과 함께 1978년 2월28일 ‘제1회 공간 전통음악의 밤’ 행사에서 ‘웃다리 풍물’을 발표했다. 최종실, 이광수를 영입해 1979년 9월 원조 사물놀이 첫 연주를 갖게 되었다. 그 무렵 문화·예술계 중심이었던 ‘공간 사랑’에서 여러 선배들의 좋은 의견을 들을 수 있었고 다른 분야 예술인들, 외국 연주자들과도 작업하며 창작률을 높였다. 꽹과리·징·북·장구 등으로 극장이라는 공연 장소 구조에 맞춰서 프로그램을 재구성한 것이 첫 연주의 의의라 할 수 있다.


내년이면 ‘사물놀이’ 30주년이 아닌가?


처음에는 ‘사물놀이’가 팀 이름이자 행사 자체를 일컬었다. 다른 패거리의 사물놀이가 시작되자, 언론에서 어느 팀인지 구분하기 위해 ‘김덕수 사물놀이패’라고 이름 붙였다. 용배·종실이가 떠나고 나서 ‘사단법인 한울림’으로 바뀌었다. 많은 패거리들이 생기고 광대파·사당패·아씸·바우더기·소리패·진쇄패 등 여러 그룹이 하나가 되어서 대규모 작품도 했다. 사물놀이 경연대회를 만들고 사물놀이 캠프도 열었다. 또 충남 부여에 사물놀이 교육원을 세웠다. 타악을 브랜드화하고 양평에 공방교육원도 만들어 악기를 개량·표준화하고 악기 만드는 장인을 키워냈다. 그동안 교칙본 12권, 사물놀이 5천여 회, 음반 20여 개를 영어·독일어·일어로 만들었다. 세계대백과사전에 ‘사물놀이’라는 단어도 올라가 있다. 일본에서만 학생·공무원·재일동포 그룹 등 사물놀이 그룹이 1천 개가 넘고 세계에 1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물놀이 동호인으로 활동 중이다.


국악 음반은 그동안 얼마나 팔렸는가?


국내와 해외에서 꾸준히 팔리고 있다. 오스트리아 색소폰 주자인 볼프강 프쉬닉은 우리 가락을 소화해내는 데 천재적이라 10여 년 이상 함께 작업했다. 50주년 기념 음반을 위해 지난해 말 내한해 새타령·육자배기 등을 같이 녹음했다.


앞으로도 사물놀이만을 계속할 것인가?


처음 시작할 때는 탈춤, 남사당패 같은 전통 연희가 사라져 사물놀이로 신명·기운을 만들어내 사회에 돌려주자는 취지였다. 옛날의 연희 요소들을 재창조하는 작업을 하고 싶었어도 비용이 많이 들고 일손이 부족했는데 지금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전통연희과가 생겨 나은 편이다. 이제 10년이 다 되어간다. 젊은 학생들이 어렸을 때부터 탈춤·무속·풍물 등을 한 번에 익혀 연희자가 제대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옛것을 새롭게 재창조하는 종합연희극을 오는 5~6월 약 40일 동안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공연할 계획이다. 신명의 원천인 장단·가락을 발굴해 일원화하여 이 시대에 맞는 프로그램을 만들 예정이다.


서울 남산 한옥마을의 국악 전용 공연장은 어떤가?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에게는 전통 예술 상설 공연장이 없다. 민족 미학 및 우리만이 갖고 있는 건축 양식과 울림을 가진 마당이 생겨야 하는데 그런 곳이 없다는 얘기다. 한옥마을 공연장도 마찬가지다.


사물놀이를 배워간 외국인들이 많다. 해외에서 우리 국악의 가능성은?


지금까지 뿌려놓은 것들, 즉 해외 현지인의 네트워크를 통해 이루어낼 수 있을 것이다. 가능한 곳에서는 일반 과목으로 가르칠 수 있는 단계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고 악기도 이제는 표준형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표준형으로 나와 있는 서양 악기처럼 우리 것도 부가가치를 높이고 세계화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음악에는 어떤 소리 높이에 어떤 사이즈의 것을 써야 하는지 가이드라인을 만들면 충분히 독점할 수 있다.


해외 단체와 즉흥 공연도 많이 하고 꾸준히 음반을 내온 사물놀이가 국제 무대에서 얼마나 승산이 있다고 보는가?


대륙마다 고유의 신명이 있다. 남미는 남미대로, 중동은 중동대로 신명이 있다. 동양, 특히 동북아시아에는 어디에 내어놓아도 경쟁력 있는 우리의 무한대 신명이 있다. 김치 맛이 도마다 다르듯, 지역마다 다른 장단을 갖고 있다. 제주도에서 북간도까지 지역의 장단을 정리하고 기록했으며 교칙본도 만들었다. 돈을 받고 팔 수도 있었지만 처음부터 저작권을 등록하지 않고 씨를 뿌리고 보급하는 데 힘썼다. 아프리카 것이 재즈가 되고 자메이카 음악이 레게가 되며 테크노, 힙합까지 포함해 새로운 기운이 맴도는 세계 음악 시장에 우리만의 에너지로 큰 물결을 바꾸고 싶다. 몽골·중국·일본이 갖고 있지 못한 장단, 우리만이 갖고 있는 것이 세계 인류의 공감을 얻을 것이다. 선율로는 안 된다. 리듬으로 만난다면 모든 공연 예술의 기본을 바꿀 수 있다. 이제는 서울에 있어서만은 안 된다. 부단히 노력하고 다녀야 한다. 특히 주류에 가까이 다가서야 한다. 미국 뉴욕을 잡아야 한다. 아직도 내게는 청년 기운이 있다. 가서 몇 년쯤 지내면서 끝장을 봐야 한다. 다 버리고 갈 것이다.


국악인으로서 크게 성공했다. 무엇이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나?


좋은 집단에서 최고의 예술인들과 있었기 때문이다. 전문 예인 정신을 가진 가장 큰 선생님들의 집단 속에서 컸기 때문에 지금까지 뛸 수 있었다. 그곳에는 민주적 분배 원칙이 있었고 예인으로서 지켜야 될 것에 대해 엄격했다. 물질욕·명예욕을 버리고 춥고 배고픔을 견뎌내는 것부터 배웠다. 사물놀이 설립 정신에 가장 먼저 앞세운 것이 전문 예인 정신이다. 이것이 시대를 이어간다고 본다. 주위에는 돈 때문에 그만두는 이들도 많지만 나는 지금까지 돈을 받고 제자를 가르쳐본 적이 없다. 가능성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먹이고, 재우면서 보람을 느껴왔다. 한울림에서 봉급받는 단원만 30명이나 된다. 나는 버스 타고 택시 타고 다니지만 그것이 오히려 편하다.


가족은?


아들이 2명 있다. 어려서부터 사물을 아주 잘 다루었다. 큰아이는 대중음악으로 바꿔 힙합 가수를 하면서 M-TV 영화음악 VJ와 영화 출연 등으로 바쁘다. 둘째 아이는 유학 중이다. 재일교포인 아내는 전통 무용 공부를 위해 한국에 왔다가, 어느 날 헤어졌던 파트너를 만난 듯 나와 결혼하게 됐다. 아내는 파리 공연과 워크숍 준비로 요즘 바쁘게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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