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보다 깊은 사랑의 묘약이거나 찌든 삶 적시는 단비이거나
  • 박희숙(화가, 시인) ()
  • 승인 2007.03.12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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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지나간 시간을 뒤돌아보면 꿈에 불과하다. 지금의 시간도 꿈이었으면 좋으련만 꿈은 결코 아니다. 현실은 항상 우리를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추억은 아름답게 각색되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지만 사실 한 줌의 추억은 고통이 안겨준 선물이다. 단지 지나고 나면 그 고통의 순간을 잊고 아름다운 것만 기억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추억을 되새기기 위해, 아니면 비루한 현실에 갇힌 나를 잊기 위해 술을 마신다. 주변에서 가장 손쉽게 택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술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술은 ‘악마의 유혹’처럼 천천히 다가와 현실의 초라함에서 벗어나게 하는 해방감을 준다. 한 번 술에 취해본 사람이라면 술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몸과 마음으로 절절히 느낄 수밖에 없다.
술은 때로는 사랑의 상처도 꿈처럼 사라지게 하고 일그러진 자신을 멋진 모습으로 변신시켜며 자신감 부족으로 남 앞에 나서지 못하던 사람을 당당하게 해주고 또 주변의 모든 사물이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해준다. 현실에서 찾을 수 없었던 숨겨진 자기의 얼굴이다.
그러나 술이 취하면 취할수록 점점 더 현실의 나와 멀어지기 때문에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자기 스스로도 기억해내지 못하는 객기 어린 행동으로 인해 현실의 안락함에서 추락의 낭떠러지로 끌어내릴 수 있는 요건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술은 때로 삶을 예측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든다. 술은 단순히 먹고 마시는 의미를 떠나 유혹의 수단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술의 유혹-존 워터하우스의 <오디세우스에게 술잔을 권하는 키르케>:사랑은 봄의 아지랑이처럼 소리 없이 다가온다. 사랑은 언 땅을 녹이는 봄바람처럼 굳어 있던 마음을 녹이고 형언할 수 없는 뜨거움이 온몸을 감싸도 그 뜨거움을 모른 채 그 곁으로만 자꾸만 가고 싶게 만든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무슨 일이든 선택을 하지만 사랑만은 스스로 선택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사랑은 일방통행이어서 마음먹었던 대로 움직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일방적인 사랑의 갈증을 감당하기에는 불행의 정도가 너무 거대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사랑의 목마름을 참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열리지 않는 문의 빗장을 풀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아주 통속적인 방법이지만 술은 쾌락의 가속도를 높여주기 때문에 사랑을 유혹하는 가장 흔한 수법 중의 하나로 여겨진다. 그래서 이 방법은 역사 이래 남자는 물론 여자에게서도 많이 사랑받았다. 쉬운 길을 놓아두고  어려운 길로 돌아가는 사람은 없다.
<오디세우스에게 술잔을 권하는 키르케>는 술로 유혹하는 여인의 냉혹함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요정 키르케는 아름다운 외모와 요염한 육체의 소유자다. 그녀는 자신의 관능적인 외모 외에 특별한 재능인 마법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마법에 한 번 빠지면 그물에 걸려든 물고기처럼 남자들은 빠져나가지 못했다.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을 보내 키르케 섬을 정찰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의 부하들은 키르케의 마법에 걸려 모두 돼지로 변하고 만다. 분노한 오디세우스는 헤르메스 신의 도움을 받아 키르케의 마법을 퇴치한다. 마법의 힘이 통하지 않자 키르케는 자신의 관능적인 육체를 이용해 오디세우스에게 마법의 술을 권한다. 술에 취한 오디세우스는 무분별한 욕망에 황망하게 무너져 그녀의 전부를 사랑하게 된다. 오디세우스는 사랑하는 아내와의 인연을 잘라내고 키르케의 매력에 빠져버린 것이다. 
이 작품에서 키르케는 매혹적인 몸매가 다 드러나는 옷을 입고 오디세우스에게 술을 권하고 있다. 그녀의 왼손에 들려 있는 마술 지팡이는 오디세우스가 술에 취하기만 바라고 있다. 마법의 지팡이가 술에 취한 남자를 치는 순간 돼지로 변하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는 그녀 등 뒤에 있는 거울 속에 희미하게 모습을 보이고 있고 그녀의 발밑에는 돼지로 변한 남자가 있다.
존 워터하우스(1849~1917)는 이 작품에서 키르케를 화면 정면에 당당하게 내세웠고 영웅 오디세우스는 희미하게 표현했는데, 그것은 여자의 유혹이 강렬해서 남자가 한번 빠지면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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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현실을 잊게 한다 - 존 슬론의 <맥솔리의 선술집>: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게 연기하는 연기자처럼 살면 되지만 자신의 역할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없다. 삶의 모진 바람이 가슴속을 시리게 파고들 때 사람들은 술을 찾는다.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을 달래고 싶고 인생의 고달픔을 추스르고 싶어 술을 마시는 것이다.
남자는 작은 희망의 불씨 하나를 가지고 모질게 매달리면서 산다.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인정받기를 원한다. 하지만 작은 희망에 매달려 있는 자신을 보고 있을 때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그것이 술집이다. 술집에서는 사무치게 외로운 사람이 없다. 술은 누구와도 친구가 되어 이야기를 다 들어주기 때문이다.
조용하고 분위기 좋은 고급 술집에서 먹는 술이나 담배 연기 찌든 벽지와 소란스러운 분위기, 그리고 정갈하지도 않은 음식 사이에 끼여서 먹는 술이나 취하면 똑같다. 술에 취하면 세상 모든 것이 공평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술잔 속에 사람들의 수많은 사연을 담고 있지만 항상 술잔은 비워져 있기 때문이리라.
<맥솔리의 선술집>은 싸구려 술집에서 술을 즐기고 있는 남자들을  표현했다. 이 작품에서 웨이터의 하얀 가운은 화면을 환하게 밝혀주며 술을 마시고 있는 남자들은 어둠 속에 묻혀 있다.
담배 연기에 찌들었는지 술집 천장에 매달려 있는 전구조차 빛을 잃어버리고 벽에 걸려 있는 액자나 장식 등 무엇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없다. 술잔을 들고 있는 남자들은 삶을 휘청거리게 만드는 것들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이야기를 열심히 들어주는 사람에게 집중하고 있어 주변이 소란스러워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다.
존 슬론(1871~1951)은 안주도 없이 생맥주 한 잔으로 하루의 피로를 푸려는 노동자들의 삶을 선술집이라는 공간으로 표현했다.
슬론은 이 작품에서 같은 공간에 서 있지만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서로 어울려 있는 미국의 선술집 풍경을 표현했는데 웨이터는 술집에서 유일하게 술에 취해 있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밝게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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