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녹는 한반도 평화는 오는가
  • 김태우(한국국방연구원 책임연구위원) ()
  • 승인 2007.03.19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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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 최악 상황 등 3대 시나리오 정밀 분석

 
'2·13핵 합의’가 도출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제20차 남북 장관급회담이 열렸고, 남한의 대북 지원 재개는 이미 초읽기에 들어간 상태이다. 게다가 이해찬 전 총리의 방북으로 8·15 남북 정상회담설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다. 우세한 지지도에도 불구하고 때 아닌 평화 무드가 집권 계획을 무산시킬까 봐 전전긍긍하는 한나라당은 갑작스럽게 옷을 갈아입느라 부산하다. 보수적 행보를 보여왔던 일부 정치인들도 생존을 위한 탈색 작업에 여념이 없다. 이미 거센 ‘신북풍’이 불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런 사태들이 진정 항구적 평화의 예고편인지, 평양이 기획한 기만극의 시작인지는 두고 보아야 할 문제이다. 현재의 평화·화해 무드는 일단 2·13 핵 합의에 이은 후속 현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정작 향후 북핵 문제가 흘러갈 수 있는 시나리오는 다양하다. 만인이 원하는 시나리오로 간다는 보장도 없다.


성과도 크지만 허점도 많은 2·13 핵 합의


2·13 핵 합의는 2006년 9·19 공동발표문 이후 17개월 만에 마련된 ‘의미 있는 진전’임에 틀림없다. 2·13 합의가 이행된다면 북한은 핵시설 및 핵 프로그램의 폐쇄·봉인에 이어 ‘불능화’ 조처를 취할 것이다. 이에 대해 6자회담의 나머지 당사국들은 총 1백만t의 중유 또는 그에 상응하는 에너지를 지원하고 미국과 일본은 대북 수교를 위한 양자 대화를 지속하게 된다. 물론 여기에는 미국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제외하고 대적성국 교역법의 적용을 종료하는 문제도 포함되어 있다.
2·13 합의는 당장 한국에 두 가지 큰 의미를 가진다. 첫째, 북한의 핵 활동을 제약하는 것은 한국 안보에 적지 않은 이익이다. 북한은 2003년 초 핵무기비확산조약(NPT) 탈퇴 후 사실상 아무런 제약 없이 플루토늄을 생산하고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해왔다. 이런 자유를 제약한다는 것은 한국 안보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된다. 둘째, 이번 합의는 2006년 10·9 핵실험 이후 냉각되었던 남북 관계에 활기를 불어넣는 계기이며, 이미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이번 합의에는 피해가야 할 네 개의 지뢰밭이 숨어 있다. 합의 이행의 검증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북한의 NPT 복귀를 위한 북한과 IAEA 간의 대화가 순조로울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 첫 번째 지뢰밭이며, ‘폐쇄’ ‘불능화’ 등이 의미하는 조처 사항과 절차에 대한 구체적 후속 합의가 이어지지 않을 경우 서로의 아전인수식 해석이 맞부딪칠 수 있다는 점은 두 번째 지뢰밭이다. 이미 보유한 핵무기와 플루토늄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 또 하나의 핵개발 경로인 농축 활동을 확인할 방도가 없다는 점 등은 더욱 위험한 지뢰밭이다.
지난 3월5일 북한 김계관 외무성 부상을 초청해 미국측 인사들과 세미나를 주선했던 도널드 그레그 코리아소사이어티 이사장에 의하면, 김부상은 고농축 우라늄(HEU) 문제와 관련해서 “미국이 증거를 갖고 오면 상응하는 답변을 해주겠다”라는 입장을 밝히면서 “1998년 미국이 금창리에 핵시설이 있다고 북한을 몰아붙였으나 금창리를 개방했더니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는 분명히 농축 프로그램의 존재를 부인한 것이다. 이미 생산한 플루토늄 문제에 대해서도 김부상은 “미국이 제기하면 언제든지 상대하겠다”라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이 또한 기존의 플루토늄과 핵무기를 순순히 내놓겠다는 말이 아니다. 김계관 부상과 미국측 인사들이 화기애애한 덕담들을 주고받은 것으로 보도는 되었지만 김부상이 했던 말들을 곰곰이 따져보면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미국이 HEU 및 플루토늄 문제를 규명하려 할 때 북한이 “동등한 핵 보유국의 입장에서 협상한 것이니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시비하지 말라”고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어쨌든 이런 지뢰밭들은 앞으로 북한이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시비를 걸어 2·13 합의를 무력화시킬 여지를 안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국에 남겨진 수수께끼


 
여기에 더해 한국에는 중요한 수수께끼가 남아 있다. 베를린 회동에서 미국과 북한이 나눈 대화 중에는 공개되지 않은 부분이 많을 수 있으며, 그중에는 한국의 운명과 직결되는 것이 포함되었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미국이 핵확산 방지를 확약받는 대가로 기존의 북한 핵무기를 문제 삼지 않기로 약속해주었다면, 이는 미국의 정책이 사실상 ‘북핵 제거’에서 ‘북핵 관리’로 바뀐 것을 의미한다. 미국이 한반도 평화 체제 협상을 조속히 개시할 것을 약속해주었다면, 이 또한 기존의 동맹 정책과 안보관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하게 된다. 부시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접근을 위해 기존의 원칙들을 저버렸고 존 볼턴처럼 애지중지하던 네오콘 참모들을 내치기까지 했다. 부시 대통령의 이런 돌변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갑작스러운 북·미 접근의 끝은 어디인가. 그 과정에서 미국이 한국을 얼마만큼 배려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앞으로 북핵 문제와 북·미 관계가 다양한 시나리오로 전개될 수 있기 때문에 아직은 ‘평화의 노래’를 부를 때가 아니라는 점이다.


‘핵 합의 후 한반도’ 다양한 시나리오들


 
앞으로 북핵 문제와 관련한 최선의 시나리오는 북한이 2·13 합의를 이행하고 이어서 핵 폐기를 실천하면서 동시에 체제 개선을 수용하는 경우이다. 여기서 체제 개선이란, 개혁과 개방을 수용하면서 인권 개선·민주화 등을 진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국제 사회가 북한을 시비할 원인이 소멸되며, 미국이 북한을 적대시할 필요도, 북한이 핵무기를 통해 체제를 수호하려 할 이유도 없어진다. 당연히 한국의 대북 지원을 시비할 나라도 없으며, 한국이 북·미 간 평화협상을 경계할 이유도 없어진다. 이것이 곧 항구적 핵 해결 시나리오이다. 현재 부시 대통령의 행보를 감안할 때 이 경우 북·미 관계의 급속 진전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한국 또한 이를 시샘할 이유가 없다. 한국 사회의 일각에서는 현재의 평화 무드가 최상의 시나리오로 직행할 것으로 단정하는 분위기지만, 이는 한마디로 성급한 일이다. 이 시나리오로 가는 길목에 있는 최대 걸림돌은 북한 지배층의 안전 문제이다. 갑작스러운 개혁·개방은 북한 주민의 삶의 질을 급속히 개선하고 북한의 신속한 국제 사회 참여를 의미하지만, 이 경우 모순투성이의 수령 독재 체제가 위험에 처할 수 있다. 북한이 지금까지 체제 수호를 최우선 목표로 삼아온 직접적 이유도 결국은 지배층의 신변 안전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긴장 복귀’ 시나리오도 있다. 즉, 북한이 체제를 고수하고 핵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조만간 2·13 합의를 뒤집거나 또는 후속 합의를 무력화시키고 핵 억제력 증강을 꾀하는 시나리오이다. 이 경우 현재의 평화 무드는 일시적인 것으로 끝나고 북·미 관계도 원래의 적대적인 관계로 회귀할 것이다. 이 경우 모든 것이 분명해지므로 남한 내부의 혼란은 쉽게 정리될 수 있으며, 미국도 곧바로 정신을 차리게 된다. 남한 사회에서는 다시 보수의 목소리가 강해지면서 친북 단체들은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미국은 대북 군사 행동을 신중하게 검토할 것이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미국으로서는 인명 피해도, 방사능 오염도 발생시키지 않는 극소수 핵시설에 대한 초정밀 타격은 북한에 대남 전쟁 도발의 명분을 주거나 중국과 러시아에 심각한 반발 명분을 제공하지도 않을 것으로 판단할 것이다. ‘대북 직접 대화 불용’ ‘나쁜 행동에 대한 보상 불용’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CVID) 핵 해체 이외의 핵 타결 불용’이라는 3대 원칙을 포기하면서까지 대북 접근을 시도했던 미국으로서는 제한된 군사 행동을 위한 충분한 명분을 축적하게 되는 셈이다. 하지만 현재로서 이런 시나리오의 가능성은 크지 않다. 북한 당국자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2·13 합의를 전후해 모처럼 조성된 평화 분위기를 순식간에 내팽개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작 어려운 것은 중간급 시나리오들이다. 예를 들어, 북한이 2·13 합의를 성실하게 이행하고 나아가서 핵을 폐기하지만 반대급부로 ‘체제 및 정권 안전에 대한 보장’을 받는 경우, 즉 개혁과 개방이 수반되지 않는 핵 포기 시나리오이다. 이런 시나리오가 진행되면 북핵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는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겠지만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다. 북한 체제를 인정해준다는 것은 인권 부재 수령 독재, 탈북자, 정치범 수용소 등 북한의 실상을 그대로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뜻이 되어, 사실상 북한 주민을 더욱 확실하게 암흑 속에 가두는 것이다. 국제 사회가 이런 문제들의 개선을 요구한다면 북한은 또다시 체제 수호 수단을 강구하게 되며, 결국 핵개발을 재개하거나 미사일·화생방 무기를 수단으로 협상을 시도할 것이고, 이는 곧 ‘북한 문제의 재발’이 될 것이다.
 
요컨대 민주화, 인권 개선, 개혁·개방 등 체제 개선을 수반하지 않는 핵 문제 해소는 항구적인 해결책이 되기 어렵다. 이것이 핵 합의가 이행되는 경우 국제 사회가 직면할 수 있는 최대의 딜레마인 셈이다. 이런 시나리오는 한국 사회를 극심한 혼란 속으로 빠뜨릴 수 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한 이상 해주지 못할 것이 없다는 식의 개혁적 목소리가 넘쳐나는 중에 대북 신중론자들이 정신 없이 ‘수구 세력’으로 내몰리면서 보수 세력의 저항도 거세어질 것이며, ‘북풍’이 한국의 정치와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북한이 기존의 핵무기를 인정받으면서 추가적인 핵 개발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체제와 정권의 안보를 보장받는 경우도 생각할 수 있다. 이 경우 미국의 대북 핵 정책은 ‘북핵 제거’에서 ‘북핵 관리’로 목표를 바꾼 것이 된다. 즉 ‘핵확산 금지’만을 약속받으면서 현재의 핵 보유를 인정해주는 것이다. 현재 부시 대통령의 변신(?)을 감안한다면 이 경우에도 북·미 접근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 사회에서도 핵 해결로 간주하고 대북 지원 확대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질 것이지만, 이 또한 그리 간단하지 않다. 북한이 제3자에게 핵무기를 판매하거나 확산하지 않는다고 약속할 경우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수단이 되지는 않지만, 북한이 가진 5~10개의 핵무기 그 자체로도 한국 안보에는 지대한 위협이 된다. 때문에 이 시나리오의 경우 평화 무드가 지속되는 가운데서도 북핵에 대비한 생존 전략들이 추구되어야 하지만, 특정 정치 세력이 득세하면 모든 정책과 선택을 독점하는 현 정치 체제에서는 어렵다.
 
세 번째 또는 네 번째 시나리오로 북한의 치밀한 대남 전략, 미국의 어설픈 대북 정책 등과 맞물려 돌아가는 경우 이는 한국이 맞이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불러올 것이다. 사실 그렇다. 북한으로서는 지금을 대대적인 평화 공세의 최적기로 판단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마침 정치적으로 코너에 몰린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포용하는 태도로 돌아선 상황이며, 거기에 더하여 남한 내부에는 북한의 입장에 동조하는 ‘민족’ 세력들이 도처에서 힘을 발하고 있다. 북한은 이 시기를 이용해 미·일과의 수교를 성취하고 미국과는 평화 체제 협상을 벌이면서 한·미 동맹과 주한미군의 존재 이유를 소멸시키려 할지도 모른다. 한국에 대해서는 경제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남한을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할 절호의 기회로 보고 보·혁 갈등을 최대한 부추기면서 2007년 대선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 할 가능성이 있다. 그 결과 한국 안보를 지켜줄 최후 보루로서 한·미 동맹이 와해되고, 한국군의 주적관은 희석되며, 한국 사회마저 장밋빛 민족론에 도취된 사람들에 의해 지배되는 현상이 벌어진다면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또는 서방 세계의 일원으로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크게 흔들릴 것이다.


조급증과 맹목적 낙관은 금물


이렇듯 북핵의 향방과 관련해 다양한 시나리오가 가능한 상황이라면, 아직은 냉정과 신중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기본적으로는 최상의 시나리오를 실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와 동시에 다른 모든 시나리오에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북한이 핵을 완전히 포기할지 또는 북한이 진정 체제 개선을 수용할지가 불투명한 현 상황에서 북풍으로 인해 한국 사회가 북한 변수에 휘둘린다면 이는 정녕 대한민국이 취해야 할 행보가 아니다. 체제 수호를 최우선 목표로 삼아왔던 지금까지의 북한의 행동을 종합해볼 때, 그리고 북한 지배층이 체제 변화를 신변 안전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우리가 바라는 장밋빛 시나리오의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현재의 북·미 접근 움직임을 북한의 개혁·개방, 민주화, 인권 개선 의지로 해석하는 것은 착각이 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도 그렇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아프가니스탄·이란 등지에서 고전하고 있는 가운데 조급한 심정으로 북한에 접근하고 있지만, 이것이 정녕 북한의 인권 문제, 탈북자 문제 등 인류의 보편적 문제들을 덮어둔 채 북한 체제를 인정하겠다는 것인지는 좀더 두고보아야 한다. 특히 차기 정부가 현재 부시 행정부의 행보를 이어받는다는 보장은 더욱 없다.
지금은 냉정과 신중을 지키면서 북한의 태도를 좀더 지켜보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야당 정치인들이 유화적인 대북 정책으로의 수정을 시사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당 정치인 일부가 “야당은 지금까지 주장했던 대북 정책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하고 사과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는 매우 경박한 언행들이다. 아직은 그런 말을 주고받을 시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은 모든 가능성들을 주시하면서 달라진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순발력을 준비해야 할 때이지만, 특정 시나리오만을 상정한 정책을 주장하기에는 때 이르다. 아직은 평화의 노래를 부를 때가 아니며, 축배를 들 시간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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