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앙숙'의 입씨름 순회 공연
  • 조홍래(자유기고가) ()
  • 승인 2007.03.19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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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차베스, 남미 방문길 함께 올라 치열한 비방전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은 앙숙 관계다. 부시는 차베스의 반미 노선이 눈엣가시이고 차베스는 부시를 ‘악의 화신’으로 본다. 두 사람이 남미에서 뜨거운 설전을 벌였다. 남미에서의 영향력 쟁탈을 놓고 사사건건 대립하는 두 지도자가 하필이면 같은 시기에 남미를 방문한 것이 탈이었다.
브라질을 방문한 부시는 2월9일 미국은 남미를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은 공허했다. 그가 남미를 한참 동안 방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시가 소홀히 하는 동안 차베스는 많은 공을 들였다. 부시가 남미를 버렸다는 차베스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남미의 관심을 끄는 방식도 대조적이다. 부시가 철통같은 보안 속에 우루과이의 숙소에서 움츠리고 있는 동안 차베스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축구장에 나가 군중과 어울렸다. 좌파 군중은 차베스를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부시가 남미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빈곤 퇴치를 돕겠다고 말하면 차베스는 미국이 남미를 속국으로 만들고 있다고 공격했다. 두 정치인의 이념 논쟁을 남미 사람들은 대체로 방관하는 태도이다. 최근 칠레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부시와 차베스에 대한 호감도가 다 같이 39%로 나왔다.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부시와 만난 자리에서 중립을 지켰다. 브라질의 에탄올을 수입하기로 한 미국의 결정을 들어 부시가 양국 관계의 새로운 장이라고 자찬했으나 룰라는 서로 존중하는 선에서 양국 관계를 발전시키자고 미지근하게 응수했다.
차베스는 이것을 물고 늘어졌다. 식물에서 가스를 추출하는 에탄올을 대량 수입함으로써 아마존의 밀림이 사라질 것이라고 비난했다. 차베스가 부시를 향해 ‘악’이니 ‘거짓말의 왕’이니 꼬집어도 부시는 일일이 대꾸하지 않고 차베스의 이름도 거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의 설전에는 가시가 돋쳤다. 오랫동안 카스트로의 맹방을 자처해온 차베스는 부시의 남미 순방에 때맞춰 대미 비난 강도를 높였다. 부시는 8만5천명의 가난한 남미 주민들을 치료하기 위해 함정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차베스는 그가 월급의 일부를 주는 3만명의 쿠바 의사들이 아예 남미에 거주하면서 환자를 돌본다고 맞받아쳤다. 부시가 볼리비아 수재민들에게 100만 달러 지원을 약속하자 차베스는 1백50만 달러를 내놓았다.
부시가 남미의 민주주의 얘기를 꺼내면 차베스는 미국이 지원한 독재 정부들이 남미 민주주의를 질식시켰다고 말한다. 남미 설전에서는 일단 부시가 밀리는 것 같다. 2005년 이후 미국의 대남미 원조는 16억 달러인 데 비해 차베스가 원조한 금액은 54억 달러다. 부시가 남미 5개국 순방 세 번째 나라인 콜롬비아에 도착했을 때 그를 환영한 것은 2만명의 반미 시위대였다. 부시는 이어 과테말라의 우리베 대통령을 만나 긴밀한 관계를 강조했으나 반군들의 위협 때문에 6시간 만에 떠나야 했다.
부시와 차베스로 인해 중남미의 좌경화가 다시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한 국가의 노선이 성공했느냐의 여부는 국가 발전에 대한 기여도에 따라 좌우된다. 차베스의 반미 노선이 상징하는 중남미의 좌경화가 반드시 쿠바식 공산주의 열망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좌경 지도자들이 중남미에서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노선이 아니라 빈민층에 대한 복지 혜택 증가 때문이다. 중남미 빈민들은 지난 20년간 식량·주택·의료 면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다. 이런 소외는 좌경 정부 등장으로 완화되었다. 빈민 챙기기가 민심을 얻은 것이다. 그렇다면 좌경 정부들은 왜 반미를 부르짖는가? 그것은 과거 친미 정부들의 실정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난 패러다임의 변화일 뿐, 본질에서는 오히려 미국이 추구해온 시장경제 모델을 확산하는 자가당착을 연출했다.
차베스에게 6년 임기의 재선을 선물한 베네수엘라 유권자들은, 카스트로는 국민으로부터 모든 것을 앗아갔지만 차베스는 아무것도 빼앗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많은 것을 주었다고 말한다. 한 유권자는 차베스를 지지한 이유로, 정부로부터 저리의 대출금 1천8백 달러를 받아 자동차를 산 ‘혜택’을 들었다. 차베스는 빈민 복지를 확대하면서 이 정책의 정치적 구호를 반미로 포장했다. 국민들은 반미 덕분에 빈민들의 삶이 나아졌다고 믿는다. 


조용히 실속 챙기는 룰라 브라질 대통령과 대조


 
중남미 빈민들의 삶이 좌경 정부 등장과 함께 호전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상을 보면 미미한 변화에 불과하다. 중남미 인구 4명 중 1명은 아직도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살아간다. 하루 2달러의 생활비도 이들에게는 감지덕지다. 중남미는 아프리카를 제외하고는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소득 분배로 악명이 높은 곳이다. 이 지역 부자들의 10%가 전체 소득의 48%를 독식하는 데 비해 빈민들은 겨우 1.6%를 가져간다고 세계은행은 밝혔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이 지역 지도자들은 미국식 시장경제를 도입해 국영기업의 민영화와 무역 장벽 제거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부패와 관료주의 때문이었다. 이 지역 1인 소득은 1980년대에 0.7% 감소했고 1990년대에는 1.5% 증가에 그쳤다. 또한 빈민 계층은 줄어들지 않았다. 국정에 실패한 지도자들은 실패의 책임을 미국의 영향력에 돌렸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조셉 스티글리츠는 중남미의 좌경 실험은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라고 말했다. 이 지역 국가들이 앞으로 빈부 격차 해소에 실패하면 다시 우경화로 갈 수 있고 우경 정부에서 실패하면 또다시 좌경화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본질은 정치 노선이 아니고 경제성장의 성패이며 반미는 필요에 따라 이용하는 무늬에 불과하다. 과거의 실패 사례를 보면 반미 정책이 성공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차베스를 포함한 좌경 지도자들의 시급한 과제는 일자리 창출이다. 베네수엘라의 현재 실업률은 9%로서 차베스가 첫 선출된 1998년보다 겨우 2% 줄었다. 이 나라에는 괄목할 만한 산업 성장도 대규모 투자도 없다. 정부 규제와 국유화가 무서워 투자를 꺼리기 때문이다.
차베스는 지난해 12월3일 재선을 자축하는 성명에서 “사회주의는 사랑”이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사랑이 피부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는 반미 구호로 빈민들을 매혹시키면서 주요 자산을 국유화하고 동시에 사유 재산을 존중한다는 모순된 메시지를 보낸다.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은 차베스와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는 민주주의의 기본을 준수하고 대기업과 극빈 노동자의 이익을 절묘하게 조화시켰다. 브라질의 변신을 보고 세계도 놀라고 브라질 국민도 놀랐다. 이변을 가져온 가장 큰 요인은 룰라가 시장경제 정책을 부단히 추진한 점이다. 취업은 증가하고 통화는 안정되었으며 인플레는 잡혔다. 최저 임금도 상승하고 극빈 해소 프로그램은 주효했다. 세계은행은 각국에 브라질 모델을 도입하라고 권고하기에 이르렀다.
룰라의 친미와 차베스의 반미는 중남미의 대표적 두 흐름이다. 누가 더 현명한 선택을 했는지 아직 판단하기는 이르다. 냉전 시절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두고 닉슨과 흐루시초프가 벌인 ‘부엌 논쟁’이 한 가지 시사점을 준다. 흐루시초프의 손자가 미국 시민이 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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