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권태기' 벗어나는가
  • 조홍래(자유기고가) ()
  • 승인 2007.03.26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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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 시라크대통령 은퇴 선언에 반색..."재임 12년 허송세월만" 혹평 남겨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3월11일 40년의 정치 생애를 마감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세 번째 출마를 포기한 것을 용단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지만, 각종 스캔들로 바닥까지 추락한 지지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는 것이 중론이다. 프랑스 국민들은 그의 퇴장을 대체로 반기는 분위기이다. 전임 미테랑이 14년, 시라크가 12년간 대통령을 지냈다. 이들이 프랑스를 통치한 26년은 급변하는 현대사에서 긴 시간이다. 프랑스인들은 자연히 권태를 느꼈고 변화를 갈망했다.
시라크는 은퇴 성명에서 “프랑스와 평화를 위해 봉사할 새로운 길에 여생을 바치겠다”라고 말했다. 그 길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프랑스는 그가 그냥 조용히 사라지기를 바란다. 그는 드골의 영광을 추구했으나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고 심지어 미테랑만도 못했다.
시라크는 프랑스 역사에 두 가지 큰 흔적을 남겼다. 2003년 부시의 이라크 침공에 반대해 부시로 하여금 유엔 결의 없이 이라크로 출병하게 만들었다. 2005년에는 유럽연합(EU) 헌법을 국민투표에 부쳤으나 국민을 설득하지 못했다. 이 문제를 국민투표에 회부한 조처는 유럽의 야망을 좌절시킨 실수로 평가된다. 심지어 그로 인해 나치의 유대인 체포에 협조한 프랑스에 또 하나의 원죄를 추가했다는 비난마저 나온다. 시라크는 이래저래 인기 없는 지도자가 되었다. 프랑스의 국제적 위상보다 국내 문제에 매달린 근시안적 국정 스타일이 프랑스의 자존심을 망가뜨렸다는 것이다.                
미국은 시라크의 퇴장을 반기고 있다. 시라크는 부시의 눈엣가시였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에 맨 먼저 병력을 파견했을 때까지도 시라크는 부시의 든든한 동맹이었다. 그러나 이라크 사태가 터지면서 사정은 변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그만큼 반대한 지도자는 없다. 그의 예언대로 이라크 점령은 실패작이 되었다. 이 점에서 그의 혜안은 점수를 땄다. 아프가니스탄이 제2의 이라크가 되는 조짐이 나타나자 제일 먼저 군대를 철수했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테러와의 전쟁에서 독자 노선을 고집한 그의 선택이 마냥 축복일 수는 없다. 프랑스는 고립되었고 국제적 위상은 추락했다. 대권 후보들은 지난 4년간 미국과 사사건건 대립한 시라크의 노선을 ‘오만’으로 규정한다. 
시라크가 남긴 슬픈 유산은 또 있다. 실업률은 유럽에서 제일 높고 경제는 침체되었다. 국가 부채도 눈덩이처럼 불었다. 유럽의 악명 높은 농업 보조금 제도를 바꾸자는 요구를 그는 거부했다. 그 결과 무역자유화는 지연되고 개발도상국의 빈곤 해소는 차질을 빚었다. 그의 오불관언식 노선은 아프가니스탄과 레바논에서의 국제 평화 임무 수행을 방해했다.
유럽연합(EU)을 창설하고 확대한 것은 잘한 일이었다. 그러나 EU를 프랑스의 지배하에 넣으려던 시도는 과욕이었다. 전 사회당 출신 총리 로랑 파비우스의 논평을 빌리면 시라크의 치세는 프랑스와 유럽이 당면한 주요 현안에서 시간 낭비였다.
오는 5월 하야하는 시라크가 자신의 정치 역정을 회고하며 조용한 여생을 보낼 수 있느냐에 관심이 쏠린다. 그는 프랑스를 권태기에 빠뜨린 실정 외에도 이런저런 스캔들을 남겼다. 국가 원수에게 부여되는 형사소추 면책권에 가려 그동안 은폐되었던 여러 가지 비리 사건들이 재수사를 받게 될 것 같다.
가장 핵심적인 사건은 시라크가 파리 시장으로 있었을 때(1977~1995년)의 당 재정 비리다. 이 금융 범죄에 관여한 2명의 판사는 시라크가 재조사에 소환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말했다. 시라크는 이 사건과 관련해 모종의 반대급부를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수사관들은 시라크가 단순 참고인이 아닌 잠재적 피의자로 소환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사태를 예상한 듯 시라크는 3명의 측근을 검찰 요직에 임명했다. 이들은 모두 시라크가 연루된 사건을 담당한 검찰 부서에 배치되었다. 헌법재판소장에도 시라크의 측근이 임명되었다.
시라크 사건은 프랑스 사법 제도의 시금석이 될 판이다. 프랑스 검찰은 오랫동안 권력과 유착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번에 시라크 스캔들을 제대로 밝혀내면 이런 불명예를 씻을 수 있다. 프랑스에서는 지금까지 권력층이 관련된 크고 작은 스캔들이 터졌으나 법의 심판을 받은 사례는 거의 없다. 공정 수사를 고집하던 수사관들은 좌천되는 대가를 치르기도 했다. 이른바 ‘낭테르 스캔들’ 재판을 맡았던 한 법관은 시라크가 일반 국민처럼 기소된다면 “경천동지할 전례가 될 것이며 차기 대통령들에게도 교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재임 중 비리로 재판정 서게 될지 관심


 
시라크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추문들이 거짓이며 중상모략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의 재임 중 터진 불미한 사건들은 한둘이 아니다. 위조 선거인 명부, 유령 공직자에 대한 급여 지불, 시장 시절의 현금 가방 사건 등등…. 지난 5년간 5건의 부패 관련 재판이 열려 시라크 측근 몇 명이 유죄 선고를 받았다.
파리 시에 유령 공무원 명단을 만들어 이들이 받는 급여를 당에 헌납토록 한 사건이 어쩌면 시라크에게 가장 치명적일지 모른다. 파리 교외 낭테르에서 있었던 이 스캔들의 전임 수사관은 시라크가 관련된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2001년 이 사건을 심리한 헌법재판소는 시라크의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낭테르 사건에 관련된 한 증거에는 시라크의 서명이 들어 있다. 또한 시라크에게 불법 자금을 제공한 사실을 고백한 사람의 비디오테이프도 시한폭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정치 분석가들은 시라크 후임 대통령들이 재조사를 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전망했다. 프랑스 여론도 권좌를 떠난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우는 것이 프랑스의 영광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분위기다. 과거사보다는 미래 지향적인 프랑스 정치 문화의 냄새를 풍긴다. 시라크도 가고 2009년에 부시도 가면 프랑스와 미국 간에  봄바람이 불 것이라는 기대가 높다. 양국의 화해를 바라는 심정은 프랑스인이나 미국인이나 마찬가지다. 전통적 동맹 관계를 복원하는 것이 서로에게 이익이라는 판단이다. 국제 문제에서 러시아와 중국의 목소리가 커지는 것이 우려를 불러일으키는 시점에서 그런 변화는 고무적이다.
집권당의 대권 주자 니콜라 사르코지는 자유무역을 촉진하고 범죄를 근절하겠다고 다짐하지만 그럴 능력이 있는지는 미지수다. 사회당의 대선 후보 세골렌 루아얄은 여성이자 스스로의 표현처럼 ‘국외자’다. 다크호스로 등장한 제3 후보 프랑수아 바이루는 중도를 표방해 프랑스의 진로에 의문을 던진다. 시라크는 내심 사르코지를 미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라크 식 노선을 답습할 후보는 없는 것 같다. 누가 새 대통령이 되든 시라크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분위기를 감안하면 시라크의 여생에 위안이 될 일은 별로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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