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박 심하던 노인과 한가족처럼 되기까지
  • 유근원 (자유 기고가) ()
  • 승인 2007.04.03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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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간 입주가정부 생활했던 조선족 김옥련씨의 체험기

 
중국 랴오닝(遼寧) 지역신문 <료녕조선문보>에 한국에서 입주가정부 생활을 했던 중국 동포 김옥련씨의 글이 소개되어 따뜻한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나이 환갑에 고국에서 가정보모로’라는 제목의 수기에는 4년간 김씨가 겪었던 한 한국 가정에서의 애환과 서로 다른 문화 차이에서 오는 오해, 한민족 간에 흐르는 뜨거운 동질감 등이 융화되는 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김씨의 글을 요약해 싣는다.

‘갓 마흔에 첫 버선’이라고 나는 거의 환갑이 되어서야 한국 땅을 밟았다. 한국에 가서 첫 몇 달은 식당 일을 했는데 일이 서툴러 오래 있지 못하고 다시 택한 것이 가정보모였다. 집주인은 출판사 사장, 부인은 대학 교수였다. 몸이 불편한 노인이 계셨는데 집이 두 채라 따로 살았다. 이 집에 들어가기 전에 들은 말로는, 집 청소는 1주일에 두 번 정도 하면 되고 주로 노인을 돌보는 편안한 일이라고 했다. 백발의 노인은 걸음걸이가 불편하고 허리가 구부정했다. 당시 76세라고 했는데 얼굴엔 주름 하나 없었다.
나는 오전 5시면 일어나 세수하고 주방을 깨끗이 청소한 후 밥을 지었다. 6시 반에는 어김없이 밥상을 차려야 했다. 식사 후 설거지가 끝나면 집 청소를 시작해 38평 되는 집 두 채를 일일이 쓸고 닦았다.
입주 다음날 눈을 뜨면서부터 노인의 지시가 뒤따랐다. “밥은 압력밥솥에 오곡밥을 해라” “반찬은 뭘 해라” “무슨 양념을 얼마나 넣어라” 등등 끝이 없었다.
40년을 주부로 살림살이를 했지만 밥 한 끼 차리는 것이 이렇게 까다로울 줄은 몰랐다. 이렇게 되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노인은 “환갑 되도록 뭘 했냐”라며 화를 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사장이 육개장을 끓이라고 해서 곧장 시장에 갔다. 그런데 어디를 봐도 개고기 파는 데가 없어 헛물만 켰다. 저녁에 사장이 왜 육개장이 없냐고 해서 개고기 파는 데가 없어서 못 사왔다고 했더니 모두가 박장대소를 해댔다.
이렇게 삐걱삐걱 한 주일이 지나 좀 적응이 되는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노인의 생신을 맞게 되었다. 노인에게 생일 선물로 무얼 드릴까 생각하다가 1만6천원을 주고 먹음직한 복숭아 10개를 샀다. 중국에서는 노인에게 장수하라는 뜻으로 생일에 복숭아를 선물한다고 말하자 노인의 얼굴에 웃음이 피었다.
그러나 이것도 잠깐. 생일 손님들이 다 가고 설거지를 하는데 노인이 맥주 남은 것을 화초에 주라고 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맥주를 그대로 화초에 부었다. 이와 동시에 술잔이 날아오면서 노인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이년아, 생맥주를 그대로 주면 화초가 다 죽지 않느냐, 화초가 죽으면 네가 배상해라.”
노인의 그 서슬에 잘못했다고 싹싹 빌었지만 계속 욕을 퍼부었다. 참다못해 눈물을 쏟았다. “그래요, 배상하지요. 월급이 모자라면 두 달치라도 좋으니 꼭 배상할 테니 걱정 마세요.” 그제야 노인은 조용해졌다.
이튿날 당장 수첩을 사서 하나하나 메모를 해두었다가 잘 모르는 것이 있으면 뒤져보곤 했다. 한번은 그 집 며느리가 “시어머니께서 성질이 괴팍해서 지금까지 보모로 들어와 1년을 넘긴 사람이 없다”라고 넌지시 알려주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노인의 까다로운 성격은 이미 동네에서 평판이 나 있었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노인을 즐겁게 해주려고 온갖 정성을 쏟았다. 장을 보고 올 때면 가끔씩 노인이 좋아하는 옥수수튀김, 찐빵 등을 사다주었다. 그러면 바깥 출입을 못하는 노인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며느리 수술비 보태라고 5백만원 내놓기도
노인은 무서운 구두쇠였다. 채소를 다듬다가 한 잎만 버려도 금방 욕이 나왔다. 나물을 데칠 때도 물에서 건져 그냥 데치면 혼났다. 조리에 담아서 물기를 뺀 다음 데쳐야 가스도 아끼고 시간도 절약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1년이 지나는 사이 노인과 정이 들었다. 노인은 한낮에 둘만 있을 때면 시집 와서 고생한 이야기, 남편이 바람피운 이야기, 남편한테 괄시받던 이야기 등 감추어두었던 속내를 털어놓았다. 반면에 아들 자랑은 끝이 없었다. 아들은 효자 중 효자여서, 전처가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이혼했다고 했다. 때문인지 지금의 며느리는 노인의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는다고 했다. 사장이 효자는 효자였다. 나를 볼 적마다 ‘어떻게 해서든 어머님을 즐겁게 해드리라’는 당부를 했다. 1년이 지나서부터는 노인과 화투도 치고 윷놀이도 하게 되었다. 한 판에 20원 내기를 했는데 내가 이기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이겨야 노인은 속이 상해 계속 놀자고 하기 때문이었다.
딴 돈은 모아두었다가 닭튀김을 사서 노인에게 드렸다. 화투와 윷놀이에 재미를 붙인 노인은 후에 딸까지 화투판에 끌어들이고 점심은 배달을 시키는가 하면 내가 할 집안일도 하지 못하게 하면서 어울렸다.
3년째 되던 해에 참으로 평생 잊지 못할 일을 겪게 되었다. 집에서 편지가 왔는데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가 신장이식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장 보러 갈 적마다 신장기증자를 찾았지만 말이 쉽지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어디 가서 그런 사람을 찾는단 말인가? 고민 끝에 염치 불구하고 사장 부부에게 도움을 청했다.
사장 부부는 선뜻 1천만원을 내놓았다. 사장은 5백만원은 그냥 돕는 것으로 하고 나머지 5백만원은 월급을 받아 갚아나가면 된다며 부담을 갖지 말라고 했다. 사장 부인은 노인도 동의하신 일이니까 걱정하지 말라면서 우선 사람부터 살려야 한다며 돈을 안겨주었다. 돈을 받아든 나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며느리는 그 돈으로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았고 지금은 튼튼한 몸으로 생활하고 있다.
그 일이 있은 후 나는 이 집 가족의 일원이 된 것처럼 생활하게 되었다. 노인은 중국에 돌아가지 말고 자기와 함께 살자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나도 그러기를 바랐지만 4년째 되는 해 남편의 건강 상태가 나빠져 결국 귀국길을 택해야 했다.
그러나 귀국한 후에도 그 집과의 연락은 끊어지지 않았다. 노인은 사흘이 멀다 하고 전화를 걸어왔다. 새로 들어온 보모가 마음에 들지 않아 속상해 죽겠다며 울먹이기도 했다. 전화를 할 때마다 다시 한국에 나오라고 사정했다.
그것도 모자라 결국은 아들을 앞세워 그 불편한 몸으로 우리 집에까지 찾아왔다. 그때 노인은 우리 집에서 사흘을 묵었는데 그 사흘간 우리는 밤새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떠나는 날 다시 한국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그런데 그때의 만남이 노인과의 마지막 만남이 되어버렸다. 그로부터 1년 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던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머나먼 고국 하늘을 바라보며 노인의 명복을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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