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에는 남자 감독만 있다
  • 김지은 (자유 기고가) ()
  • 승인 2007.04.03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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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성 감독 작품 ‘딱 한 편’…여성 감독 보호·육성 정책 거의 없어

 
1990년대 페미니즘 열풍에 힘입어 21세기 들면서 여성 영화와 여성 감독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지점이 있었다. 2001년 가을에 개봉한 <고양이를 부탁해>는 여성 관객뿐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섰다.
2002년에는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 이미연 감독의 <버스 정류장>, 모지은 감독의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 2003년에는 박찬옥 감독의 <질투는 나의 힘>, 이수연 감독의 <4인용 식탁>, 윤재연 감독의 <여고괴담 세 번째 이야기: 여우계단>, 이언희 감독의 <…ing> 등이 많은 관객의 호응을 받았다. 그렇게 여성 감독의 작품이 한 해에 10편 이상 상영된 여성 감독 전성 시대가 있었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여성 감독들의 자취를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해 개봉한 국내 상업 영화 중에서 여성 감독이 연출한 작품은 딱 한 편뿐이다. 
이런 가운데 서울여성영화제(2007년 4월5~12일)가 올해로 아홉 번째를 맞았다. 극소수 여성 영화 마니아와 극렬 페미니스트들만의 페스티벌로 여겨졌던 서울여성영화제는 해를 거듭하며 열기를 더해가더니 지난해에는 국내 영화제로서는 유일하게 매회 관객 좌석 점유율 90%를 상회하는 기록을 세웠다. 볼륨만으로 따져볼 때 역사가 긴 프랑스의 ‘크레테이유 여성영화제’ 다음으로 큰 여성영화제다. 짧은 시간에 눈부신 성장을 했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될 법하다.
여성 영화인들은 여성영화제가 이처럼 초특급 성장을 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상업 영화와 비교해 조금은 무겁고 어려운 영화들이 등장하는 여성영화제가 90% 이상의 관객 좌석 점유율을 보였다는 사실은 단순히 마케팅의 승리나 홍보의 성공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다. 김선아 서울여성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는 이를 “여성 감독에 대한 목마름”이라고 해석했다. 여성 감독 특유의 섬세한 터치와 여성 감독들만이 가질 수 있는 문제의식을 담은 영화를 관람하고픈 절대다수 여성들의 갈망이 표출된 것이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많은 여성이 여성영화제 개막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곳에 가면 일반 극장에서는 볼 수 없었던, 아니 상업 영화들보다 더 많이 동감하고 감동할 수 있는 영화를 관람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매년 여성영화제에 참여했던 김진희씨(27)는 “여성영화제에서는 남성 감독의 작품에서 여성이 대상화·도구화되는 불편한 요소를 찾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세계 여성들이 느끼는 기쁨과 슬픔을 공유하는 감동도 맛볼 수 있다”라고 여성 감독들의 작품들을 평가했다.
하지만 의문은 남는다. 여성 감독에 대한 갈망이 그토록 큰데 왜 일반 극장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들어진 것일까? 일부 여성 영화인들은 날로 영화산업이 편협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실제로 상업 영화를 보완할 수 있는 대안 영화는 독립 영화나 다큐멘터리 영화라고 여기지 여성 영화를 떠올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일반 대중은 상업 영화, 장편 영화, 극영화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보니 여성 감독의 작품은 설 곳이 없다.
그 많던 여성 감독은 다 어디로 갔나
하나의 장르로 인정받지도 못하고, 왜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해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하지만 여성 감독은 분명히 존재해야 하며 좀더 많이 배출되어야 한다. 박효진 서울여성영화제 홍보팀장은 여성 감독이 왜 필요한지에 대한 질문 자체가 너무나 원론적이고 추상적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그것은 왜 남성 감독이 있어야 하는가를 묻는 질문과 똑같다. 너무 상식적 수준의 대답이지만 영화의 다양성과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여성과 남성 감독 모두 존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여성 감독의 역할과 존재 이유에 당위성을 느끼는 여성 영화인들을 중심으로 지난해부터 여성 감독 활성화와 관련된 포럼 개최를 준비하는 등 여성 영화감독과 여성 영화의 부흥을 모색했지만 별 호응은 없었다. ‘왜 여성 감독만 따로 분류하느냐’ ‘여성 감독만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등 비난의 여론만 들끓었다. 비판 여론에 부딪혀 오랫동안 준비해온 포럼은 한 번도 개최되지 못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여성 감독들의 활동 부진이 세계적 추세라는 점이다. 올해 초 영국의 여성영화제인 ‘버즈아이 영화제’에서 여성 영화감독들이 영국에서 여성이 영화를 만드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성토했다. 이들은 남성 제작자들과 영화 관련 권력 집단이 여성 감독에 대해 고정관념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뢰하지도 않아 대작 영화를 맡을 수 있는 기회 자체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2000년 영국의 여성 감독이 만든 장편 영화 비율이 7%였는데 지난해에도 그 수치에는 거의 변동이 없었다. 여성 제작자에게 관대하다고 평가받고 있는 할리우드 역시 상황은 비슷하다.  
물론 호주·캐나다 등 여러 나라에서는 여성 영화감독을 보호·육성하는 차원에서 여성영화제가 워크숍·세미나는 물론 실질적 네트워킹을 제공하며 여성 영화인들을 활성화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일종의 ‘여성 영화 쿼터제’라고 할 만하다.
그에 비해 여성 영화인들은 이렇게 반문한다. 한국 영화를 시시하고 돈 내고 보기 아깝다고 이야기하던 몇 년 전과 비교해 볼 때 지금 우리 영화는 얼마나 성장했느냐고. 그 비약적 성장이 가능했던 것은 스크린쿼터 사수처럼 우리 영화를 보호하고 육성하고자 했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아니냐고. 여성 영화인들이 여성 영화제를 통해 여성 감독의 역량을 활성화하고자 그토록 애를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선입견 버리고 밀어달라”
김선아 제9회 서울여성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지난해 이런 말이 영화계에 나돌았죠. ‘살찐 한국 영화, 빈약한 여성 감독’. 영화산업이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한국 영화에 대한 관심은 어느 때보다 고조됐지만 여성 감독들의 활약상은 최악이었습니다.”
김선아 서울여성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 겸임교수·사진)는 “지난해 개봉한 한국 상업 영화 가운데 여성 감독이 연출한 작품은 <D-day> 한 편뿐이다”라고 어려움을 호소했다. 영화산업이 날로 커가고 있지만 여성 감독의 질적·양적 팽창은 전혀 일어나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의견이다.
일부 영화 관계자들은 여성 감독의 활동이 저조한 이유에 대해 대중과 괴리된 작품 성향, 경제적 어려움, 스스로 추구하는 고립화 등 크게 세 가지를 꼽는다. 외부의 경제적 지원 없이 제작 활동을 하기 힘든 조건에서 여성 감독들은 중앙 무대에서 배제되고 소외될 수밖에 없으며, 그 때문에 소외된 사람들의 삶, 개인의 소통 문제 등 대중성과는 거리가 먼 작품들에만 여성 감독들이 자꾸 눈을 돌리게 된다는 것.
하지만 그녀는 이같은 발상은 “여성 감독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말한다. 여성 감독들의 활동이 저조한 이유를 블록버스터, 액션 스릴 영화 등을 선호하는 영화계 전반의 상황과 투자자들의 성향 등과 맞물려 설명할 수는 있지만 이들의 개인주의적 성향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여성 감독들의 소멸을 이끈 주범은 여성 감독은 어떠어떠하다는 선입견이다. 여성 감독들이 멜로 영화, 소외 이웃들을 조명하는 단편 영화만 찍는 것은 아니다. 이수연 감독은 공포 영화인 <4인용 식탁>을, 김은숙 감독은 산악 영화를 찍었고, 임순례 감독은 스포츠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여성 감독들은 늘 똑같은 것만 찍어’라고 생각한다. 그 고정관념과 선입견이 투자자들로부터 여성 감독 작품을 외면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서울여성영화제가 고립을 자청하는 여성 감독들에게 어떤 자극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감이 높다고 말했다. 여성 영화인들이 여성영화제를 통해 여성 감독들의 역할과 능력을 새롭게 조명해 ‘그들의 부흥’을 이끌어내는 것이 서울여성영화제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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