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아들, 대선, FTA 다 싫다"
  • 광주·이진상 (언론인) ()
  • 승인 2007.04.09 09:5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타격 가장 심한 '호남 민심' 르포

남도는 지금 온통 꽃동네다. 지리산 자락의 노란 산수유와 섬진강가의 하얀 매화가 꽃 사태를 이루는가 싶더니, 어느새 벚꽃이 무더기로 피어 봄빛을 풀어헤친다. 벚꽃을 시샘하듯 영산강 배꽃들도 하나 둘 얼굴을 내민다. 완연한 봄이다. 속살을 살짝 드러낸 붉은 황토 사이로 농민들의 발걸음이 부산하다.
“꽃이 피고 봄이 오면 뭐 한당가. 심을 게 있어야제. 맨날 삽 들고 나오기는 하요만, 참말로 깝깝하요. 심을 것만 없는 게 아니라 이제 키울 것도 없어져 부렀당게.”
광주에서 자동차로 40여 분 거리에 있는 화순군 동면. 이 마을에 사는 서칠성씨(43)는 우루과이라운드(UR)에 따른 세계무역기구(WTO) 체제 출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에 이어 한·미 자유무역협정까지 타결되어 농민들만 죽을 맛이라고 했다. 서씨는 “한·미 FTA가 농산물 가운데 유일하게 토종을 지키고 있는 한우 농가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다”라고 말했다.


한·미 FTA는 농도 전남에 직격탄이 되고 있다. 변변한 공장 하나 없는 전남 농촌 지역은 쌀과 한우가 농가 소득원의 전부나 마찬가지다. 이미 고사리며 참깨, 마늘은 중국산에 무너진 지 오래다. 전남 화순·함평·영암·장흥 등지 3만8천여 농가에서 사육 중인 한우는 32만1천여 마리로 전국의 16% 정도다. 그런데 이들 중 70%가량이 10마리 안팎을 키우는 영세농이다. 화순의 축산농민 황의수씨(41)는 지난 3월 송아지 가격이 15% 정도 떨어졌지만 입식을 하지 않았다. 그는 “미국에다 자동차 팔아 먹을라고, 우리 축산 농민이야 죽든지 말든지 갈비에다 쇠고기까지 다 내줘버렸는데 누가 송아지를 키울라고 하것냐”라고 말했다.
현재 고급우(거세우) 암소 6백kg의 경우 5백72만원에서 5백29만원으로 43만원쯤 떨어졌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재개되면 가격은 최고 100만원 더 떨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농민들은 도대체 앞으로 무엇을 심고, 키워야 할지 모르겠다고 아우성이다. 대다수 축산농가들은 정부의 정책 자금을 지원받아 시설을 확충한 바람에 빚이 수억원에 달하고 있다. 몇 년 전 WTO 농산물 수입 개방을 앞두고 정부 자금으로 방울토마토 등 유리 온실을 지었다가, 폭삭 망한 농민들이 이제 다시 미국산 쇠고기에 무너질 처지이다.
한·미 FTA는 쇠고기뿐 아니라 양계 농가들에게도 걱정거리이다. 화순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함평군 해보면 금곡농장 이선열씨(52)는 “지금도 수입 닭이 25%를 차지하는데 개방되면 어느 정도 갈지 불 보듯 뻔하다. 우리나라 생산비는 kg당 1천2백원인데 미국은 관세가 붙어도 8백원밖에 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한·미 FTA가 타결된 이후 전남 농민들은 날마다 거리로 뛰쳐나오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농민들 사이에서 나온 3모작 ‘아스팔트 농사’를 짓기 위해서다. 강광석 전국농민회 광주·전남연맹 정책위원장은 “한·미 FTA 협상은 끝까지 미국의 요구와 일정에 따라 일방적으로 끌려간 것이다. 이번 협상은 원칙적으로 무효이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국회 비준을 막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전남 서부권인 목포·신안·무안 지역은 한·미 FTA에다 난데없는 선거 바람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오는 4월25일 치러질 무안-신안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차남 홍업씨가 민주당 후보로 나서면서 지역 분위기가 뒤숭숭하다. 무안읍 터미널에서 만난 서 아무개씨(58)는 “무안 사람들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김대통령이야 우리가 존경하고 받들 수 있지만, 아들까지 모실 수는 없는 것 아니여”라고 대뜸 언성을 높인다.
무안·신안 국회의원 보궐선거 예비 후보자는 모두 7명. 초반 판세는 김홍업씨(56)와 민선 초대와 제2대 무안군수를 지낸 이재현씨(70) 간 맞대결 양상을 보이고 있다.
무안 지역에서 ‘우리 동네 사람 밀어주자’는 지역주의 분위기도 감지되지만, 밑바닥 정서는‘대략 난감’으로 표현된다. 김홍업씨를 그냥 후보로 보는 시각과 ‘김대중 선생님’의 ‘아드님’으로 바라보는 이중 시각에서 오는 곤혹스러운 표심이다.
무안군 망운면에서 농사를 짓는 김덕용씨(63)는 지역 자존심과 DJ에 대한 생각이 교차하는 듯했다. “생각 쫌 해보쑈. 꿈에서도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을 찍어주라고 하니 민주당이 해도 너무한 것 아니요. 근디 김대중 대통령 아들이 떨어지면 대통령 얼굴이 뭐가 되것어. 참말로 고민이시.”

 

“DJ는 아들 출마를 포기시켜라”


광주·전남 시민 사회 단체는 김홍업씨 출마에 차가운 반응을 보내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당초 김홍업씨 출마의 부당성을 지적하던 수준에서 이제는 직접 DJ를 겨냥해 출마 포기를 종용하고 있다. 지역 시민·사회 단체 대표와 문화계 인사들로 구성된 ‘지역 자존 지키기 100인’은 지난 4월4일 옛 도청 민주의 종각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김홍업씨의 불출마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나섰다. 이들은 “권력형 범죄로 복역 중 가석방과 사면 복권된 김홍업씨가 무안·신안 보궐선거에 출마를 강행한 것은 지역민을 볼모로 하는 정치 행위이다”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DJ가 아들의 출마를 자제시키기는커녕 명예 회복을 위해 주민들의 심판을 받으라고 했다고 하니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이는 아들의 명예는 중요하고 지역민의 명예는 안중에도 없는 ‘정치 도덕 불감증’이다”라고 꼬집었다. 이들은 “둘째 아들의 보선 출마는 결코 자신의 명예 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지역민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일이다. 남은 여생을 조국 통일과 지역민을 위해 매진해달라”고 당부했다.
시민단체와 지역 정가의 반발 기류는 크게 두 갈래다. 하나는 김홍업씨 개인의 흠결이다. 김홍업씨가 이권 청탁 등의 혐의로 2003년 징역 2년에 벌금 4억원의 확정 판결을 받았다는 범죄 전과를 들고 있다. 즉 DJ 재임 시절에 청탁 비리로 국민의 정부에 누를 끼쳤고, 지역민의 얼굴에 먹칠을 한 인물이 어떻게 아버지 고향에서 출마하겠다는 것이냐는 반발이다.
또 다른 기류는 ‘전라도를 뭘로 보겠느냐’는 외부의 시선이다. DJ 큰아들 홍일씨는 권노갑씨 지역구를 물려받아 금배지를 달더니, 이제 작은아들까지 한화갑씨 선거구를 차지해 국회의원이 되려 한다는 것이다. 민주당 현역 의원인 이상열 전남도당 위원장조차 “김홍업씨 전략 공천을 두고 아직도 전라도는 DJ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느냐고 말들이 많다. 호남 이미지가 구겨지고 있다. 전라도 전체가 욕을 먹고 있다”라고 아쉬워했다.
무안·신안 보궐선거 승패는 무안 지역 표심이 가를 것으로 관측된다. 신안 지역은 유력 후보도 보이지 않은 데다 “그래도 김홍업을 찍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라는 것이 바닥 분위기이다. 민주당에 대한 반발 정서가 누그러지지 않고 있지만, 투표소에 가면 찍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반대로 무안은 지역 출신 후보가 건재한 데다 민주당에 대한 반발심이 크고, 인구도 신안 보다 2만명이 더 많아 표심이 요동칠 개연성은 충분하다. 문제는 김홍업씨 뒤에 존재하는 거대한 ‘DJ 후광’을 걷어낼 수 있느냐의 여부다. 광주 지역 시민단체들은 김홍업씨 출마를 동교동계의 정치적 재기 시도로 해석하고 있다. 즉 대선 정국에서 동교동계가 킹 메이커로 나서려는 것 아니냐는 얘기이다. 범여권의 정계 개편이 지지부진하고, 서부 연합의 유력 주자가 떠오르지 않는 정치적 진공 상태를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손학규 바라보는 눈길은 부드럽지만…


그래서인지 대선 정국을 바라보는 호남의 심경은 복잡다단하다. 겉으로는 대선에 애써 무관심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면밀하게 주판알을 튕기며 ‘될 사람’을 고르고 또 고르고 있는지 모른다. 호남 최대 재래시장인 양동시장의 상인 이성일씨(67)는“살기 바쁜디 대통령 선거에 뭔 관심이 있것소. 누가 되면 뭐 한다요. 그 사람이 그 사람이제”라면서 별 관심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근디 손학규 지사는 왜 혼자 달랑 나왔당가. 좀 여러 사람 데리고 나오제. 정운찬 총장은 교수만 했는디, 정치하면 잘할란가 몰라. 열린우리당하고 민주당하고 통합한다고 뭔 수가 나오것어, 될 후보가 있어야제.” 대선에 관심 없다던 이씨는 한두 마디를 건네자 어느새 ‘정치 평론가’로 변신했다.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를 바라보는 눈길은 전라도 말로 일단 ‘보드랍다’(부드럽다). 그런데 한나라당에서 나오면 금방이라도 범여권 후보로 확 밀어줄 것 같던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다. 그렇다고 버린 것도 아니다. 각종 매체의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손 전 지사의 탈당에 대해 전국적으로는 잘못된 결정이라는 여론이 높지만, 광주·전남 지역만 놓고 보면 찬반이 엇비슷하다. 지역 오피니언 리더 그룹에서는 탈당 찬성이 절대적이다. 광주일보가 각계 오피니언 리더 2백27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한 결과 손 전 지사의 탈당에 대해 69.6%가 ‘잘한 일이다’라고 대답할 정도였다.
손 전 지사의 탈당이 한나라당의 보수적 정체성을 재확인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범여권 후보 진영의 흥행에 보탬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작용하고 있다. 손 전 지사가 호남으로 대표되는 범여권 진영의 ‘구원 투수’가 될 것인지, 아니면 ‘치어 리더’에 그칠 것인지에 대한 예측은 아직 안개 속이다. 손 전 지사는 그동안 광주·전남과 별다른 인연을 맺지 못한 데다 한나라당 출신이어서 아직은 호남에서 유력한 대안으로 뜨지 못하고 있다. 손 전 지사의 사위가 전남 강진 출신이라는 인연이 거의 유일하다.
광주시의회 한 의원은 “호남 유권자들이 손 전 지사를 밀어서 될 사람으로 생각하기보다는 한나라당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 손 전 지사와 호남이 서로를 알아가는 스킨십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손 전 지사에게 스킨십이 필요하다는 주문은 역으로 호남이 손 전 지사를 잘 모르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비호남 대선 예비 주자인 정운찬 전 서울대총장도 손 전 지사와 마찬가지다. 정 전 총장은 대선 후보로 거론된 이후 처음으로 지난 4월4일과 5일 이틀 동안 광주를 방문했다. 범여권의 각 정파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는 정 전 총장은 광주에서 사실상 특강 형식을 빌려 대선 행보를 본격화했다. 그의 광주 특강은 사실 오래전부터 기획된 것이었다.


정운찬에 대한 평가 크게 엇갈려


 
이름을 밝히지 말라고 요구한 광주대 한 교수는 “한 달 전에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의 지지 그룹 인사로부터 광주 특강을 제안받고 준비했다. 이들은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인 정 전 총장 직계 제자인 교수들과 경제계 인사들로 사실상 참모로 본다”라고 밝혔다.
정 전 총장은 전남대 용봉홀에서 시민·학생 등 5백여 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한국의 미래’라는 주제 특강에서 한·미 FTA에 비판적인 견해를 제시해 지역 정서와의 조율을 시도했다. 정 전 총장은 특히 1980년 5월 당시 서울대 기숙사 사감으로서 기숙사에 진입한 수백 명의 전경들을 막아보려다 봉변을 당한 적이 있다고 소개하며 5·18과의 역사적 인연을 언급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그는 또 특강을 마무리하면서 “대학은 공부만, 학문만이 전부가 아니다. 때로는 역사의 광장 한복판에 있어야 한다”라고 강조해 사실상 대선 행보에 돌입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을 낳았다.
전남대 한 교수는 “광주 학계에서 정 전 총장에 대해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분이 많다. 비정치권 인사 가운데 대통령을 할 만한 사람은 정 전 총장밖에 없다는 분도 있다”라고 말했다. 학계의 우호적 시선과 달리 시민들의 평가는 다소 엇갈린다. 특강 현장에서 만난 윤명길씨(41)는 “정 전 총장의 교육과 경제에 대한 식견은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험난한 대선 판에서 온실 속 화초 같은 교수 출신이 적응해나갈지 의문이다. 제2의 고건이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라고 말했다.
대선이 8개월 앞으로 다가왔지만, 호남 사람들은 여전히 말이 없다. 한·미 FTA로 농민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DJ와 함께 퇴장한 줄 알았던 옛 정객들은 돌아와 낡고 낡은 <목포의 눈물>을 다시 틀어대고 있다. 한·미 FTA도, DJ 아들도, 대선판도 영 성에 차지 않는다. 한마디로 이 모든 상황을 반전시킬 정치적 메시아를 고대하는 분위기이다. 그래서일까. 올봄 유난히 기승을 부리는 황사 바람에 영산강 배꽃조차 새하얀 제 빛깔을 잃어가고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