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 폭탄' 돌리고 돌리고
  • 김 행 편집위원 ()
  • 승인 2007.04.16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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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통령, 명예 회복·2007 대선 노리고 '비밀 병기' 유장관 본격 투입

 
마침내 유시민 보건복지부장관이 정치권 전면에 등장했다. 그것도 화려하게, 절묘한 시기에 등장한 것이다. 국회의 국민연금법 개정안 부결이 발단이 되었다. 국민연금 개혁은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다. ‘더 내고 덜 받자는 것’이어서다. 그러니 인기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미래 세대의 과도한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개혁안을 위해 그의 ‘정치적 경호실장’을 자처하는 유장관을 보건복지부장관에 임명했다. 연금법 개정안 부결은 참여정부의 최우선 개혁 과제와 이를 추진해온 유장관이 사실상 국회로부터 비토당한 것을 의미한다. 노대통령과 유장관이 함께 체면을 구긴 셈이다. 자존심 강한 노대통령이 어떻게 구겨진 체면을 세울지 궁금하다. 그것은 ‘유시민 폭탄’ 돌리기로 시작될 조짐이다. 유장관은 국민연금 개혁 좌절의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했다. 그러나 노대통령은 한참 뜸을 들이다 결국 ‘유보’했다. 이어 “개혁 과제를 완수하라”는 지시가 따랐다. 이 소동 속에서 유장관은 국민연금 개혁의 상징으로 우뚝 떠올랐다.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오히려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비토한 국회가 졸지에 반개혁 세력으로 낙인찍혔다.
노대통령의 유장관 사표 수리 유보는 유장관을 ‘개혁적인 정치인’으로 격상시키기에 충분했다. 결국 각 정당 원내대표들은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서둘러 처리하기로 합의했다. 유장관의 ‘사퇴 쇼’와 노대통령의 대국회 압박에 굴복하고 만 셈이다. 이른바 ‘유시민 법’이 탄생되기 직전이다. 일각에서는 노대통령이 유장관에게 사표를 제출하라고 종용했다는 설도 있다. 국민연금법을 ‘개혁 과제’로 확인시키고, 유장관의 사의 표명으로 입법부를 굴복시키는 동시에, 최종적으로는 유장관의 존재와 개혁성을 널리 각인시키려는 전략이었다는 것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유장관 띄우기에 대성공을 거두었다는 데 이의가 없다.
국민연금법 개정안의 국회 부결은 유장관의 캐릭터 때문이라는 지적이 만만치 않다. 열린우리당을 포함해 그에 대한 정치권 전반의 거부감이 연금법 처리를 방해했다는 것이다. 이같은 평가를 받는 유장관이 연금법 개정이 부결되자 “우리는 좌절한 채 연금 개혁을 포기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국민을 위해, 우리는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국회가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부결시킨 4월2일에도 어김없이 8백억원의 국민연금 잠재 부채가 더 쌓였습니다. 내일도 모레도 날마다 그만큼의 부채가 더 쌓여갈 것입니다. 어제의 좌절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 재정안정화 개혁은 변함없이 절박한 국가적 과제입니다”라고 국민에게 호소했다. 국민의 감성 포인트를 정확히 찌른 유시민식 화법이다.
회견 중 개혁안이 통과되면 국민 부담이 더 늘어난다는 내용은 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 그가 이번에 개혁 과제로 내건 연금법은 40년 가입 기준으로 소득의 60%를 연금으로 받게 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 평균 가입 기간이 20년에 불과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지금 세대가 연금으로 받을 수 있는 돈은 월 30만원 수준이다. 그런데도 “이 정도도 많으니 덜 받으라”며 여론을 반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제 그는 반개혁 세력과 온몸으로 맞서온, 맞설 수 있는 대권 주자의 한 명으로 화려한 조명을 받게 되었다.
2002년 12월20일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밤 11시30분쯤. 노무현 당선자가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개혁당, 맨 먼저 만난 인물이 바로 유시민이다. 포장마차에서 둘이 러브 샷을 하며 승리를 만끽하던 모습이 기억에 새롭다. 노대통령과 유장관 사이를 ‘영혼의 쌍둥이’(<딴지일보>) ‘사랑하고 보호하는 관계’(열린우리당 김형주 의원)라고 한 표현은 시적이기까지 하다. 둘은 참 닮았다. 직설적 화법, 상황을 치고 나가는 승부사적 기질, 정반대의 시각에서 무모한 듯 보이는 도전, 피아를 명확히 가르는 전선 구축술, 탁월한 정세 파악 능력 등.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면바지에 노타이 차림으로 의원 선서를 한 유시민의 모습과 극회 청문회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내던지던 노무현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그는 현 정치권에서 몇 안 되는 ‘엔터테이너 정치인’이다.


“노무현과 유시민은 영혼의 쌍둥이”


 
유장관은 “2008년 2월25일 아침 집에서 늦잠 잘 수 있으면 정말 행복하겠다”라고 했다. 노대통령과 임기를 같이하겠다는 뜻이다. 2004년 총선에서 당선된 뒤에는 보좌관들을 모아놓고 “앞으로 4년은 확실히 책임지겠지만 그 이후는 보장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올해도 “복지부장관으로 노대통령과 임기를 같이하고 내년 국회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라고 했다. 그의 말 어디에서도 ‘차기’나 ‘대권’은 없다. 그렇다고 그가 이대로 침잠할 것으로 보는 시각은 거의 없다. 그에게는 사이버 공간을 달구는 골수 팬들이 있다. 그는 온라인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다. 그의 홈페이지는 정치인 전체 점유율 가운데 유일하게 20%대에 이른다. 다른 정치인은 모두 한 자릿수다.
그를 보건복지부장관에 기용해 연금 개혁을 맡긴 것도 노대통령의 ‘원려’로 보아야 한다. 물론 현재 대선 주자로서 유장관의 위상은 미약하다. 그가 내각에 참여한 뒤에는 의미 있는 지지도가 발표된 바 없다. 유장관은 지난해 열린우리당 2·18 전당대회 때 여론조사에서 여권 주자 가운데 4위를 차지했다. 당시 그를 앞선 주자는 정동영·김근태·이해찬 세 사람뿐이었다. 천정배 의원을 포함해 나머지를 밀어냈다.
노대통령은 유장관의 당적이 문제되자 “정리할 필요 없다”라고 두둔했다. 그런 노대통령을 믿었을까? 그는 “내 발로는 나가지 않겠다”라고 버텼다. 열린우리당이 대변인까지 내세워 탈당을 종용했지만 오불관언으로 여기까지 왔다. 만약 유장관이 연금법 개정안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열린우리당에 복귀하게 된다면, 유장관의 열린우리당 당적을 그토록 감싼 노대통령의 의도가 명료하게 나타날 것이다.
지난해 노대통령이 유장관을 기용할 때 벌어진 상황도 먼 얘기가 아니다. 유장관을 고집하자 열린우리당 이종걸 의원 등 20여 명이 유장관 임명 반대에 서명했다. 그해 5월 지방선거 참패를 그가 몰고 올 것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그때도 노대통령은 ‘대통령 인사권’을 앞세워 밀어붙였다. 장관이 된 뒤 그는 “저에 대한 야당과 일부 언론, 우리당 일각의 비판과 걱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의 부족함에서 빚어진 일로 겸허하게 받아들입니다”라고 낮은 포복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그의 입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여의도의 문제아’이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독극물” “청년 취업 책임은 각자가 지는 것”이라는 등의 독설은 그의 입에서 거침 없이 터져나왔다. 열린우리당은 우려한 대로 5월 지방선거에서 대참패를 기록했다.
다시 그의 행적을 상기해보자. 2002년 연초부터 지속적으로 노후보 지지율이 곤두박질치자 그해 8월, 신문에 써왔던 정치 칼럼의 절필을 선언했다. “운동장 안에서 공공연하게 반칙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심판이 반칙하는 사람 편을 들고 있다. 중계석을 박차고 나와 운동장에 뛰어들어야 할 상황이다”라며 발가벗고 나서서 노후보를 도왔다.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 때는 개혁당을 이끌고 합류했고, 대연정과 대통령제 개헌 등 노대통령이 정치적 화두와 승부수를 던질 때마다 방패 노릇을 해온 유장관. 그는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노대통령 비판이 최고 수위에 달했을 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일갈했고, 이른바 열린우리당 ‘기간당원제’ 폐지를 제기한 정동영계를 “용서할 수 없다”라며 직설적 공격을 퍼부었다. 그는 열린우리당 내에서 자신이 차지철이나 이기붕 취급을 당한 것에 억울해한다. 이런 유장관과 노대통령의 관계는 숙명적이다. 그는 2007년 대선을 준비하는 노대통령의 비밀 병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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