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밀’ 창고, 뒷문이 활짝
  • 정락인 편집위원 ()
  • 승인 2007.05.14 09:4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술 유출, 지난해만 31건 적발…보안 의식 허술한데 범죄는 갈수록 지능화

 
국내 최대 자동차 산업 기밀 유출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주고 있다. 범인은 내부에 있었다. 기아자동차 전·현직 직원들이 공모해 자동차 생산기술을 중국에 팔아넘기려고 했다. 이 중 차체 용접과 조립 기술, 품질 검사 기준 자료 등은 이미 중국 자동차업체로 넘어갔다.
국가정보원에 따르면 기아자동차 전·현직 직원 5명은 작년 11월부터 9차례에 걸쳐 쏘렌토 승용차 조립 기술과 신차 개발 계획 등 57개 회사 기밀사항을 빼돌렸다. 기아차 퇴직자들이 세운 자동차 기술 컨설팅 업체에 팔아넘긴 것이다. 유출된 기술이 모두 중국으로 넘어갔을 경우 22조3천 억원의 피해가 예상되는 규모였다.
한국이 국제 산업 스파이들의 활동 무대가 되고 있다. 스파이들은 첨단 정보기술(IT)과 풍부한 상용 기술을 호시탐탐 노린다. 언제든지 상용화가 가능한 IT, 반도체, 액정표시장치(LCD), 휴대전화 등은 1순위 타깃이다. 최근에는 자동차나 조선 등으로 분야가 확대되고 있다.
반면 보안 기술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보안 의식도 아주 취약하다. 귀한 것은 많은데 지키는 사람이 없는 것과 같다. 지금 이 시간에도 산업 기밀이 해외로 줄줄 새나가고 있다. 국가정보원 산업기밀보호센터는 2003~2006년 총 92건의 해외 불법 기술 유출 사건을 적발했다. 해외로 유출되었을 경우 피해 금액이 95조원으로 추정되는 엄청난 규모이다. 산업 기밀을 유출하다가 적발된 건수도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2003년 6건이던 것이 지난해에는 31건으로 껑충 뛰었다.
전문가들은 적발되는 사례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해당 기업체 대부분이 기술 유출을 알지 못하거나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고, 또 못하기 때문이다. 일부 대기업을 제외하고는 경영진의 보안 의지가 부족하고 전담 조직도 갖춰져 있지 않다. 갈수록 지능화하고 있는 첨단 기술 유출에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중소기업의 경우 보안의 사각지대나 다름없다. 2003년 이후 적발된 기술 유출 사건의 절반이 넘는 62.7%가 중소기업에서 일어났다. 국정원 산업기밀보호센터 관계자는 “국내 기업들의 보안 관리 수준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 대응에 그치고 있다. 중소기업의 경우 기술 유출은 곧 기업이 망하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강조했다.
산업 스파이의 표적은 대기업에 국한하지 않는다.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도 예외가 아니다. 일반 기업은 물론이고 국가 출연 연구소까지 확산되고 있다. 해외로 빼돌려진 산업 기밀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유출 유형도 과거의 기술 판매 등을 목적으로 하는 개인 주도형 기술 절취에서 외국 정부와 연계되거나 기업형 사건으로 대형화하고 있다.
한국은 그동안 몇 번에 걸쳐 산업 스파이에 대해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1998년에는 국가 기밀과 다름없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기술 관련 영업 비밀이 타이완의 NTC 사에 유출되었다. KSTC라는 유령 회사의 간부들이 삼성전자, LG반도체의 전·현직 연구원 14명을 꾀어 기술 자료를 빼돌렸다. 피해액이 약 1조2천5백억원에 달했다.
2001년 미국의 포드자동차는 대우자동차 인수를 추진하면서 6주간 2백여 명을 투입해 실사를 벌였다. 국내 5개 공장은 물론 해외 11개 공장까지 샅샅이 뒤졌다. 실사를 마친 포드자동차는 느닷없이 대우자동차 인수 포기를 선언했다. 대우자동차는 국외 판매회사와 부품업체 등의 정보까지 포함해 수만 건의 영업 정보를 고스란히 내준 셈이다.
최근에는 인터넷 게임업체인 엔씨소프트의 ‘리니지3’ 핵심 기술이 일본 게임업체로 유출되어 파문이 일었다. 이 회사 개발팀의 전·현직 직원이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 엔씨소프트는 약 1조원 상당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잠정 집계했다.
이런 사건들은 국내 기업들이 당하고 있는 수많은 산업 스파이 사건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국가 간에는 외교 분쟁을 의식해 산업 기밀 유출 사건이 발생해도 쉬쉬하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있다.

 
합법 가장한 기밀 유출도 급증


 
최근 산업 기밀 유출은 합법을 가장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기업 합병·매수(M&A) 또는 컨설팅 방식을 동원한다. 각종 실사, 공동 연구, 기술 자문 과정도 산업 스파이 활동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영화에서는 보통 산업 스파이가 회사의 보안 시스템을 뚫고 기밀을 빼오는 것처럼 묘사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산업 스파이는 기업의 내부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언제든지 기밀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다. 금전적인 유혹과 창업 욕심, 처우 불만 때문에 스파이로 돌변하고 있다.
국정원 조사에서도 기술 유출자의 85% 이상이 전·현직 내부자들이었다. 협력·용역 업체에 의한 기술 유출 사례도 증가하고 있다. 사회 전반에 만연한 한탕주의가 문제이다. 산업 스파이 활동은 상대 회사가 기밀이 누설된 것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하는 데 역점을 둔다. 절취보다는 복사를, 협박보다는 매수를 앞세워 더욱 음성화한다. 기술을 빼돌리는 수법도 다양해지고 있다. 메신저나 전자우편, 디지털 카메라와 MP3, 휴대전화 등 예외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업보안연구소 김종길 소장은 “해외로 넘어간 기밀은 추적이 어렵다. 정보는 무형이어서 유출되면 발견이 안 된다. 원본은 남아 있어서 더욱 어렵다. 내부 통신과 인터넷을 분리하고 각 부서 단위로 인터넷을 활용할 수 있는 PC를 두는 대책이라도 마련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지난 4월28일부터 ‘산업기술유출방지법’이 발효되면서 기술 유출자에 대한 처벌이 대폭 강화되었다. 해외로 기술을 유출한 것을 신고하면 1억원 내에서 포상금도 지급한다.
정부는 지난 2003년 국내 첨단 기술의 해외 유출로 인한 국부 손실을 막기 위해 국정원에 산업기밀보호센터를 설립했다. 국정원 산업기밀보호센터는 첨단 기술을 보유한 기업체, 연구소 등을 대상으로 산업 스파이 색출 활동을 벌인다. 산업 보안 교육, 컨설팅 등 사전 예방 활동도 함께 하고 있다. 산업 스파이 신고전화(111)와 홈페이지(www.nisc.go.kr)를 통해 24시간 산업 기밀 보호 관련 상담 및 각종 정보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기술 유출이 우려되는 징후를 발견했을 때는 전문 요원도 지원해준다.

예방 ‘철통’…유출자는 ‘중형’
외국의 산업 스파이 대처 현황/각종 법률로 ‘이중삼중’ 기술 보호

각국은 자국의 첨단 기술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나서고 있다. 미국은 1966년에 ‘경제 스파이법’을 제정했다. 외국 기업이나 정부 기관 등과 연계해 영업 비밀을 유출할 경우 ‘산업 스파이’ 죄를 적용한다. 개인은 15년 이하의 징역이나 50만 달러 이하의 벌금형에 처한다. 법인에는 1천만 달러 이하의 벌금을 부과한다. 1988년 제정된 종합무역법 5021조에 의거,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는 외국 업체의 기업 인수에 제동을 걸고 있다. 2002년에는 ‘방첩활동 강화법’을 제정했다. 국가방첩관실(ONCIX)을 중심으로 중앙정보국(CIA), 연방수사국(FBI), 법무·국방·국무·에너지부 등 전 방첩 기관이 참여하는 중앙집중식 체제를 구축했다.
일본은 영업 비밀을 포함한 지적 재산의 보호를 국가의 생존 문제로 규정하고 있다. 2002년에 지적재산기본법을 제정했다. 2005년에는 ‘부정경쟁 방지법’을 개정해 영업 비밀 공개자에 대한 처벌 등을 대폭 강화했다. 경제산업부는 2003년에 기업의 지적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해 ‘기술 유출 방지 지침’ ‘지적 재산 취득 관리 지침’ 등을 제정해 시행하고 있다. 내각 정보조사실(CIRO) 주도로 기업 및 경제 단체와 유기적인 협조를 통해 산업 기밀을 보호하고 있다. 중국은 2003년 ‘국가안전법’을 제정해 산업 기밀 누설을 국가 안전을 해치는 행위로 간주해 중형에 처한다. 2000년에는 ‘인터넷 관련 기술 보호법’을 제정해 인터넷상에 게재되는 정보를 사전 검열한다. 첨단 기술 또는 국가 기밀을 유출한 사실이 적발될 경우 관련자를 중형으로 처벌하고 있다. 러시아도 첨단 기술 인력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고 있다. 1990년대 초 옛 소련 붕괴 이후 핵·우주선 등 핵심 과학자들의 서방 진출이 급증하면서 나온 조처이다. 모든 공직자는 외국인과 접촉시 반드시 보고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2004년 7월 푸틴 대통령의 포고령으로 러시아연방보안부(FSB) 조직을 개편, 경제방첩실을 통해 기술 보호 활동을 강화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