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 전선’에 황혼이 있으랴
  • 유근원 (자유 기고가) ()
  • 승인 2007.05.1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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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에 신사업으로 ‘인생 역전’…경로당도 창업정보센터로 속속 탈바꿈

 
경로당이 변했다. 장기나 화투, 바둑 등으로 소일하던 곳이 부업 일터나 창업정보센터로 바뀌고 있다. 적극적인 노인들은 이미 경로당을 박차고 나가 창업 전선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 5월7일, 경기도 양평의 용문산 중턱. 아름드리 은행나무 주변에서 방송용 카메라 장비를 든 다섯 명의 할머니가 토론에 열중이다. ‘황혼의 길손’이라는 다큐멘터리 프로덕션(경기 안산 본오동 소재)의 스태프들이다. “이 장면까지만 찍고 다음 촬영으로 넘어간다. 줌 아웃…컷.”
촬영하는 강희정씨(77)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강씨는 “<잊어버린 독립운동가 염석주를 찾아서>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고 염석주 선생의 당시 활약상을 되짚어볼 예정이다. 프로그램이 완성되면 구매를 검토하겠다는 TV 방송국도 있다”라고 말했다. 제작을 지휘하고 있는 나용수씨(68)는 “팀원 중 방송과 관계 있던 사람은 전혀 없다. 단지 컴퓨터 멀티미디어 교육을 1년간 받아서 동영상 UCC 제작은 모두 자신이 있다”라고 말했다. 
정부는 올 초 ‘황혼의 길손’이 낸 기획안을 황혼 창업 아이템 대상 1위로 선정했다. 상금으로 나온 지원금은 1천만원. 습작으로 제작한 동영상은 UCC 콘테스트에도 출품할 예정이다. 기술과 장비는 안산소프트웨어지원센터가 무료로 대기로 했다. 지금 팀원의 수입은 모두 교통비 수준이지만 불만을 가진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베이비시터 파견 사이트 ‘부모마음(www. bumomaum.co.kr)’의 박영순 사장(59)은 출판사를 퇴직한 후 자본금 2천만원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두 명의 베이비시터와 함께 시작한 사업은 창업 6년 만에 서울 경기 등 12개의 지점을 갖추고 부모 회원 6천여 명, 시터 회원 5천여 명을 확보할 만큼 성장했다. 각 지점은 독립된 대리점의 형태로 운영되며 본점의 경우 월 매출이 4천만∼5천만원에 달한다. 엄마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박사장이 추천한 시터들은 부모들에게 인기 만점이다. 박사장은 “단순히 수익만을 생각하면 부모마음을 운영할 수 없다. 나름으로 사명감을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
씨즈커피 코리아의 임준서 대표(66)도 황혼 창업에 성공한 사례이다. “커피 하나로 시작한 늦깎이 창업이 인생 2막을 열어줬다”라고 말하는 임대표의 사업 아이템은 커피이다. 편의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컵 제품에 물만 부으면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아이디어로 승부를 걸었다. 씨즈커피의 연매출은 매년 2배씩 증가해 현재는 40억원 정도에 달한다. 이곳에서 출시한 다양한 종류의 컵 제품(원두커피, 카푸치노, 에스프레소, 헤이즐넛, 수프, 핫초코)이 히트하면서 이를 대량으로 찾는 고객이 늘어나고 타이완과 프랑스, 중국 등에도 수출이 이어졌다.
서울 봉천동 재래시장 입구에서 음악감상실을 운영하는 이경의씨(63)는 원래 성악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집안 사정으로 꿈을 접었던 그는 뒤늦게 음악감상실을 열어 고전 음악 애호가로서 꿈을 이루었다. 20평 남짓한 내부 인테리어를 카페로 꾸미고 고전 음악 전문 감상실 분위기를 냈다. 5천원을 내고 들어오는 사람에게는 커피 등 음료를 무제한 제공하는 것이 특징이다. 일반인들의 잣대로는 성공이라고 할 수 없지만 이씨는 스스로 창업을 성공적이라고 평가한다. 이씨는 “돈으로 잴 수 없는 쏠쏠한 재미가 있다. 그동안 모은 저축이나 보험금으로 편히 놀기보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행복하다”라고 말했다.

 

체력 덜 쓰이는 온라인 쇼핑몰이 ‘유망’


황혼 창업 성공 사례를 보면 보통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접목하는 사업이 많다. 오프라인의 노하우와 비교적 체력 관리가 용이한 온라인 사업이 황혼 창업에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공무원으로 정년 퇴임하고 집에서 쉬던 권영일씨(65)는 꾸준한 수익을 보장해줄 퇴직금 투자처가 필요했다. 그는 작은 액세서리 공장을 운영하는 친구로부터 제품을 공급받기로 약속받고 쇼핑몰 창업 강의 수강을 신청했다. 액세서리 전문 쇼핑몰을 차리기 위해서다. 흥정도 잘하고 셈도 빨랐지만, 권씨가 넘어야 할 산은 높기만 하다. 인터넷 쇼핑몰 운영 기술은 고령자가 배우기에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인터넷 상점을 꾸준히 관리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포토샵 기술과 웹에디팅 능력이 필수이다. 권씨는 기술이 뛰어난 20대를 아르바이트생으로 고용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웠다. 현재 권씨가 운영하는 쇼핑몰은 액세서리 전문 쇼핑몰 상위 10위권 안에 올랐다.
황윤정 인터넷 쇼핑몰 창업 컨설턴트는 “‘황혼 창업이라고 해서 일반적인 창업과 다를 것은 없다. 노인 인터넷 창업은 노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다”라고 말했다.
업종 선택에 대해서는 기왕이면 같은 고연령층을 겨냥한 시장에 진입하는 것이 안전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조언이다. 반드시 건강·음식 등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이를테면 ‘노인 패션 전문 쇼핑몰’ 같은 것도 유망하다는 설명이다. 노인들의 전자 상거래 이용률이 생각보다 상당히 높은 편이라는 점도 창업 전망을 밝게 한다.
창업경영연구소 안정훈 이사는 “전세계 KFC 매장 문 앞에 웃으며 서 있는 커넬 샌더슨이 KFC를 창업할 때의 나이는 65세였다. 자신이 가진 11가지 치킨 양념 비법을 사줄 식당을 찾아 미국 전역을 돌아다녔다. 마침내 1천9번째 방문한 식당에서 투자를 약속받았다. 한국에도 샌더슨과 같이 황혼을 넘긴 나이에도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사례가 나와야 한다”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황혼 창업의 특성은 나이가 주는 현실적인 한계와 심리적인 측면의 어려움이 산재해 있으니 신중을 기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보건사회연구원 관계자는 “고령자들은 겉으로는 건강해 보여도 상대적으로 체력이 약한 것을 인정해야 한다. 특히 사업이 실패했을 경우 후유증도 큰 편이다. 심리적으로는 고령자 특유의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면이 사업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형성된 성격이 어떤가에 따라 창업에 유리할 수도, 불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라고 걱정했다.
변재관 한국노인인력개발원 원장은 “지금까지의 황혼 창업은 창업자 스스로가 리스크가 적은 안정된 업종을 선호해왔다. 수익은 적더라도 자금 회전력이 빠른 단순한 업종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앞으로의 황혼 창업은 이제까지의 단순하고 방어적인 형태의 창업과는 다른 질적인 발전을 보일 것이다. 또 예비 고령자의 학력, 경제 여건, 경력과 업무의 숙련도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를 것으로 예상되므로 좀더 다양한 창업 모델이 등장할 것이다. 황혼 창업을 준비하는 고령자는 자신의 경제 능력과 그간의 사회 경험을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업종을 다양하게 고민하고 설계해야 한다”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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