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님이 주는 잔을 어찌 피하랴
  • 최만수 프리랜서 기자 ()
  • 승인 2007.05.21 09:4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직장은 여전히 술 권유·강요하는 사회…대학에서는 군대식 음주 문화 ‘퇴출’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현진건의 소설 <술 권하는 사회>는 아내의 절규로 끝난다. 이 소설이 발표된 것은 1921년이다. 8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한국은 술 권하는 몹쓸 사회이다. 최근 음주 문화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기업과 대학 등이 개선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술을 강요하는 분위기는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이 박혀 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남에 따라 술 문제는 여성에게도 예외가 아닌 상황이 되었다.
서울 회기동 경희대 앞은 파전 골목으로 유명하다. 2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파전집들이 골목을 빈틈없이 차지하고 있다. 밤이 되면 파전과 막걸리를 먹으러 온 손님들로 북적거린다. 근처의 골목에서는 색다른 풍경을 볼 수 있다. 경희의료원 옆 골목에는 최근 문을 연 바들이 불야성을 이루고 있다. 이 풍경은 달라진 대학가의 음주 문화를 대변한다. 이곳의 바 ‘렉서스’에서 매니저로 일하는 조향씨(27)는 “처음에는 직장인들이 이곳을 찾았지만 요즘에는 대학생 손님이 더 많다. 손님이 늘어나면서 근처에 바들이 급격하게 늘어났다”라고 말했다. 경희대 호텔관광학과 이상환씨(25)는 “예전처럼 단체로 몰려다니면서 새벽까지 술을 마시는 일은 거의 없다. 친구 한두 명과 함께 가볍게 와인이나 맥주를 마신다. 때문에 일반 주점들보다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바를 자주 찾게 된다”라며 달라진 대학가 음주 문화를 설명했다.
고려대의 ‘사발식’은 오랫동안 이 학교의 전통으로 여겨져왔다. 최근의 사발식은 예전 같지 않다.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정한국씨(24)는 “입학하던 2002년만 하더라도 모두 의무적으로 한 사발씩 술을 마셔야 했다. 지금은 안 마시겠다고 하면 억지로 권하지 않는다. 사발식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형식에 불과하다. 학과별로 다르겠지만 대부분 술을 강요하지 않는 분위기로 바뀌었다”라고 말했다.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대학의 음주 문화는 군대식이었다. 선배가 따라주는 술은 무조건 마셔야 하는 분위기였다. 요즘 대학의 음주 문화는 과거와 다르다. 신입생들은 “못 마십니다”라며 선배가 주는 술도 당차게 거부한다. 후배들에게 계속 술을 권하다가는 ‘개념 없는 선배’로 찍히기 십상이다. 격세지감이다. 대학생들의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지면서 동아리 등 단체 생활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이다. 1학년부터 취업을 위해 공부에 매진하면서 기존 음주 문화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갖게 된 것도 원인 중 하나다. 대학의 문화는 많이 바뀌었지만 음주로 인한 문제점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한국바커스(한국대학생 알코올 문제 예방협회) 김승수 사무국장은 “대학가의 음주 문화가 과거와 달라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대학 내의 음주로 인한 사고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 음주 문화도 여전히 존재한다”라며 대학의 음주 문화가 개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학의 음주 문화는 직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건전한 음주 문화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청소년 시절이나 대학 시절부터 이뤄져야 한다”라고 말했다.
금융회사에서 근무하는 최민기씨(27)는 요즘 계속되는 술자리로 피곤에 절어 있다. 대학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그는 술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는 “신입사원 환영회에서 술을 거부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잘못 찍힐까 봐 억지로라도 마셔야 한다. 팀의 단합을 강조하는 자리에서 분위기를 깰 수는 없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최씨는 퇴근 후 시간을 활용해 영어 회화 학원과 헬스클럽을 다니려고 했지만, 한 달에 한두 번 가기도 힘들다. 하루 걸러 한 번씩 술자리가 있고, 없는 날에는 회복을 위해서 쉬어야 하기 때문이다. 최씨의 주량은 늘었지만 건강은 계속 악화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발표한 <직장인 음주 행태와 기업의 대책>에 따르면 국내 직장인 4명 중 1명이 알코올 중독의 초기 단계인 알코올 의존 성향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제적·사회적 손실도 자그마치 15조원에 달해 문제가 심각하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술자리를 피해갈 수는 없다. 직장의 집단 문화와 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대학과 달리 직장의 집단 문화는 여전히 강하기 때문에 음주 문화는 과거와 다르지 않다. 직장의 수직적 인간 관계도 음주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다. 한국음주문화센터의 조성기 연구위원은 “음주 문화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기업의 역할이 중요하다. 술은 집단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개선이 힘들다”라고 말했다. 조위원은 “술 말고 다른 여가 활동을 개발해야 한다. 사내 규범을 만들고 교육을 실시하는 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라며 기업의 역할을 강조했다.


여성 음주율 80%대로 높아져


 
서너 잔 정도의 술은 건강에 좋다는 정보는 널리 알려져 있다. 문제는 직장인들이 이러한 정보로 자신을 합리화하고 폭음을 한다는 것이다. 직장인들에게 술은 곧 건강과 직결되는 문제이다. 직장인 5명 중 1명이 음주로 인해 건강이 위태로운 상태이다. 조직의 단합을 위해 개인 건강을 볼모로 잡을 수는 없다. 술이 아닌 다른 여가 활동을 찾으려는 개인의 노력과 음주 문화를 개선하려는 집단의 노력이 모두 필요하다.
대기업에서 근무하는 유희진씨(24)는 “직장 생활을 하려면 남자들과 어울려야 하기 때문에 술자리에 빠질 수는 없다. 남자들과 함께 마시면 불편하므로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여사원들끼리 따로 술자리를 갖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직장인 여성의 비율이 크게 늘었다. 그와 함께 여성 음주율도 덩달아 높아졌다. 여성 음주율은 1990년대에 50%였지만 현재는 80%에 이른다. 전문의들은 여성이 남성에 비해 몸집이 작을 뿐 아니라 몸속 수분의 양은 적고 체지방은 많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알코올에 취약하다고 지적한다. 이런 이유로 여성 음주시 뇌와 간 등 장기에 미치는 손상이 남성에 비해 더욱 치명적이다. 알코올 질환 전문 다사랑병원 이종섭 원장은 “여성은 알코올을 분해하는 효소(ADH)가 남성에 비해 적기 때문에 여성 음주는 몸에서 흡수가 빠르게 진행되지만 해독은 더디게 이뤄져 알코올의 영향이 그만큼 오래 지속된다. 때문에 알코올 의존에 빠질 위험도 높다”라고 경고했다. 전용준 내과 원장은 “여성은 알코올로 인해 골다공증·간경화·치매·우울증 등 동반 질환 발병률도 높으며 이로 인한 사망률 또한 남성의 2배에 이른다”고 말했다.
대학의 술 문화는 개인주의의 확산과 함께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직장의 음주 문화는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히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음주 문제는 더 확대되고 있다. 술과 집단 문화는 밀접한 관계이기 때문에 기업의 노력이 필요하다. ‘절주’가 아닌 개선의 노력이 필요하다. 바람직한 음주 문화의 정착을 위해 ‘술 권하는 사회’의 악습은 없어져야 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