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외교, 환상을 걷어라"
  • 조흥래 (자유 기고가) ()
  • 승인 2007.05.28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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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성 없는 일방주의 노선에 비판 고조..."미국적 가치 다시 세워야"

 
미국의 외교 정책에 이상만 있고 현실은 없다는 비판이 거세다. 민주당이 의회를 장악하고 2008년 대통령 선거가 다가와도 미국의 올바른 외교 정책에 대한 진지한 토론은 없다. 3명의 전문가들은 미국 외교 정책의 실종을 분석했다. 닉슨센터를 창설한 외교 전문가 디미트리 심슨 씨는 대통령 후보들, 의회 그리고 언론까지도 이라크 전쟁을 제외하고는 외교 정책 방향에 관한 본격적 토론을 외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모두가 이라크 전쟁에만 매달려 있고, 이라크 전쟁은 마치 전반적 외교 정책과는 무관하게 동떨어진 이슈가 되었다. 그러나 이라크 전쟁이 전부가 아니다. 미국은 냉전 이후의 합리적 외교 정책 수립에 실패했다. 불행하게도 이 중대한 함정을 인식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문제가 어제오늘에 생긴 것은 아니다. 미국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되었을 때 일단의 외교 엘리트들은 무의식 중에 달콤한 유혹에 빠졌다. 미국이 누구에게나 승리할 수 있고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에 젖어들었다. 세계사를 미국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무모한 인식이 팽배하다. 이 점에서는 네오콘 지배 하의 보수 공화당이나 진보적 민주당 모두 마찬가지다. 이들 사이에는 거의 만장일치의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언론도 한 몫을 했다. 이른바 ‘워싱턴 여론’이라는 프리즘으로 국제 관계를 보도하고 있다. 문제는 워싱턴 여론이라는 것이 허구라는 점이다. 뜬구름 같은 논리에 근거한 언론의 분석과 전망은 어이없게도 진실로 받아들여진다. 업계와 학계의 많은 인사들도 이 흐름에 동참했다. 이 가운데는 정계 진출이나 기업과의 특수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다수 포함되었다. 이런 사람들은 바른 말 하기를 주저한다.
미국은 2007년까지도 21세기 세계사에서 미국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관한 토론을 하지 못했다. 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의 사명을 놓고 뜨거운 논쟁을 벌였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때는 소련의 도전, 유럽 재건, 일본 군국주의 청산, 국제기구의 재편, 지역 동맹의 창설 등에 관해 활발한 의견 교환이 있었다. 지금은 유일 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이 유례 없는 사명과 책임을 떠안고 있다는 인식뿐이다. 그러나 미국이 추구하는 이상과 목표가 타국의 그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성찰이 없다.
이를 보여주는 사례는 많다. 이슬람 극단주의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공평 무사하게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들은 이스라엘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한다. 양당 후보들은 이 문제만 나오면 도망치다시피 한다. 이란 문제에 대해서도 ‘어떤 옵션도 테이블에서 내려서는 안 된다’는 원론적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중국의 등장에 관해서도 공개적 토론이 없다. 이 문제에서는 부시 행정부가 의회 내 민주당 의원들보다 더 현실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민주당은 대중 영합적이고 보호주의적이다. 그러나 미국의 군사적 우위가 자신의 안보를 튼튼히 하려는 중국의 인식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를 자문하는 미국 지도자는 없다.

 

잘못된 정책으로 이라크 전쟁 등 오판 초래


러시아 문제에서도 거의 좌절하고 있다. 러시아는 국내적으로는 비민주적 행보를 가속화하고 대외적으로는 갈수록 자신감을 보인다. 여기에 제동을 걸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핵 비확산, 테러와의 전쟁, 유엔 안보리에서 지지를 얻는 데 급급해하고 있다.
미국이 시장경제 민주주의로 세계를 인도할 수 있고 이렇게 함으로써 미국의 이익과 인류 의 이익을 함께 향상시킬 것이며 이 사업은 크게 남는 장사라는 인식이 근 20년간 미국을 지배해왔다. 그 결과 정치인, 오피니언 메이커, 전문가 할 것 없이 모든 계층이 외교의 현실주의는 불필요하고 심지어 그것이 비도덕적이라는 믿음에 빠졌다. 그러나 자기 도취의 천진난만주의는 미국의 안보 요건을 충족시키고 그 영향력을 높이는 현실적 상황과 충돌하고 있다. 인위적 여론의 얼굴 뒤에는 미국의 외교 정책 방향에 대한 수많은 의문들이 숨어 있다. 문제는 이런 의문들이 귀에 들릴 만큼 큰 소리가 되어 새로운 국제 위기가 오기 전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프린스턴 대학의 앤 마리 슬로터 교수는 미국의 이상과 가치를 재정립할 것을 촉구했다. 미국 외교 정책은 방향을 잃었다. 미국인들은 이라크 전쟁이 잘못되었고 미국이 그릇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은 알지만 미국이 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모른다. 일부에서는 당장 이라크에서 철수하고 의료·교육 등 국내 문제에 전념할 것을 주장한다. 지구 반 바퀴 저쪽에서 민주주의를 건설하는 것보다 이 문제가 더 시급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일각에서는 키신저 시대의 실용 외교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키신저 외교는 특정 국가의 성격보다는 미국의 국익 향상에 도움이 되느냐에 초점이 맞춰졌었다.
일방주의로 표현되는 현 고립 외교는 경제와 안보 이해가 첨예하게 상호 의존하는 21세기에는 맞지 않는다. 또한 키신저식 이상에서 후퇴하는 것이기도 하다. 키신저는 미국의 가치로 세상을 이끌 수 없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미국의 가치와 일치하는 세계 속의 가치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우선 미국의 가치에 대한 정의부터 내려야 한다. 자유와 민주주의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평등과 정의를 우선하는 사람도 있다. 이 가치들은 미국 사회의 규범으로 각인되었다. 독립기념일 축사에도 나오고 대통령의 취임사, 애국가에도 등장한다. 슬로터 교수는 인내·겸손·신념 세 가지를 추가했다. 이런 가치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불확실성과의 투쟁을 통해 역사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미국의 가치에 입각한 외교 정책은 과거의 영광을 반추하자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지난 과오와 오만을 되새겨 현세에 맞추자는 것이다.
미국이 유일 강대국이지만 신생 민주주의의 유일한 모델은 아니다. 유럽연합(EU), 일본, 인도, 남아프리카, 터키, 브라질, 아르헨티나, 한국, 그 밖에 수많은 국가들이 자신에게 맞는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있다. 미국의 가치가 이들의 가치와 충돌해서는 안 된다. 미국을 건설한 선조들의 가치는 미국만의 가치가 아니라 세계적인 가치이다.
결론적으로 개국 당시의 가치에 입각한 외교를 펼쳐야 한다. 말로만 해서는 안 된다. 21세기의 도전에 맞서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정의·평등·인내·겸손·신념 7가지 가치를 구현해야 한다. 갈 길이 멀고도 힘들지만 이 이상의 가치는 없다.
존스홉킨스 대학의 제임스 만 교수는 무력으로 민주주의를 확산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미국의 외교 정책이 실패했다고 분석했다. 그 오판이 초래한 상징적 사례가 이라크 전쟁 패배로 나타났다. 클린턴과 부시 대통령은 중국에 대해서 눈부신 경제 성장과 일당 독재가 언젠가는 충돌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중국은 성장과 사회주의 지배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확보한 채 잘 굴러가고 있다. 이 또한 미국의 잣대로 중국을 판단했기 때문에 나타난 외교적 오판의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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