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 '호출'된 무명 영웅들
  • 로스엔젤레스 ·진창욱 편집위원 ()
  • 승인 2007.06.04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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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군 발자취 찾기 한창... 생존 참전 용사 증언 수집도 활발

 
미국에서는 5월 마지막 월요일 메모리얼 데이(현충일)를 전후해 전쟁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가 부각되고 있다. 미국 의회는 2002년 입법을 통해 전역 미군 역사 계획(VHP)을 수립해 작업을 진행 중이다. 미국 연방의회도서관이 주관하는 이 계획은 무공훈장을 받은 1백1명의 생존 미군 전역자뿐만 아니라 다른 생존 참전 용사들의 육성 증언을 수집하고 있다. 알려진 전쟁 영웅은 물론 잊혀진 영웅들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발굴해 미국의 역사로 기록하기 위한 작업이다. 
다음은 미군 참전사를 연구한 피터 콜리어가 메모리얼 데이인 지난 5월28일자 월스트리트 저널에 기고한 미군 전쟁 영웅들에 관한 글의 요약이다. 콜리어는 <무공훈장: 조국의 부름을 받은 용사들의 초상>의 저자이다.

#1: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미식축구 스타 출신 미 육군 패트 틸먼과 해병대 제이슨 더냄 상병은 지난 2004년 4월22일 같은 날 전사했다. 틸먼은 우군인 미군의 총격으로 사망했고, 더냄은 적 복병이 던진 수류탄을 몸으로 덮쳐 전우 여러 명을 구하고 전사했다. 사건의 내용에 관계없이 틸먼의 전사 소식은 많은 뉴스를 탔으나 더냄은 무명 전사자로 묻혔다.
#2:텍사스 주 샌안토니오 출신인 호세 로페스는 2차 세계대전 막바지 격전인 벌지 전투에 참가했다. 그는 독일 아르데네스 숲 전투 중 참호에 은폐하고 있다가 독일군 10명이 접근하자 기관총으로 맞서 모두를 사살했다. 이어 자신을 목표로 공격해온 다른 독일군 30여 명과 싸워 모두 사살했다. 미군들은 로페스 덕으로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을 벌었다. 이날 전투에서 로페스는 모두 100명에 달하는 독일군을 사살했다. 로페스와 함께 이 전투에 참가했던 미군 병사들은 격전 직후 교회를 찾아가서 미군 전우들의 죽음은 물론 자신들이 사살한 독일 병사들의 명복도 함께 빌었다.
#3:데스먼드 도스는 1942년 미 육군에 입대해 의무병으로 복무했다. 그는 종교적 이유로 무기를 들지 않았다. 도스는 1945년 오키나와 전선에 투입되었다.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미군이 후퇴했을 당시 도스는 전장인 언덕에서 끝까지 후퇴하지 않았다. 그는 고지에 남아 총탄이 날아오는 가운데 부상한 10여 명의 전우들을 응급 처치했다. 그리고 한 번에 한 명씩 업고 나와 절벽 끝으로 나가 줄을 매달아 아래로 내려보내 후송되도록 도왔다. 그는 밤까지 모두 75명의 미군을 구했다. 도스는 매번 전우를 구하러 갈 때마다 기도했다. “하나님, 딱 한 명만이라도 더 구하게 도와주옵소서.”
#4: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미 육군에 자원 입대한 잭 루카스는 입대 당시 14세로 고교 1학년이었다. 그는 일본군의 하와이 진주만 공습 직후 입대를 결심하고 어머니를 졸랐다. 처음에는 반대하던 어머니도 전쟁이 끝나면 학교로 되돌아가서 공부한다는 루카스의 약속을 받고 모병소를 찾아가 아들의 나이를 속여 입대가 가능하도록 했다.
루카스는 소속 부대가 이오지마로 배치되어 이동할 때 하와이 잔류 명령을 받자 부대 경계 근무 도중 이탈해 몰래 이오지마행 수송선에 올랐다. 그는 배가 떠난 이틀 후 발견되었다. 그는 부대장에게 본부 근무가 아닌 일선 전투부대 배치를 탄원해 이오지마 최전선에 투입되었다.
도착 다음날 전투에 참가한 루카스는 일본군 참호에서 일본군과 육박전을 벌이던 중 전우가 있는 곳에 일본군이 던진 수류탄 2개가 폭발 직전에 있는 것을 보고 서슴없이 자신의 몸으로 이를 덮쳤다. 미군이 일본군 진지를 점령한 뒤 의무병이 부상병을 확인하던 중 루카스를 발견했으나 그가 사망한 것으로 알고 군번표를 떼려 했다. 그 순간 루카스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루카스는 즉각 후송되어 몇 달간에 걸쳐 치료를 받은 후 귀국했다. 그는 7급 무공훈장을 받고 어머니와 약속한 대로 복학해 공부를 계속했다.


 
피보다 진한 전우의 30년 우정

#5:톰 노리스는 할리우드 영화 <BAT 21>의 주인공으로 널리 알려진 미군 영웅이다. 그러나 노리스를 구출한 마이크 손턴은 그의 용맹에도 불구하고 노리스의 그늘에 가려졌다. 
노리스는 북베트남에 추락한 미군 조종사 구출 작전의 지휘를 맡았다. 그는 격전을 치르고 조종사를 구한 뒤 후송 선박으로 3명의 동료 병사들을 보낸 다음 혼자서 엄호를 맡아 쿠아베트 강변에서 버텼다. 월맹군 추격 부대와 전투를 벌인 그는 총격을 받고 쓰러졌다.
다른 전우와 함께 탈출 중이던 손턴이 노리스가 쓰러진 것을 보고는 구출 후송 선박을 버리고 단독으로 강변으로 노리스를 향해 되돌아 달려갔다. 손턴은 노리스 몸 위에 올라선 월맹군 2명을 사살하고 그를 업은 뒤 강변으로 다시 뛰었다. 노리스는 월맹군 총탄에 머리를 다친 상태였다. 손턴과 노리스는 쿠아베트 강을 헤엄쳐 바다로 나가 두 시간 뒤 그들을 데리러 간 미군 선박에 의해 무사히 구출되었다. 이후 손턴과 노리스는 30년 동안 서로 떼놓을 수 없는 가까운 사이로 지냈다.
#6:미군 전투기 조종사 랜스 시잔은 북베트남 임무 수행 중 비행기가 격추되자 탈출에는 성공했으나 정글에 떨어지면서 부상했다. 그는 걸을 수 없어서 6주 동안 정글을 기었다. 결국 월맹군에 잡혀 포로가 되었을 때는 죽기 직전의 상태였다. 시잔은 그러나 자신을 포로로 잡은 월맹군 병사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는 미군 복무 규정에 따라 어떤 미군 비밀도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월맹군은 끈질기게 그를 고문하고 취조했으나 그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시잔은 결국 고문으로 사망했다. 포로수용소에 같이 수감되었던 존 매케인 상원의원(애리조나 주)의 증언이다.
#7:마이크 크리스천도 포로 수용소에 갇혔던 포로였다. 크리스천은 수용소에서 아주 가끔 허용되는 목욕을 하다가 바닥에 떨어진 손수건 같은 헝겊 조각 한 장을 발견했다. 그는 기와 조각을 갈아 가루를 만들어 물에 푼 다음 헝겊 조각에 줄무늬를 그렸다. 푸른색 알약을 물에 풀어 헝겊 한 귀퉁이에 푸른색 네모 바탕을 만들었다. 대나무 바늘과 담요에서 풀어낸 실로 이 푸른 바탕에 작은 별을 수놓았다. 몇 주일에 걸친 작업으로 조그마한 성조기가 완성되었다. 크리스천은 월맹군 감시병들이 일어나기 전 새벽에 이 성조기를 바람에 나부끼듯 흔들었다. 감방 내 미군 포로들은 성조기를 향해 모두 거수 경례를 올렸고, 그들의 뺨은 눈물로 얼룩졌다. 애국심은 그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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