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핵'에 뚫린 미국 국경
  • 로스앤젤레스·진창욱 편집위원 ()
  • 승인 2007.06.11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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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 항공여행객 무사 통과 드러나 보안 당국 '발칵'

 
지난 연말연시를 이용해 서울을 다녀간 재미동포 서영씨(55)는 슈퍼 결핵 환자가 국제선 항공기를 이용해 대서양을 넘나든 사실을 언론 보도로 전해 듣고 소름이 돋는 느낌을 받았다. 서씨는 크리스마스 때 귀국했다가 지난 연초에 로스앤젤레스로 되돌아가면서 한국적 국제선 항공기를 이용했다. 서씨가 탔던 비행기의 통로 건너편 좌석에 앉았던 일본인 여자 승객은 서울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12시간을 줄곧 심한 기침과 재채기에 눈물까지 흘리며 고통스러워했다. 서씨는 귀가 후 다음날부터 극심한 독감을 앓았다. 그 일본인 여자 승객으로부터 옮은 독감 바이러스 때문이었다. 서씨는 비행기 안에서 그 일본인 여자 승객의 독감 바이러스 방출 사정 거리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독감 바이러스가 옮았을 것으로 생각한 서씨는 공항에 도착하자 마중 나온 열세 살짜리 딸에게 먼저 사과했다. “엄마가 미안하다. 오랜만에 보는 딸한테 뽀뽀를 해줄 수가 없구나.” 서씨는 만일 그 일본인 여자 승객이 최근 미국에서 문제된 것과 같은 약물 내성이 강한 새로운 변종 결핵 XDR-TB 환자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니 소름이 돋았다. XDR-TB는 최근 인도 등지에서 창궐하는 결핵인데, 현존 치료약으로는 퇴치가 불가능해 슈퍼 결핵으로 불린다.
미국 주요 언론은 지난주 XDR-TB 환자의 유럽 신혼여행 기사를 집중 보도했다. 조지아 주에 거주하는 변호사 앤드루 스피커 씨(31)는 지난 5월12일 애틀랜타 공항을 떠나 프랑스 파리, 이탈리아 로마와 그리스 휴양지에 이어 체코의 프라하를 거쳐 캐나다 몬트리올까지 국제선 항공기를 이용하고 5월24일 렌트한 승용차로 몬트리올에서 뉴욕 주 챔플린을 통해 미국에 재입국했다. 그는 챔플린에서 뉴욕까지 갔다가 미국질병통제소(CDC)에 의해 오클라호마 주 덴버에 있는 결핵환자 병동에 격리되었다. 이번 결핵 환자 격리는 미국에서 40년 만의 일이다. 스피커 씨의 신혼여행이 미국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은 것은 그가 난치병 XDR-TB 환자라는 것과 그가 법률을 전공한 변호사라는 점, 그리고 전염성이 강한 질병을 갖고 있으면서 격리된 밀폐 공간이나 다름없는 항공기를 편도 8시간 이상씩 이용함으로써 동승 여객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은 도덕 불감증, 그리고 의사의 항공기 여행 자제 권고를 무시하고 해외 여행을 추진했을 뿐만 아니라 로마에서는 CDC의 경고를 받게 되자 의도적으로 일정을 바꿔가면서 스파이 같은 여행을 계속한 점 등이다.
스피커 씨는 지난 5월12일 신혼여행을 떠날 때 이미 자신이 결핵에 감염된 사실을 알았고 담당 의사 줄리 거버딩으로부터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국제선 여행 자제를 권고받았지만 당초 계획대로 여행을 강행했다. 거버딩은 스피커 씨가 절대로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고 자신에게 약속했다고 전했다. 스피커 씨는 자신이 XDR-TB 환자라는 점을 로마에서 미국 관리를 만나서 처음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로마에서 만난 미국 관리로부터 더 이상 국제선 항공기 여행을 하지 않도록 하라는 경고를 받자 미국 정부가 자신의 여행 일정을 확인하고 자신을 억류할 것을 두려워해 당초 일정과 달리 로마에서 프라하로 비행기로 여행한 뒤 다시 캐나다 몬트리올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그의 귀국 일정은 당초 6월5일 로마에서 미국으로 직행하는 것이었다. 스피커 씨가 007 영화 같은 스릴 가득한 여행을 결심한 것은 “귀국하지 않으면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외국에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스피커 씨는 챔플린 출입국 관리소에서 여권 확인 2분 만에 아무런 제재 없이 무사히 통과했을 뿐만 아니라 애틀란타에서 유럽을 거쳐 챔플린에 이르기까지 공항이나 출입국 관리소 어디에서도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았다. 스피커 씨의 여권에는 ‘이 여권 소지자의 여행을 중지시키고 대화시 방역 마스크를 착용할 것, 그리고 보건 당국에 전화 연락할 것’이라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스피커 씨가 덴버 병원에 격리된 이후 미국 국토안보부와 CDC에는 비상이 걸렸다. 국토안보부는 미국 국경 보안이 허점투성이인 데 경악하고 문제점 해결에 나섰다. 우선 챔플린 출입국 관리소 해당 관리들을 직위 해제하고 각 공항이나 국경 출입국 관리소의 여권 확인 절차를 강화하도록 지시했다. 미국 일간지 시카고 트리뷴은 항공기 여객을 통해 위험 전염성 질병 환자의 미국 내 진입이 이처럼 쉽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국제 테러리스트의 생물학적 테러에 미국 전체가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언론들, ‘생물학적 테러 무방비’ 잇달아 경고


 
미국 내 다른 언론들이 이번 스피커 사건과 관련해 가장 중점적으로 지적하는 것도 적대 세력에 의한 대미 생물학적 테러 가능성이다.  CDC는 스피커 씨가 탑승했던 국제선 항공기의 승객들 가운데 스피커 씨와 가까운 자리에 앉았던 승객 80여 명을 수소문해 XDR-TB 감염 여부 확인 및 감염 가능성을 경고하고 있다. 자신이 스피커 씨와 같은 비행기에 탑승했다는 사실을 통보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경악하고 분노했다. 이들 중 대다수는 “수백 명의 다른 사람을 위험에 빠뜨린 스피커 씨의 이기심을 용서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CDC의 결핵 감염 여부 검사를 받은 사우스 캐롤라이너 아이켄 대학의 레이니 위긴스 양(21)은 ‘어떻게 그처럼 부당하고 이기적일 수 있느냐. 나는 아직도 내가 탑승했던 비행기 안에 그런 사람이 함께 있었다는 사실에 소름이 끼친다”라고 말했다.
결핵은 100년 전만 해도 미국인 사망 원인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무서운 질병이었다. 미국 보건당국은 효과적인 항생제가 잇달아 개발되고 발병률도 낮아지자 결핵 퇴치 가능성을 공식 선언하기도 했다. CDC 자료에 따르면 1956년 결핵 발병 환자 수 6만9천8백95명에서 2006년 1만3천7백67명으로 지난 50년 동안 해마다 급속히 줄어들었다. 보건 당국은 이 추세대로 가면 2010년까지 미국에서 결핵이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그러나 결핵 발병 환자 수가 최근 들어 20%가량 급증하고 특히 XDR-TB 환자가 늘어나자 미국 흉부외과와 전염병 전문가들은 결핵에 대한 주의 경고를 잇달아 내놓고 있다. 특히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현재 결핵 보균자로 집계되고 있으며 지난 2004년 등록된 전세계 발병 결핵 환자 8백만명 가운데 50만명이 XDR-TB로 확인되어 의료계가 놀라고 있다. 매년 국제 간 여행이 활성화되고 항공기 여행자가 늘어나면서 이같은 악성 결핵의 미국 내 감염은 물론 세계 확산에 대한 우려도 함께 커지고 있다.
비행기 여행에서 얻은 독감으로 음식을 먹을 수 없어 열흘가량 물과 주스만으로 겨우 지탱했던 서영씨는 그 일본인 환자가 다른 나쁜 병을 앓았던 것은 아닌 것 같아 안도하고 있기는 하지만 다시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가 꺼려진다고 말했다. 한국적 비행기는 그간 여러 번 탑승해보았지만 스피커 씨 사례 같은 상황에 대한 대비가 전혀 마련돼 있지 않은 것 같기 때문이다.
이번 스피커 씨 사건이 한국적 항공사들로서도 ‘강 건너 불’이 아님은 분명하다. 외국인 탑승률이 낮고 한국인만 주로 이용한다고 해서 대충 넘어갈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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