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이름으로 '벽의 장벽 ' 깨뜨린다.
  • JES ()
  • 승인 2007.06.25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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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터스포츠·골프·테니스 새 역사 쓴 흑인들

최근 해외 언론은 포뮬러원(F1) 드라이버 루이스 해밀턴에게 주목하고 있다.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각종 기록을 쏟아내며 ‘황제’ 미하엘 슈마허(독일·은퇴) 이후 빈자리로 남아 있는 권좌를 향해 무섭게 떠오르고 있어서가 아니다. F1은 월드컵·올림픽·세계육상선수권과 함께 세계 4대 스포츠 이벤트. 전세계에서 한 시즌에 단 22명만 설 수 있는 이 자리에 흑인 최초로 이름을 올렸을 뿐만 아니라 흑인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한 스포츠 중 하나인 모터스포츠에서 최고를 향해 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은 그를 ‘레이싱계의 타이거 우즈’라 칭송하며 행보 하나하나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카트 신동을 F1 샛별로 키우다
해밀턴이 타이거 우즈(골프)라고 불리는 것은 해밀턴과 우즈가 흑인임에도 불구하고 모터스포츠·골프 등 그동안 백인들이 장악했던 스포츠 영역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최고 자리에 올라 있어서다. 이처럼 스포츠계에서 흑인들이 넘지 못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예상을 깨뜨리며 장벽을 무너뜨린 이로는 비너스-세레나 윌리엄스 자매(테니스)도 있다. 이들에게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헌신적인 노력으로 뒷바라지를 해온 아버지들이 있다는 점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식을 위한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은 위대하다. 하지만 이들의 아버지가 보여준 노력은 지금의 아버지들에게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앤서니 해밀턴은 카리브 해의 그라나다 섬에서 영국으로 이주해 정착한 이민 2세다. 노동자로서 박봉에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그는 아들 루이스가 카트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모든 역량을 쏟아 뒷바라지했다. IT 현장 기술자로 일하던 그는 수입을 늘리기 위해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세 가지 직업을 전전했다. 한 가지 일만으로는 모터 스포츠에 드는 거액의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 더구나 이혼과 재혼으로 인해 전처의 생활비까지 책임져야 했지만 아들이 모터 스포츠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제반 비용을 책임졌다.
카트는 취미의 경우 연습장 등에서 대여를 통해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대회에 참가하게 되면 또 다르다. 스폰서 없이 개인 자격으로 나선다면 카트(약 3백50만~9백만원) 헬멧·신발·레이싱복(약 2백50만~5백만원) 대회 참가비(약 100만~2백만원) 등 한 대회당 최대 2천만원까지도 소요될 뿐만 아니라 한 차례 대회를 치를 때마다 튜닝·수리비·소모품(타이어 등) 교환 비용, 연습 비용(30분당 약 10만~20만원)까지 천문학적인 액수가 든다. 잠자는 시간만 빼고 일만 한 앤서니 해밀턴이 모든 비용을 책임진 것이다.
다행히 아들 루이스는 카트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카트를 타기 시작한 2년 뒤인 8세부터 나선 전 대회에서 우승을 독차지했다. 10세인 1995년 영국 카트레이스 우승으로 유명 레이싱팀들로부터 지원을 받기 시작했다. 루이스는 13세부터 세계적 모터스포츠 팀 맥라렌의 ‘영 드라이버 프로그램’의 혜택을 보면서 본격 모터스포츠 무대로의 도약을 준비했다.
드디어 2007년 3월 루이스 해밀턴은 22세의 젊은 나이로 F1 무대에 데뷔해 F1 역사상 최초의 흑인 드라이버라는 프리미엄을 얻었다. 또 첫 레이스에서 당당히 3위에 입상해 데뷔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후 2~5라운드까지 2위를 차지했고, 6라운드와 7라운드에서 연이어 가장 먼저 체크기를 받아내며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다. 데뷔 이후 단 한 차례도 단상에서 멀어진 적이 없는 것이다. 이는 F1 역사상 처음이며 다시는 없을 것으로 평가받는 기록 행진. 황제 슈마허가 “레이싱에 필요한 모든 재능을 가졌다”라고 평했던 ‘카트계의 신동’이 카트계 정복 이후 12년 만에 모터스포츠의 최정상 자리에까지 올라서며 쾌속 질주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해밀턴의 재능과 노력 덕이었지만 그때까지 후원을 아끼지 않은 아버지 앤서니 해밀턴의 남모를 노력 없이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타이거 우즈·윌리엄스 자매 이끈 ‘부정의 힘’
타이거 우즈는 아버지 얼 우즈가 오랜 암 투병 끝에 눈을 감았을 때 비통함을 못 이겨 대회에 나서지 못했다. 그만큼 타이거에게 아버지 얼 우즈의 자리는 컸다. 얼 우즈는 타이거 우즈의 아버지라기보다 정신적 스승이며, 후원자이자 조언자이며, 친구였기 때문이다.
육군 중령으로 예편한 얼 우즈는 그린베레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육체적·정신적으로 강인한 용사 출신이다. 타이거가 2세 때 처음 골프채를 잡게 한 뒤에 그는 물질보다 정신적인 부분에서 우즈를 최고로 키웠다. 사실 얼 우즈는 캔자스 주립대학을 스포츠 장학생으로 입학했을 정도로 야구 선수로서 상당한 재능을 보였다. 하지만 아들에게 야구를 강요하지 않았다. 타이거가 즐거워하고 원했던 일에 전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즐기면서 하는 일이 가장 효율적인 성장을 가져온다는 점을 가르친 것이다.
그는 아들 타이거에게 지칠 줄 모르는 경쟁심을 일깨웠다. 타이거 우즈가 어린 시절 대회 출전 전에 항상 “생애 마지막 경기라는 생각으로 임하라”고 조언했다. 뿐만 아니다. 얼 우즈는 타이거가 연습할 때 큰 소리를 내거나 동전을 던져 훼방을 놓으며 정신력을 흩트리지 않도록 훈련시켰으며, 이미지 트레이닝·불교식 정신 수양 등으로 심리적 안정을 찾는 방식을 몸에 익히게 했다.
얼 우즈는 미국 <골프다이제스트>와의 인터뷰에서 “대다수가 레슨비 등 물질적인 부분에 주목하지만 나는 정신적인 부분을 가르쳤다. 이는 영원히 물려줄 수 있는 자산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루이스 해밀턴의 아버지 앤서니 해밀턴의 내리사랑이 물질적인 헌신이었다면 타이거 우즈의 아버지 얼 우즈의 내리사랑은 정신적 유산이었던 것이다.

 
여자 테니스계에 흑인 돌풍을 일으킨 윌리엄스 자매의 아버지 리처드 윌리엄스는 가난한 목화 재배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나 도시로 이주한 전형적인 빈민층이었다. 체계적인 교육을 시킬 능력이 없어 스스로 코치를 자처하며 두 딸을 세계 최고 스타로 키워냈다.
그가 두 딸에게 테니스를 권한 것은 가난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심산에서였다. 리처드 윌리엄스는 TV에서 테니스 대회 우승자가 상금으로 3천 달러(약 2백91만원)를 받는 것을 보고 세레나와 비너스가 4세 때 라켓을 쥐어주었다. 당시 그들이 살던 곳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 콤프턴의 빈민가. 하지만 리처드 윌리엄스는 주위 시선과 조롱·비아냥에 아랑곳하지 않고 마약 판매와 갱스터들의 총질이 난무하는 거리 한복판에서 훈련을 시켰다. 그는 두 딸에게 레슨을 시킬 물질적 능력이 없었지만 운동 능력은 백인보다 우월하다는 흑인의 자부심과 희망을 심어주었다. 그가 선택한 방식은 기술적인 부분을 체계적으로 가르칠 수 없기에 흑인이 가진 신체적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상금이 없는 아마추어 대회에 딸들을 아예 출전시키지 않았다. 출전 비용으로 쓸 수 있는 돈도 없었기 때문이다.
프로 무대를 통해 테니스계에 처음 얼굴을 내민 윌리엄스 자매는 이후 테크닉 위주의 경기를 선보여왔던 여자 테니스계에서 강인한 파워를 바탕으로 새 바람을 일으키며 승승장구해 정상을 노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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