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난 정치’로 판을 깰 것인가
  • 이호철 (인천대 교수·정치외교학과) ()
  • 승인 2007.06.25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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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된 민주 사회는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상대주의로부터 시작된다. 민주주의가 원래 절대적 가치를 구현하는 ‘철인 정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좀더 나은 정책, 좀더 나은 후보를 선택하는 상대적 평가 과정이 민주주의의 핵이다. 그렇다면 자신만의 절대성, 자신이 속한 집단만의 절대성이란 있을 수 없다. 나와 상대, 나의 집단과 그들의 집단들이 공존하면서 유권자 지지를 놓고 경쟁하는 정치 과정이 성숙된 민주 사회의 모습이다. 선거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다수 의사에 따라 대표를 결정하는 기계적 과정 그 이상이어야 한다. 선거란 지지를 향한 경쟁 과정이다. 따라서 경쟁자에 대한 인정과 공정한 경쟁, 결과에 대한 승복이 전제되어야 한다. 성숙된 민주 사회에서 게임은 결코 제로섬 게임으로 치닫지 않는다. 공존과 상생의 ‘정합 게임’으로 끝나야 한다. 이럴 경우에만 선거가 생산적 축제 장이 될 수 있다.


선거는 생산적 축제여야 한다
우리는 오는 12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다. 야당인 한나라당에서는 이명박·박근혜 진영을 중심으로 당내 경선을 향하고 있다. 여당인 열린우리당에서도 탈당을 통해 범여권 통합 신당을 추진하면서 수명의 예비 후보들이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선거 중립 위반이라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결정을 세 번째 통보받았다. 한나라당의 당내 경쟁과 여야 간의 경쟁,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는 대통령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우리의 정치가 좀더 성숙해지기를 희망한다.
여당의 지금 모양은 어떤가? 열린우리당의 계파들이 순차적으로 탈당해나가면서 내세우는 정치적 이해관계야 각양각색이지만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의 차별성 때문이라는 데는 초록이 동색이다. 노무현 정부의 국정에 대한 현재의 지지로는 정권 재창출이 불가능하다는 계산에서다. 그러나 여당에서 나온 대통령과 그가 추진한 국정이 지지를 받지 못한다면 여당은 야당을 할 준비를 갖추는 것이 성숙된 민주 사회의 정치적 규범이다.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결정 때 울분을 삭히지 못하던 그들의 모습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탄핵 결정의 반사 이익으로 열린우리당이 압승을 거둔 것도 기억하고 있다. 대선 때마다 정당들이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신당들을 만들어낸다면 우리 정치판은 언제나 역사성을 지닌 정당들이 뿌리내리는 성숙된 민주 사회로 나아가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야당의 경선 과정도 그렇다. 대도시를 돌면서 정책 토론회를 열고 주요 정책에 관한 경선 후보들의 견해와 공약들이 토론되는 과정은 바람직하다. 그러나 후보들의 입장과 공약보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상대 후보에 대한 온갖 의혹과 문건들이 연일 신문 지면을 채우고 있다.
이러다가는 결국 ‘덜 못난 후보’를 뽑는 경선이 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성숙된 민주 사회에서의 경쟁은 ‘더 나은 후보’를 뽑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절대적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경선은 ‘더 나은 후보’를 뽑는 축제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대통령은 선거 중립 의무를 어겼다는 선관위 결정에 대통령의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고 나선다. 그러나 선거 국면에서 대통령은 선관위와 더불어 여야의 공정한 게임을 진행시켜야 할 최고 심판자로서의 책임이 크다. 어떻게 선관위에서 대통령 발언의 선거법 위반 결정이 내려지고, 대통령은 선관위 결정에 헌법 소원을 내겠다는 일이 벌어지는가 싶다.
부부간에도 다툴 때가 있다. 그러나 부부 싸움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부부 관계를 유지하고 가정을 꾸려가겠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판을 깰 각오로 싸운다면 부부 싸움도 한계를 넘는 상처를 남기고 결국은 갈라서는 사태까지 이르게 된다. 우리는 한나라당의 경선 과정이, 여야 간의 경쟁 과정이, 대통령의 선거 관리가 이런 성숙된 민주 사회의 정치판을 유지한다는 전제에서 축제처럼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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