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의 야수화' 심해지고 있다.
  • 강경근 (숭실대 법대 교수·헌법학) ()
  • 승인 2007.07.02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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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이기심으로 공권력 무력화...권력자의 법질서 경시가 '부채질'

 
‘한국병’으로 일컬어지는 현상들이 있다. 만연된 법질서 경시 풍조가 그중 하나이다. 자신의 이익을 한 치 양보 없이 누리기 위해서라면 공동체의 규범과 질서를 악법이라 하면서 지키지 않고, 거리에 나서서 머리띠를 두르고 하늘을 향해 주먹을 올리며 힘을 과시하는 현상들은 한국 사회의 전반에서 고질적인 풍조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다.
어느 사회에서나 그같은 부류들은 존재하겠지만 문제는 이런 집단 행동에 한국 사회가 전반적으로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더욱 큰 문제는 이렇게 법질서를 경시하는 주체들에 대해, 법을 집행하는 정부가 베푸는 불균형적이고 비법치주의적인 관용의 정도와 폭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데 있다.
2000년부터 2005년까지 3천여 명의 전·의경이 폭력 시위를 막다가 몸을 다쳤다. 경기경찰청의 한 의경처럼 평택 미군기지 반대 시위대에 끝이 갈라진 대나무 창으로 찔려 눈을 잃은 경우도 있었다. 불법적 폭력 시위를 진압하는 경찰을 불타 죽게 한 부산 동의대 사태 관련자들은 민주화 인사가 되었다.
이러니 집회 신고에 포함되지 않은 불법 행진을 제지하고 참가자들을 안전지대로 유도하려 한 전경 2명과 경찰관 4명이 집단 구타를 당하면서도 “억울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냐” “그냥 넘어가야지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국가와 공권력이 가지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모르지 않고서야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어쩔 수 없다’ ‘그냥 넘어가야지’라는 말의 밑바닥에는 공권력을 품고 있는 국가가 그렇게 맞아도 어쩔 수 없고 차라리 그 점이 더 편하다는 생각, 국가와 공권력을 개인적 이기심의 희생양으로 잡아놓고 있는 것이 국민을 60여 년간 보호해준 대한민국에 대한 응대의 현실이다. 문제는 이런 체념 현상이 공권력 행사자로 하여금 스스로도 무감각하게 법을 위반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국가 원수가 실정법을 어겼으니…

 

국가 원수이자 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이라는 실정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법이 정한 절차와 권한에 의거하지 않고 권력적 힘의 논리에 의해 ‘국가보안법’상 반국가 단체인 이른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김정일에게 개인적으로 비밀리에 5억 달러에 상당하는 현금을 준 비법치주의적 행태가 그 예이다.
헌법은 대통령에게 통일의 책무를 부과했지만 그 책무는 헌법의 법치주의 원리에 구속받는 책무에 불과하다. 즉 법에 따른 절차 등에 의해 이를 행하라는 것이 헌법의 내용이다. 스스로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그 이행의 절차는 법이 정한 바에 따르라는 것이 공동체의 가장 크고 기본 약속인 헌법의 뜻이다. 대통령은 예외라는 이른바 ‘통치 행위’ 논리는 공동체 질서에 예외는 있을 수 없다는 법치주의의 가장 큰 적이다. 집단을 이루어 격렬한 선전과 행동을 보이는 주체들에 대해 주어지는 관용의 정도가 커질수록, 법을 지키면서 살아가려는 선량한 사람들은 우리의 공동체에 점점 더 회의를 가지게 된다.
인터넷과 여행으로 자연스럽게 익힌 국제적 삶의 기준을 가진 세대들에게 우리의 공동체는 이를 담아줄 수 있는 기본적 토양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사회 있는 곳에 법이 있다”로 표현되는 규범화된 사회, 즉 질서 있는 공동체의 부재가 그것이다. 공정한 게임의 규칙에 의해 노력한 대가를 정당하게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의 부재이다. 사회의 무규범성에 따른 ‘공동체의 야수화’가 가속되고 있는 우리 한국의 현실, 법이 아니라 힘이 지배하는 집단에서 사회라고 하는 기본 토양을 가지는 공동체는 성립될 수 없는 듯 보인다. 풍조가 그러하다 보니, 젊은이들의 삶의 행태 역시 이악스럽게 변하고 있다. 이는 공공 의식의 결여, 즉 공동체 의식의 손상으로 나타난다. 법질서 경시의 또 다른 측면이다.
흔히 오해하는 것들 중의 하나가 창의성이다. 야생동물을 방목하듯이 제멋대로 놓아두고 마음대로 행동하게 하는 것이 기죽이지 않고 창의성을 기를 수 있다는 식의 생각과 창의성은 다르다. 전자는 사회를 황폐화하는 행태이지만 후자는 공동체를 규범화된, 좀더 높은 차원의 질서화된 사회로 만들 수 있는 요소이다. 창의성은 기초를 마스터한 후에야 발휘될 수 있는 ‘반보(半步)’의 진전이다. 비약은 환상이다. 그 반보의 기반이 법이다. 법은 공동체에서 사회 구성원 간의 약속이고, 그런 점에서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며 그러한 법은 점점 국제화되어 문명 국가의 공통된 현상으로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한국 사회에 불안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한국병의 원인인 법질서 경시로 인해, 우리 스스로가 헌법과 법에 의한 통치와 지배를 생활화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개인의 인권이 법과 질서의 준수를 필수적 전제로 한다는 점에 대한 우리의 이해 부족이기도 하다. 법질서 유지는 법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안전과 행복하게 살자는 바람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병의 실체는 궁극적으로 인권의 주체인 ‘개인’의 소중함, 즉 그 존엄성의 경시에서 나온다. 개인의 소중함은 이성적 인식이어야 한다. 그러나 개인의 존엄함을 바탕으로 이성적 접근에 의한 국가 형성과 그렇게 형성된 국가의 이성을 선순환하지 못한 채, 우리는 지난 수년간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이름으로 역사를 버리려 한, 버릴 수 없는 것을 버리겠다던 국가적 감성이 지배해왔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법치주의 결여라는 측량하기 어려운 손해를 본 것이다.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48.9%를 득표해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는 그 ‘참여’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헌법과 법 질서를 유린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되고 있다. 정부는 이를 참여와 대화를 기초로 하는 새로운 국가 시스템이 정착되기 전의 일시적 현상이라고 말하지만, 국가 자체가 법적인 측면에서 보면 구성원들의 무한적인 이기심을 어느 정도 양보한 결과물이며, 또한 그 파생물이 법질서라면, 법과 규칙이 정한 바에 따라 법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는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정부의 존립도 어렵고 국민의 인권도 법적으로 보호될 수 없다.
민주화 정부로 일컬어지는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그리고 참여정부의 한결같은 실책은 입헌주의의 이름으로 법치주의에 입각한 법의 지배를 국정의 기본 틀로 자리 잡게 하는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 정착을 실현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 요체는 공정한 법 집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한국병으로 지칭되는 ‘제멋대로’ 사회의 치료약이 될 것이다. 또한 사회의 이해 갈등 조정 과정에서 준거부권을 가진 이익집단의 불법행위에 대한 정부 권력의 묵인을 질타할 수 있는 법의 목소리가 될 것이다. 국가는 그러한 정신을 진작해야 한다.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는 정착 안 돼


내가 남한테 맞지 않고 지낼 수 있는 것은, 국가의 공권력인 경찰의 치안유지권이 있기 때문이다. 내 돈을 빼앗기지 않는 것 역시 절도나 강도 행위를 범죄로 규정해 처벌함으로써 사유재산 제도를 지켜주는 국가의 공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헌법 전문은 ‘국가는 국민의 자유와 안전과 행복을 지켜줄 때에만 존재 의의가 있음’을 명문화하고 있다. 그런 공권력이 흔들리면 우리들 신체의 안전과 재산을 보호하는 국가와 그 국가에서의 삶은 파괴된다. 토머스 홉스가 근대국가 탄생 직전에 저술한 <리바이어턴>에서 말한 자연 상태에서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전근대적인 비법(非法)의 생존으로 회귀할 것이다.
국가 공권력은 오늘의 우리들을 자연 상태의 생존에서 국가의 삶 속으로 이끌어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보증해주는 물이나 공기와 같은 존재로 인식된다. 그 결과 국가의 헌정 질서와 그 공권력이 우리의 삶과 최소한의 행복을 담보하는 기재임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 비(非)인식이야말로 대한민국이라는 이 나라를 해체의 길로 인도하는 첫걸음이 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도 태연하게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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