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중산층 ‘좌절’ 먹고 사는가
  • 유근원 기자 ()
  • 승인 2007.07.09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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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중산층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라는 사람이 크게 늘어났다. 10년 뒤에도 중산층 지위를 지킬 것으로 보는 비율도 60%에 머무르고 있다.

 
대전에 사는 한범석씨(39)는 지방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한 지 14년째 되는 중견 회사 과장이다. 한과장이 30대 초반일 때만 해도 남들처럼 집을 사고 가정을 꾸리는 일쯤은 대수롭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요즘 그의 생활은 생각처럼 잘 풀리지 않고 있다. 이래저래 부담이 늘었기 때문이다.
그의 연봉은 3천6백만원. 가계 수입은 매달 빠듯하다. 월급이 적어 저축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한다. 재테크 차원에서 주식 투자를 하지만 최근에는 시기를 놓쳐 멈춘 상태이다. 2002년에 18평형 아파트를 샀지만 값은 오르지 않고 대출 이자만 크게 불어났다.
“아파트는 내 이름으로 되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더 이상 아니다. 돈을 빌려준 은행 것이나 마찬가지다. 형편이 나아질 조짐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생활을 벗어나려면 현재로서는 ‘로또 복권’을 사서 당첨되는 길뿐이다.”
나름으로 열심히 살아왔지만 그는 이제 더 이상 중산층이 아니라고 말했다. 한과장과 마찬가지로 경제 지수로만 놓고 볼 때 과거에는 중산층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라고 느끼는 사람이 크게 늘어났다.
1970년대에 객관적 기준에 미달하면서도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여기던 사람이 많았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외환위기를 겪고 난 뒤 중산층들의 의식은 뚜렷하게 바뀌었다. 10년 뒤에도 현재의 중산층 지위를 이어갈 것으로 낙관하는 비율 역시 60%에 머무른다. 중산층으로 여기는 기준은 한층 높아졌고 미래에 대한 기대는 사라지고 있다.
이같은 조사 결과는 한국종합사회조사(KGSS)를 바탕으로 분석한 보고서에서 드러났다. 중산층들의 눈높이와 가치관은 상류층과 비슷하지만 경제 여건 등 현실이 뒷받침되지 않아 사회에 대한 불신과 불만이 더 커졌다. 자본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훨씬 강해졌다. 예전에는 가장 믿었던 시민단체들도 불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동산 양극화’가 몰고 온 중산층의 비극


여러 지표들을 놓고 우리 사회에서 중산층이 양극화된다거나 중산층이 몰락한다는 지적마저 나온다. 물론 이런 지적에는 놓친 부분이 없지 않다. 아직까지 중산층에 대해 합의된 개념 규정이 없는 상태에서 단순 지표에 따른 임의적 분석이므로 정답은 아니라는 얘기다. 경제적으로 개인 자산 소득 차이로 생기는 상대적 박탈감이 바로 그 배경이다. 끝없이 치솟은 집값 때문에 대부분의 자산을 부동산에 묻어두는 우리 현실에서 경제적 불평등을 대물림하기 쉬운 구조로 바뀌어가고 있다. ‘부동산 양극화’라는 말은 맞지만 ‘중산층의 양극화’라고 몰아가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중산층의 객관적 분류 기준은 소득이나 자산 등의 경제지수로 보았을 때 소득 수준이 최저 생계비의 2~2.5배 이상에 이르는 계층을 말한다. 하지만 이런 분류도 중산층의 평균을 찾아내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저소득층과 부유층의 경계를 규정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중산층에 대한 분류는 나라와 사회마다 다르다. 1970년대 초 퐁피두 프랑스 대통령은 중산층이 가져야 할 삶의 질 조건으로 “외국어 구사 능력이 있고, 직접 즐기는 스포츠와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으며, 나만의 요리를 할 줄 알아야 한다. 정기적 나눔 같은 사회 참여를 꾸준히 해야 한다”라고 밝혔다.
2003년 워싱턴 타임스는 “먹고 살아갈 만한 충분한 연간 소득이 있지만 퇴근길에 사가는 피자 한 판, 영화 관람, 국제 전화 등에 돈을 쓸 때 아무 생각 없이 소비할 수는 없는 사람이 미국의 중산층이다”라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먹고 살 만큼의 소득은 있지만 일반 소비를 하는 데 제약을 느끼는 계층이라는 설명이다. 중산층을 구분하는 잣대에 대해 재미있는 사례가 또 하나 있다. 미국 텍사스의 교육 전문가 루비 페인 박사(56)는 “미국 사회에서 중산층을 구별할 때는 지금 막 끝낸 저녁 식사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따라 자신이 속한 사회적 계급이 드러난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저소득층은 ‘배불리 먹었니?’라고 묻고, 중산층은 ‘맛있게 먹었니?’라고 묻는다. 부유층은 ‘차려진 음식이 보기 좋게 나왔니?’라고 묻는다”라고 말했다.
어떤 옷을 좋아하는지로도 계층이 드러난다. 빈곤층은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강조하지만 중산층은 브랜드를 따진다. 부유층에게는 예술성이 중요하다.
국내 중산층에 대한 주관적 분류에도 관심을 끄는 예가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국내 중산층은 대학을 나와 직장에서 10년 정도 다니고 있고, 가구당 월평균 수입이 3백만원 이상이며 30평 아파트에 사는 사람으로서 2천CC 중형 승용차를 가진 가구가 해당한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연구소는 “최근 대학 졸업이 곧 생활 안정이라는 도식은 무너졌고 대안도 찾기 어렵다는 것이 현실이다”라고 전제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이동훈 박사는 “최근 3년 동안 저소득층과 상류층의 가계 경제 만족도는 오른 반면 중산층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중산층의 정치적 성향은 보수 성향으로 흐르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정책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사각지대에 놓인 중산층을 재조명해야 한다. 고용 창출과 소득 증대로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켜 자본주의의 중심 축을 복원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중산층이 복원되려면 국민의 경제적 가치 상승뿐 아니라 정신적 가치 상승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정신적 가치 목표가 없는 사회는 물질 만능 뒤에 숨겨진 부작용으로 인해 엄청난 사회 문제를 짐으로 떠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개개인들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경제적 지위 상승이 삶의 풍요를 가져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겠지만 정신적 가치의 빈곤은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고 엄청난 공허감을 몰고 올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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