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부시, ‘계급장 떼고’ 짬짜미
  • 로스앤젤레스·진창욱 편집위원 ()
  • 승인 2007.07.16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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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 개인 별장에서 각별한 회동…‘소치 동계올림픽’ 결정에도 큰 영향 미쳐

 
"노무현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과테말라에서 맞짱을 떴다.” 참여정부에서 장관을 지낸 여권 인물이 얼마 전 부산에서 가진 강연회 때 공개적으로 한 말이니 사실일 것이다. ‘맞짱 뜬다’는 말은 국어사전에 나오지 않는 속어이지만, 두 사람이 서로 ‘계급장을 떼고 한판 붙는다’는 의미이다. 이런 식으로 한판 붙고 나면 ‘코피’를 먼저 쏟은 사람이 진다. 이 여권 인물의 말대로라면 노대통령은 과테말라시티에서 ‘코피’를 쏟았다. 소치를 대표한 푸틴 대통령이 평창을 대표한 노대통령을 제치고 2014년 동계올림픽 개최권을 가져갔기 때문이다.
지난 6개월 동안 평창은 IOC의 평가 보고서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고 있었다. 동계올림픽 개최지 후보 도시에 대한 전문 평가 웹사이트인 게임즈비즈닷컴(GamesBids.com)의 후보 도시 평점 인덱스에서 평창은 64.99, 소치는 63.17, 잘츠부르그는 62.62로 평창이 가장 앞서 있었다. 노대통령과 푸틴 대통령은 물론 오스트리아의 하인츠 피셔 대통령이 직접 과테말라시티를 방문해 로비 경쟁을 벌였다. 푸틴은 로비 경쟁에서 영어와 프랑스어로 IOC 위원들을 사로잡았다. IOC의 주요 언어가 프랑스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의 프랑스어 구사 실력은 작지 않은 효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AP 통신은 푸틴의 악수 세례가 IOC 회의장을 휘저었다고 보도했다. 이 통신은 푸틴의 외교력이 평창과의 4표 차를 만들어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푸틴은 유도 유단자인 스포츠맨이다. 푸틴은 소치를 위해 얼마 전 소치의 스키장에 가서 직접 스키를 탐으로써 세계의 시선을 끌었다. 공산주의자 이미지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않은 인물인 푸틴이 세계를 향해 서방 상업주의를 뺨치는 홍보 활동을 벌인 것이다. 이건희 IOC 위원도 평창에서 스키를 타는 ‘시범’을 보임으로써 대외 홍보에 적극 나섰다.
푸틴은 미국의 부시 대통령에게 공개적으로 ‘노’라고 말하는 인물이다. 그러고도 그는 메인 주 케네벙크포트에 있는 부시 가문의 여름 별장에 초대받았을 뿐만 아니라, 올가을에도 텍사스 주 크로퍼드에 있는 부시 대통령의 개인 별장 프레이리 처치 랜치에 초대되어 다시 정상회담을 갖는다. 푸틴은 4년 전 부시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고 지난달에는 미국이 체코에 세울 미사일 방어체제(MD)에도 단도직입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해 부시 입장을 난처하게 했다. 미국 대통령의 서쪽 백악관으로 불리는 프레이리 처치 랜치는 부시가 텍사스 주지사 시절인 1999년 1백30만 달러(약 13억원)를 주고 매입한 약 1백80만평 규모의 목장이다. 목장 안을 흐르는 개울의 길이가 5km나 되고 7개의 계곡이 펼쳐져 있다. 부시는 이곳에 침실 4개에 1백40평 크기의 저택을 짓고 지난 7년간 미국 이익에 중요하거나 친미로 꼽히는 외국 지도자 15명을 차례로 초대해 정상회담을 가졌다. 아시아 국가 지도자로는 장쩌민 중국 국가주석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포함되었다.
푸틴, 몸 아끼지 않는 ‘악수 외교’로 눈길
이번에 푸틴이 방문한 케네벙크포트는 미국에서 가장 비싼 별장지다. 이곳에 있는 부시 가문 별장은 부시의 외증조부가 1백5년 전에 구입해 지은 집이다. 이 별장은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이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와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을 초청해 정상회담을 가졌던 곳이다. 푸틴은 지난 7월2일 과테말라시티로 가는 길에 이곳에 들러 부시 부자의 대접을 받았다. 푸틴은 낚시와 쾌속정을 즐기고 편안한 복장으로 얘기를 나누었다.
부시는 편안한 차림의 별장 정상회담을 즐긴다. 캠프 데이비드가 미국 대통령의 공식 별장인 것과 달리 이들 개인 별장은 격식을 차리지 않는 대화에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부시의 개인 별장 회담은 정상 간의 허심탄회한 대화, 이른바 ‘계급장 떼고’ 벌이는 정상회담이다.
 

케네벙크포트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은 MD 문제는 물론 슬로베니아의 나토 가입 문제, 이란·이라크 문제 등 국제 문제를 광범위하게 논의했다. 별장 정상회담 직후 과테말라시티 IOC 총회에 참석하는 푸틴이 부시 대통령에게 소치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부탁했을 것으로 보는 데는 무리가 없다. 푸틴이 직접 거론하지 않았다면 정상회담에 통상적으로 따르는 보좌관들 간의 회의에서 거론되었을 수도 있다. 푸틴이 소치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더라도 부시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소치 지지를 정상회담 선물로 제공했을 수도 있다. 부시 대통령은 마카오 은행 BDA가 관련된 북한 불법 자금의 해제 과정에서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푸틴에게 빚이 있는 처지이다.
과테말라 방문길에 오른 노무현 대통령은 푸틴의 케네벙크포트 방문 바로 전날인 7월1일 시애틀에 기착해 부시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시는 노대통령에게 “IOC에서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치사했다. 결과는 공치사가 되었다. 듣기에 따라서는 ‘과테말라시티에서 헛고생하겠다’라는 완곡한 표현으로 들릴 정도이다. 미국의 지지를 전화로 기대하는 것과 ‘계급장 떼고’ 나눈 대화를 통해 부탁하는 것과의 차이가 클 것이다.
이번 IOC 총회 투표에서 미국 IOC 위원 3명의 표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현재로서는 소치로 갔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3표로 운명이 갈린 평창과 소치는 어쩌면 케네벙크포트에서 이미 준비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나오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푸틴은 과테말라시티에서 IOC 위원들을 상대로 팔이 아프게 악수를 하고 다녔다고 AP 통신은 전했다. 그리고 푸틴은 소치에서 공수한 실외 아이스링크를 열대 과테말라시티에 설치하고 아이스 쇼를 벌였다. 푸틴의 과테말라시티 이벤트는 케네벙크포트 이벤트에 비해 결코 손색이 없었다. 과테말라시티에서 벌어진 노무현 대통령과 푸틴 대통령 간의 ‘맞짱’은 사실 세계 최중량급 복서와 미들급 복서의 ‘글로브 벗은’ 맞대결이었다. 참여정부의 전직 각료 말대로 ‘맞짱’인 것은 확실했지만 승패는 누가 보아도 이미 결정난 상황이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한국 정부와 정주영 현대 회장의 일치단결이 만들어낸 작품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이번 평창 유치전은 한국 정부와 삼성의 합작이었다. 서로가 불편한 상대인 것으로 알려진 두 집단이 벌인, IOC를 향한 로비에서 성과를 기대하기는 애초부터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과테말라시티에서 가진 동포 간담회 때 ‘평창의 승리를 장담’했다. 그러나 IOC 총회에서 세계가 본 것은 노대통령의 ‘코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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