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성 빈혈’에 잠 못이루는 지방 병원
  • 노진섭 기자 ()
  • 승인 2007.07.30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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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종합병원 접수 창구 앞. 대전에서 왔다는 신 아무개씨(41)가 다급한 표정으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최근 빈혈 증세가 심해져 직장에 휴가까지 내고 병원을 찾았다고 한다. “이왕이면 서울의 큰 병원에서 정밀 진단을 받고 싶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다른 종합병원. 지방에서 올라온 황 아무개씨(66)가 장기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뇌출혈로 쓰러진 후 가족들이 이 병원으로 데리고 왔다고 한다. 그를 보살펴줄 자식과 친인척이 모두 서울에 있기 때문이다.
지방 환자들의 ‘무작정 상경’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는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의료진과 시설, 서비스가 좋은 병원을 찾는 것은 대다수 환자의 바람이다. 먼 거리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서울에 있는 대형 종합병원이 무조건 좋다는 인식은 오히려 화를 부를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생명이 위독한 환자가 이송되는 과정에서 시간을 끌다 치료가 늦어져 회복 불가능해지는 사례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특정 치료 분야에서 탁월한 실력을 갖춘 지방 병원이나 의사들도 많다. 굳이 서울에 몰려야 할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지방 환자들의 서울행은 멈출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경북 영양읍에서 개업하고 있는 영양병원 박병수 원장은 “영양군 내 주민들 중 서울로 가는 환자들은 대부분 서울에 친인척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또 서울에 있는 병원들이 진료비는 비싸도 의료 기술은 좋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다”라고 말했다.
진료나 치료를 위해 서울을 찾는 지방 환자는 얼마나 될까. 2005년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의료법 일부 개정 법률안 검토 보고서>를 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 소재 대형 병원 환자 중 지방 환자가 절반을 차지했다. 삼성서울병원의 경우 외래 환자 10명 중 7명이, 입원 환자 10명 중 6명이 지방 환자인 것으로 집계되었다.
젊은 환자보다는 노인 환자의 서울행이 두드러진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자료에 따르면 경북에 사는 60~69세 환자가 서울 병원으로 가는 비율은 1998년 19.9%에서 2004년 27.2%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70세 이상 환자는 9.4%에서 18.4%로 두 배가량 증가했다.
대구에 사는 60~69세 환자가 서울 병원으로 가는 비율은 1998년 9.5%에서 23.6%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70세 이상 환자는 3.2%에서 11.5%로 무려 네 배 가까이 늘었다.

 
서울 소재 대형 병원들 지방 환자 유치 경쟁도 치열
지방 환자들이 서울 병원으로 몰리는 이유는 우수한 의료진으로부터 진료를 받고 싶어하는 심리 때문이다. 동네 의원보다 대형 병원, 그것도 이왕이면 서울에 있는 대형 병원을 찾는 이유이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지난해 대구경북병원회에 제출한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과 수도권 병원을 이용한 대구 거주 환자 1천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50%는 ‘의료진이 우수해서’라는 이유를 꼽았다. 16.7%는 ‘자식이나 친척의 연고가 서울에 있기 때문’, 12.5%는 ‘치료효과가 좋아서’라고 답했다.
 서울 소재 대형 병원들의 지방 환자 유치 경쟁은 더욱 뜨거워질 전망이다. 서울 병원들은 경쟁적으로 병상을 증설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2천3백여 개의 병상이 있는 서울아산병원은 올해 말까지 6백여 개를 증설한다. 세브란스병원도 5백개, 강남성모병원도 4백개 병상을 2008년까지 증설하기로 했다. 삼성서울병원도 올해 말까지 6백개 병상을 증설한다. 2008년 말이 되면 이 네 개 병원의 병상만 8천3백개가 넘는다. 지방 환자의 ‘서울 쏠림’ 현상은 더 심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가능하다.
2004년 개통된 고속철도(KTX)는 이런 현상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고속철도를 이용하면 당일 진료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지방 병원들의 어려움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전통적인 진료 과목인 내·외과보다 성형외과 등 일부 인기 과목으로 의료진이 몰리는 것도 지방 병원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성형외과의 경우 지방보다는 대도시, 특히 서울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이 때문에 지방 병원은 의사뿐 아니라 간호사도 구하기 쉽지 않은 인력난까지 겪고 있다.
의료 전달 체계가 무의미해진 것도 지방 병원들의 설자리를 빼앗고 있다. 의료 전달 체계는 종합병원으로 환자가 집중되는 현상을 막기 위해 1차 진료기관인 병·의원을 거쳐야 하도록 의무화한 제도로 1989년부터 시행되고 있다. 이 제도에 따르면 경증 환자는 동네 의원이나 전문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중증 환자의 경우에만 대형 병원이나 종합병원으로 갈 수 있다. 하지만 경증 환자들도 동네 의원에서 ‘진료 의뢰서’를 발급받아 3차 진료 기관인 대학병원에 갈 수 있기 때문에 이 제도의 실효성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박병수 영양병원장은 “서울 등 대도시에 있는 대학병원으로 가려는 환자는 보험 혜택을 받기 위해 진료 의뢰서를 발급받는다. 한 달에 약 10건 정도이다. 그러나 응급 환자나 보험 혜택이 되지 않는 치료인 경우 발급받지 않고 직접 가는 경우도 가끔 있다. 진료 의뢰서를 발급해달라는 환자들은 대학병원으로 가려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작은 병원 입장에서는 이를 거절하기 어렵다. 또 환경이 열악한 지방 병원보다 대형 병원으로 가려는 환자를 무작정 말릴 수도 없는 형편이다”라고 말했다.
아예 문을 닫는 중소 병원도 늘고 있다. 전체 병원의 83.1%를 차지하고 있는 3백 병상 미만의 중소 병원들의 도산율은 1999년 6.5%에서 2002년 9.5%로 늘었다. 2001년 전체 산업 도산율이 0.23%인 데 비하면 매우 높은 수치이다. 대한병원협회 김성환 학술실장은 “서울에 있는 중소 병원이 도산할 정도라면 지방에 있는 중소 병원은 말할 것도 없다. 1996년부터 병원은 적자이다. 주차장·영안실·식당 등 진료 외 수입으로 보충해야 할 정도이다. 지방 병원, 특히 중소 병원은 삼중고를 겪고 있는 셈이다”라고 말했다.

 
딱 부러진 지방 병원 활성화 대책 없어 ‘막막’
2004년 6월 강원도 원주에서 통증클리닉을 개원하고 있던 마취과 전문의가 부인과 동반 자살했다. 개원 11년째였지만 줄어드는 환자에 간호사·직원 인건비조차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2004년 2월에는 경북 김천시에서 산부인과를 경영하던 전문의가 자살했다. 지방 도시를 오가던 이 전문의는  수차례의 개원이 모두 실패하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증권 투자에 손을 댔다 10억여 원의 빚을 안게 되었다고 한다.
지방 병원들의 한숨소리가 커지자 국회가 나섰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는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지방 환자들의 수도권 집중 완화 대책을 마련할 것을 보건복지부에 촉구했다. 보건복지부는 처리 결과 보고서를 통해 “2005년 12월 관계 부처 합동으로 ‘공공 보건의료 확충 종합대책’을 확정해 발표했다. 국립대병원(광역)-지방의료원(지역단위)-보건소(지역) 중심의 지역 연계 체계 구축을 추진 중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딱 부러진 지방 병원 활성화 정책은 없다. 보건복지부 의료정책팀 관계자는 “공공 의료 기관 프로젝트나 2차 진료 기관 전문화는 추진하지 않고 있다. 지역 차별 등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지방 병원이라고 해서 활성화하는 정책은 없는 것으로 안다. 다만 규모가 적은 중소 병원을 위한 정책은 검토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지방 병원들도 자구책을 마련하고 있다. 지난 6월 대구·경북병원회, 대구시의사회, 대구시 등은 전국에서 처음으로 공동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각 병원 응급의료센터 간 핫라인을 개설해 응급 환자 편의를 도모하기로 했다. 공동 홍보팀을 운영하고 지역 명의(名醫)도 발굴해 적극 홍보할 계획이다.
전문 진료 과목을 키우는 것은 하나의 트렌드가 되고 있다. 대구 소재 경북대병원은 모발 이식, 인천 길병원은 심장 질환, 대전 선병원은 척추 전문으로 특화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다. 화순의 전남대병원은 지방 병원으로는 유일하게 암 전문병원으로 인정받았다.
우수한 의료진과 시설 확보뿐 아니라 경영 능력 키우기에도 눈을 돌렸다. 경북대병원은 전략경영실을 두어 병원 운영 전반을 경영 차원에서 체크하고 있다. 일본의 사례처럼 유명 의사를 도시와 농촌에 번갈아 근무하게 하는 순환제를 도입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관계자와 전문가들은 무엇보다도 지역 의사와 병원을 믿고 진료·치료를 받는 지역 주민들의 신뢰와 협조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박병수 영양병원장 인터뷰

“인력·시설 부족해도 살가운 정 넘친다”

박병수 영양병원장은 아침마다 새 소리에 잠을 깬다. 대도시 빌딩 숲에 파묻힌 병원에서는 맛볼 수 없는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 병원에 비해 수입은 적어도 나름대로 지방 병원의 운치를 즐기고 있다. 지방 환자들에게는 정신적 교감이 기술적인 의술보다 필요하다는 것이 박원장의 지론이다.
의료 인력은 충분한가?
지방 병원의 의료진은 매우 부족하다. 우리 병원에도 의사는 3명뿐이다. 그나마 2명은 공중보건의이다. 따라서 모든 환자를 다 진료할 수 없다. 때문에 환자들이 대도시, 특히 서울로 몰리고 있다.
의료진이 부족한 이유는 무엇인가?
연봉이 문제가 아니다. 지방으로 오려는 의사가 있어도 배우자나 자녀 문제 때문에 오지 못한다. 문화·교육시설 등이 갖춰지지 않은 지방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시설은 어떤가?
컴퓨터 단층촬영(CT)이나 자기공명 단층촬영(MRI)은 엄두도 못 낸다. MRI는 5억원 정도 하는데 시골 병원에서 이런 장비를 갖추기란 병원 경영상 무리가 따른다.
하루 환자 수는 얼마나 되나?
지방 병원에만 있다가 이 병원으로 온 지는 한 달 정도 됐다. 처음에는 환자 수가 100명도 안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1백50명으로 늘었다. 장날이면 2백명도 넘는다.
대도시 병원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지방 병원은 무엇보다 친절해야 한다. 의료진과 시설이 변변치 못한 지방 병원이 별다른 경쟁력이 있겠는가. 환자를 가족처럼 대하는 것이 경쟁력이라면 경쟁력이다. 대도시 병원의 기계적인 친절함이 아니다. 환자의 시시콜콜한 얘기까지 들어줄 정도로 살갑게 대해야 한다. 추수 때면 곡식이나 과일을 싸들고 와서 병원 식구들에게 나눠주는 환자들을 서울 병원에서 만나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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