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장 ‘허걱’ 지방 행정 ‘삐걱’
  • 정락인 기자 ()
  • 승인 2007.08.06 13:5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민소환제, 정치적 악용·주민 갈등 우려…소환 사유 제한 등 개선 시급
 

지난 7월1일부터 발효된 ‘주민소환제’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다. 당초 주민소환제는 지방자치단체장(자치단체장)의 무능과 비리를 감시하자는 취지에서 도입되었다. 자치단체장이 임기 중 위법·부당 행위를 하거나 직권 남용, 직무 유기 등을 했을 때 해임할 수 있는 제도이다. 일종의 리콜 제도인 셈이다.
발효된 지 한 달여가 지난 시점에서 주민소환제는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겪고 있다. 악용 및 남용 우려가 제기되면서 보완책 마련이 시급해졌다. 주민 간 갈등·반목, 행정 공백, 예산 낭비 등의 부작용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경기도 하남시가 표본이 되고 있다. 하남시는 광역 화장장 유치 문제로 시와 주민들이 갈등을 빚고 있다. 화장장 유치를 반대하는 주민들은 주민소환추진위를 구성해 김황식 시장의 소환을 추진 중이다. 화장장 유치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시장 직에서 끌어내릴 움직임이다. 소환 청구에 필요한 서명인 수(1만5천7백59명)를 이미 넘어선 것으로 알려져 실제 주민 소환이 이루어질 전망이다.
김시장은 헌법재판소에 헌법 소원을 내는 등 주민 소환에 맞서고 있다. 김시장은 “현행 주민소환법이 구체적인 청구 사유를 규정하지 않아 포괄 위임 입법 금지 원칙을 위반했다”라고 청구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거나 선거에 패한 상대편이 악용할 소지가 있다는 것도 문제로 삼고 있다. 
주민 소환이 이뤄지면 김시장의 직무는 정지된다. 유권자의 3분의 1 이상이 투표를 해서 과반수가 찬성하면 시장 직도 잃는다. 현역 시장이 주민 소환에 의해 시장 직을 잃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주민소환제의 문제점으로 대두된 것은 행정 공백, 예산 낭비, 주민 갈등, 악용·남용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주민 소환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지방 행정의 공백이 불가피하다. 투표를 치러야 하는 비용도 만만치 않다.

예산 낭비, 소신 행정에 걸림돌 지적도 나와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자치단체장들이 소신 행정을 펼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지역 이기주의로 국책 사업 등이 차질을 빚을 수 있다. 혐오 시설로 분류되는 쓰레기 매립장이나 화장장, 방폐장 등이 들어설 지역을 찾는 데 애를 먹게 된다. 자치단체장이 사사건건 주민들에게 끌려갈 수 있다. ‘눈치 행정’‘선심 행정’‘민심 행정’으로 변질될 수 있다.
 하남 시장의 주민 소환에서도 이런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우선 화장장 유치가 주민 소환을 당할 사안이냐 하는 논란이다. 
이에 대해 하남시 주민소환추진위원회측은 화장장 유치 반대가 아니라 주민 의사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유치를 결정한 시장의 오만과 독선을 문제 삼는 것이라고 말한다. 시장으로서의 자질 부족, 시민에 대한 고소·고발 남용 등을 소환 이유로 들고 있다. 주요 사업을 독선적으로 추진한 시장의 잘못이 주민 소환을 초래했다는 뜻이다.

 
주민 소환을 둘러싼 갈등이 하남시만의 문제는 아니다. 다른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주민들이 자치단체장의 소환을 추진하고 있다. 서울에서는 강북 구민들이 초과 근무수당 허위 지급 등을 이유로 김현풍 강북구청장에 대한 주민 소환을 추진 중이다. 미아1-1구역 재개발 통합청산위원회는 김구청장 소환을 위해 지난 7월4일 ‘주민소환투표 청구인 대표자 증명서 교부신청서’를 강북구 선거관리위원회에 냈다. 직무 유기와 직권 남용, 독선적 행정 등이 주민 소환 청구 이유이다.
심의조 경남 합천 군수는 지역 내 ‘새천년 생명의 숲’을 이 지역 출신 전두환 전 대통령의 아호를 딴 ‘일해 공원’으로 바꿨다가 소환 대상에 올랐다. 김도현 서울 강서구청장은 선거법 위반 등이 문제가 되었다. 김구청장은 배우자 등이 선거법 위반 혐의로 1심에서 당선 무효형을 받았지만 반성하지 않고 항소하면서 주민들의 분노를 샀다. 김구청장의 배우자와 비서실장은 5·31 지방 선거를 앞둔 지난해 1월 당원 등 일부 지역 인사들에게 ‘안동 간고등어’를 선물한 혐의로 1심에서 벌금 3백만원을 선고받았다.
호남 및 흑인 비하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이효선 광명시장도 소환 대상에 올랐다. 이 시장은 지난해 7월 공식 오찬에서 호남 비하 발언을 해 탈당했다. 지난 5월에는 공식 석상에서 흑인을 비하하는 인종 차별적 발언을 해 물의를 빚었다. 이밖에도 관광성 남미 외유를 했던 서울시 7개 구청장 등이 주민 소환 대상으로 떠올랐다.
전국 시장·군수·구청장 등 기초 단체장들은 주민소환제가 지역 이기주의 등에 악용되지 않도록 개선해 달라고 노무현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이들은 지난 7월12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정 보고회에서 주민소환제가 특정 이익 단체나 정치 집단의 정쟁 수단으로 악용·남발될 우려가 있다고 언급했다. 이에 따라 자치단체장의 소신 행정에 장애가 되고 행정 공백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민 소환 청구 사유를 최소한으로 명시하거나 예외 조항을 두는 방식으로 개선해줄 것을 요구했다.
행정 전문가들은 주민소환제의 도입 취지를 살릴 수 있는 제도적인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주민들의 정당한 권리와 요구는 살리되 단체장의 소신 행정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추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선 소환 사유에 대해 일정한 제한을 둘 필요가 있다. 포괄적이지 않고 적절한 제한 방안을 찾고, 단체장과 주민들 간의 조정 기구도 필요하다. 현행 주민소환법상 ‘법령이나 직무 유기 등’의 추상적인 문구를 명확하게 구분지어야 한다.
안형기 건국대 행정학과 교수는 “주민소환제는 지역 발전을 위해 도입되었다. 특정 이익, 특정 단체를 대변하려는 것이 아니다. 시장과 주민의 완충지대 즉 ‘협의 기구’가 필요하다. 어떻게 구성하느냐는 지자체와 주민의 협의에 따르면 된다. 외국의 사례를 분석·검토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외국의 주민소환제는…

주민소환제는 선진국 여러 나라에서 실시되고 있다. 미국·일본·독일·스위스· 베네수엘라 등이 주민 소환제를 도입했다. 미국은 1903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미국의 소환 투표는 두 개의 방식으로 진행된다. 소환 결정에 대비해 소환 투표와 후임자 선출을 동시에 하는 방식과 소환 투표만 분리하는 방식이다. 소환 제도는 주로 지방자치단체에서 이용된다. 주지사 소환은 몇 차례 시도되었지만, 결정된 사례는 캘리포니아 주가 유일하다.
독일은 각 주의 지방자치법에 주민 소환의 근거를 두고 있다. 실질적으로 주민 소환이 이루어진 것은 1990년대 이후이다. 바덴 뷔르템베르크 주와 바이에른 주를 제외한 모든 주에서 주민소환제를 실시하고 있다. 소환제를 점차 강화해 일부 지자체는 선출직 공무원뿐 아니라 단체장이 임명한 주요 공직자까지도 소환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다.
일본은 1947년부터 주민소환제가 도입되었다. ‘해직 청구권’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해직 청구 대상은 단체장, 의회 의원 등 선출직은 물론 부지사·감사·공안위원 등 주요 임명직에 대해서도 해직 청구를 인정하고 있다. 시행 초기에 많은 소환이 이루어졌다. 청구 사유는 제한이 없다. 일본은 내각 책임제이므로 지방 의회에 대한 주민들의 불신임권도 인정한다.
베네수엘라에서는 소환 제도가 비교적 폭넓게 인정되고 있다. 유권자의 20% 이상이 서명하면 대통령의 재신임까지 물을 수 있다. 자치단체장은 임기 절반을 넘겨야 가능하고, 당선 당시 득표 수와 같거나 더 많으면 퇴출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